LIFESTYLE 내추럴 와인과 교토

교토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변치 않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다. 이번 여행은 여느 때와 조금 달랐다. 굳이 맛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기요미즈데라 같은 명소도 찾지 않았다. 일정 중에 딱 두 군데만 들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내추럴 와인 바 코모레비노와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에델바인. 애초에 여행의 목적이 정해져 있었다. 목적은 내추럴 와인이었다.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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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와인을 좋아하게 된 후 다녀온 도쿄는 완전 다른 도시야.”
도쿄에 다녀온 친구의 이 말 한 마디에 일본 여행을 결심했다. 도쿄는 내추럴 와인 바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도 꽤 많다. 조금 힙한 업장은 내추럴 와인을 취급한다고 했다. 요요기에서 사흘 머물면서 근처만 돌아다녔는데 점심, 저녁으로 내추럴 와인만 마셨단다. “그런 행복이 없었다”고 말했다. 요요기의 한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에서 구입한 일본 내추럴 와인 한 병을 꺼내면서 자랑스럽게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매장에는 “내추럴 와인이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추럴 와인은 과거 방식대로 만드는 와인을 말한다. 여기서 ‘과거’란 산업화 이전 쯤으로 보면 된다. 산업화 이후 양조 방식은 크게 바뀐다. 기술과 기계와 화학 물질로 여러 가지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양조법의 핵심은 배양된 효모다. 덕분에 와인은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얼마든지 원하는 맛을 인위적으로 내는 것이 가능하다.


내추럴 와인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지만 ‘배양된 효모를 쓰지 않고 포도에 묻어 있는 효모 그대로 발효시켜 만든 와인’이 가장 맞는 말이다. 와인은 인류가 기록을 시작하기 전부터 마시던 술이다. 포도에 묻은 효모가 발효를 일으켰고, 누군가 우연히 그걸 맛본 후부터 전파되고 발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효모는 말 그대로 어디에나 존재한다. 미생물이니 공기 중에도 생물과 무생물의 표면에도 묻어 있다. 당을 먹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포도 역시 효모가 묻어 있고 포도의 당분은 효모의 좋은 먹이가 된다. 속설에 따르면 효모는 그 지역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다고 한다. 내추럴 와인의 매력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마도’ 효모가 지역의 기운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내추럴 와인은 개성이 뚜렷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똥 냄새가 난다거나, 외양간 냄새 때문에 못 마시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도’ 효모가 그 지역 농장과 농토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어서가 아닐까. 계속 ‘아마도'를 붙이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어서다. 의외로 술과 관련된 속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경우가 참 많다. 이 속설을 믿게 된 것은 ‘토끼소주’에 얽힌 어떤 일화를 겪은 후부터다. 토끼소주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던 친구가 마시자마자 뉴욕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런데 토끼소주는 뉴욕에서 만들어지는 한국식 증류 소주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믿을 예정이다.


맛을 따로 컨트롤하지 않으니 컨벤셔널 와인(내추럴 와인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의 ‘와인’을 굳이 이렇게 부른다)보다 산미가 강한 편이다. 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한 것도 있다. 여러 가지로 호불호가 갈리는 게 당연하다.


자연 효모 그대로 발효시키는 건 오늘날 첨단 시대에 맞지 않는 발상이다. 포도 농사 성패에 따라 해마다 와인 품질이 달라질 것이고 대량 생산은 아예 불가능하다. 농약을 뿌리면 포도 표면에 묻은 효모가 죽을 것이니 농약을 쓰지 못하고, 농약을 쓰지 않으니 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 심한 곳은 매연 때문에 트랙터 같은 농기계마저 굴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일일이 손으로 포도를 수확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이다. 농작물을 다량으로 생산하려는 입장에서는 단점인데, 이상하게도 이것이 너무도 명백한 장점이 된다. 유기농 인증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구조다. 대량 생산만 포기하면 와이너리마다 전혀 다른, 개성 넘치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넘치는 개성과 적은 생산량. 마니악한 문화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 어느 문화권에서도 대중화되지 못했다. ‘힙스터’ 문화라기보다 마니아 문화에 가깝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게 2~3년쯤 되었고 내추럴 와인 전문 와인 숍은 전무해도 전문 와인 바는 꽤 생겼다. 청담동, 한남동, 성수동 등을 중심으로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는 업장도 상당히 늘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들른 연남동 어느 후미진 곳에 위치한 선술집에서도 내추럴 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추럴 와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한국에서 즐기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날로 유통되는 내추럴 와인 종류는 늘고 있지만 10년 이상 자리 잡은 시장에 비해 그 종류는 턱없이 적다. 각 와인마다 개성이 명확하게 달라서 더 다양한 종류를 맛보고 싶지만 물량이 받쳐주지 않는다. 내추럴 와인에 관심을 가진 지 2년여 만에 한국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종류를 다 마셔봤을 정도다. 이제 막 태동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 시장이니 어쩔 수 없다.


일본 대도시 중심으로 내추럴 와인 바와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을 검색했다. 매력적인 매장이 여러 군데였지만 확 끌리는 곳은 교토의 내추럴 와인 바 코모레비노였다. 내추럴 와인에 빠진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바에만 앉을 수 있고, 그나마 열 석이 채 안 된다. 혼자서 운영할 수 있는 크기였다. 다른 한 곳은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에델바인이다. 관광객들이 굳이 갈 일 없는 한적한 동네에 있다. 사진으로만 봐도 내추럴 와인 종류가 수백 가지는 돼 보였다. 여기다 싶었다.

 

 

교토에 도착한 날

교토에 도착한 날 오픈 시간에 맞춰 코모레비노에 갔다. 저녁 6시 오픈으로 알고 갔는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정이 있어 1시간 정도 늦게 연다는 내용이었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7시가 넘어서 돌아왔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내부는 오래된 와인 저장고 같은 느낌이었다. 기운 없어 보이지만 친절한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메뉴를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메뉴판은 있지만 메뉴판에 와인 이름이 적혀 있진 않다. 내추럴 와인 3잔 3500엔, 스페셜 내추럴 와인 3잔 5500엔, 오늘의 글라스 와인 1000~3500엔, 와인 한 병 7000엔부터 등 구성은 단출하다. 가끔은 여러 특정 와인으로 구성된 메뉴판을 따로 준비하기도 한다. 모두 잔으로 팔고 와인마다 가격이 다르다. 보통 1000엔대 가격으로 구성된다.


생산량이 한정적인 내추럴 와인 특성상 고정적으로 특정 와인을 구비하긴 힘들다고 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어서 여러 병 주문해도 원하는 만큼 받기 힘들다. 유통사에서 줄 수 있는 물량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 수십여 종의 내추럴 와인을 상시 준비해두고 있다. 사장님이 내추럴 와인 마니아기 때문에 안목을 믿고 추천을 맡겨도 된다. 잔으로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것 또한 이곳의 매력이다.


나는 여러 가지보다는 병을 하나 시켜서 진득하게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내추럴 와인은 공기와의 접촉 시간에 따라 맛이 쉽게 변하는 특성이 있어서 시간을 두고 한 병을 다 마셔도 충분히 재미있다. 컨벤셔널 와인보다 공기와의 접촉에 훨씬 민감하다. 이런저런 질문 끝에 유니크한 8000엔 정도의 와인을 한 병 추천 부탁했다. 잠시 고민하더니 특유의 느린 움직임으로 셀러에서 하나둘 와인을 꺼냈다. 총 여덟 병을 바에 올려두고 조용조용 설명을 시작했다. 의사소통에 적극적인 분이라 짧은 영어와 번역기를 활용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난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정도의 일본어와 그것보다 딱히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 정말이지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각 와인의 산지, 품종, 맛의 특성, 와이너리나 와인 메이커의 스토리까지. 고민 끝에 조지아 와인을 선택했다. 리시 리미티드란 이름이었다. 조지아란 나라는 생소하기도 하고 어떤 와인을 만들지 상상조차 안 됐다. ‘유니크’한 것을 원한다면 이것만 한 게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이 아니고선 마셔볼 확률이 거의 없는 와인이었다. 라벨에는 드라이 앰버 와인이라고 써 있었다. 화이트 와인인데 진한 호박색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내추럴 와인!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 맛에 깜짝 놀랐다. 와인이라기보다는 좋은 중국 차에 가까운 맛과 향이었다. 사장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넓은 도자기 잔을 주면서 거기에도 따라 마셔보라고 안내해주었다. 과거 조지아에서는 유리 잔이 아닌 도자기 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기분 탓일까. 차와 비슷한 맛 때문인지 도자기 잔에 마시는 게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도 한국인 부부가 왔다며 부쩍 외국인 손님이 늘어서 신기하다며 웃었다. 내추럴 와인이 좋아서 혼자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곳곳에서 찾아와주니 영광이라고 했다. 코모레비노는 외국인 손님이 유독 많은 곳이다. 유명 내추럴 와인 메이커가 직접 방문하거나 뉴욕에서 온 와인 칼럼니스트가 찾기도 한다. 손님의 발길이 끊기지는 않지만 가게 자체가 북적이는 분위기는 아니다. 내가 찾은 날도 와인 한 병을 다 마실 때까지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장님에게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추천을 부탁했다. 에델바인을 추천했다. 뿌듯했다. 이미 가려고 마음먹은 곳이다. 교토 내에서 에델바인만큼 다양한 내추럴 와인을 판매하는 곳은 없다고 했다. 앱도 하나 추천해줬다. ‘레이즌’이란 내추럴 와인 앱이었다. 레이즌은 건포도라는 뜻이다. 앱은 구글 맵 기반으로 전 세계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취급 레스토랑, 바, 와이너리까지 표시해준다. 인스타그램처럼 피드에 마신 와인을 올려서 공유할 수 있고 와인 라벨이나 바코드를 찍어서 와인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추럴 와인 애호가라면 반드시 내려받아야 한다. 아쉽게도 한국 업장 정보는 많이 표시되지 않지만 해외 여행 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앱 내에서 지도를 확대하면 도쿄에만 100곳이 넘는 내추럴 와인 관련 업장이 확인된다. 파리는 300곳이 넘는다.


얼큰하게 취해 다음에 또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 눈 뜨기 무섭게 에델바인을 최종 목적지로 두고 여행 동선을 짰다. 숙소 근처에서 카레로 늦은 아침을 먹고 근처 옷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본 후 타마고산도가 유명한 카페로 향했다. 핸드 드립 커피도 함께 시켰다.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창 사이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블루보틀로 향했다. 아주 짧게 커피 한 잔 뚝딱 마시고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꽤 먼 거리지만 에델바인까지 걷기로 했다. 지나는 길에 츠타야서점이 나와서 잠깐 구경하고 에델바인에 도착했다.


에델바인의 가게 앞 흰 벽면에 자전거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로로 길게 난 창으로 실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무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가니 점원이 문 하나를 더 열고 와인을 보러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와인을 제대로 보관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 방이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벽 전체에 여러 종류의 내추럴 와인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가운데 나무 상자에도 종류별로 쌓아 진열해놨다. 천국이다. 그냥 이 공간에 잠시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정확히 세어보진 못했지만 어림잡아 300종류는 되었다. 세계 각지 내추럴 와인과 일본에서 생산하는 내추럴 와인까지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코모레비노 사장님이 반드시 추천을 받으라고 했다. 종류가 너무 많아 추천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일단 10여 분을 말없이 구경했다. 내추럴 와인은 라벨도 개성이 넘친다. 친구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마음에 드는 라벨을 고르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말도 한다. 신기하게도 높은 확률로 성공했다. 와인 라벨에는 와이너리의 철학과 취향과 개성이 녹아 있다. 라벨 이야기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여기까지만.


점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 와인은 어떠냐, 이런 느낌의 와인이 있냐, 가메 품종으로 만든 와인 중 무엇을 추천하느냐, 일본 와인 추천해줄 것도 있느냐 등등. 짧은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다. 일종의 놀이였다. 맛과 향과 스타일과 품종과 나라 정도만 말할 줄 알면 아주 친절히, 진지하게 와인을 추천해줬다. 다섯 병을 사고 말았다. 2만 엔이 안 되게 나왔는데 8000엔이 넘는 걸 한 병 샀으니 나머지는 1만~3천 엔 사이다. 와인 종류도 종류지만 가격이 너무 저렴했다. 한국이라면 와인 매장에서 내추럴 와인을 사려면 최소 6만~7만원 정도는 줘야 한다. 물론 면세 범위 이상으로 들고 가면 관세와 주세까지 더해 한국과 크게 가격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한국에 다 들고 가는 건 무리라 가장 좋은 와인 한 병을 제외하고 여정 내에 다 마셨다. 교토에 있는 동안은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 오사카로 이동해서는 거기 사는 한국 친구 집에 이틀 더 머물며 두 병을 해치웠다.


마지막 한 병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시는 중이다. ‘에르데’란 이름의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이다. 에르데는 독일어로 지구, 대지 등을 뜻한다. 영어로 ‘어스’와 같은 말이다. 셉 & 마리아 머스터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들었고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을 블렌딩했다. 유리병이 아닌 토기에 담겼고 대지와 지평선, 석양을 미니멀하게 표현한 라벨도 멋스럽다. 살롱 O에서 시음해본 와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묵직하면서도 복잡한 향이 좋았다. 한국에 수입되지만 한국에서 유통되기를 참지 못하고 교토에서 먼저 사온 것이다. 내추럴 와인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여행 스타일은 그중 하나다.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Writer Kim jin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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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한지희PHOTO : 김혜은(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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