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소개팅 자리였다. 남자를 만나는 자리라 나름 스타일리시하게 챙겨 입었다. 커다란 영문 로고가 프린팅된 베트멍의 화이트 후디 위에 검정 집업 블루종을 입고, 하의 역시 같은 색 플리츠스커트를 매칭했다. 여기에 발렌시아가의 스피드 러너 삭스 스니커즈를 신었다. 그때는 캐주얼한 스포티 룩을 입고 소개팅 자리에 나가는 게 상당한 실례였나 보다. 상대가 날 훑어보는 차가운 시선과 “촬영하다 바로 오신 건가 봐요”라는 말을 들으며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각설하고, 사담을 꺼낸 이유는 지금 다시 그 자리에 나간다면 괜한 미안함이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서다. 특히 잔뜩 드레스업한 이번 시즌 스포티 룩을 입었다면 어땠을까?

처음이었다. 저런 못생긴 운동화라니! 2017 S/S 루이 비통 런웨이를 보고 개인적으로 든 생각이다. 테니스를 즐기는 어머니의 운동화를 잠시 떠올렸다. ‘설마, 이게 유행할까? 기껏해야 올 시즌 반짝하고 말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 이 아치라이트 스니커즈가 패션계의 트렌드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런웨이에 등장하자마자 SNS를 통해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아치라이트 스니커즈는 하이패션의 트렌드를 견인하며 루이 비통의 간판 매출 스타로 등극했음은 물론이고 ‘어글리 스니커즈’ 혹은 ‘대디 스니커즈’란 귀여운 별칭까지 얻으며 슈즈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시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아치라이트 스니커즈가 출시되고 있으며, 여전히 인기다. 해시태그와 함께 SNS, 유튜브를 도배하고 있다.

등장하자마자 패션계를 떠들썩하게 한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는 스트리트 룩과 트레이닝복, 오버사이즈 후디와 패니팩을 하이패션 무대에 올린 일등 공신이다.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그는 기존 하이엔드 브랜드의 구태의연한 공식을 과감하게 깬 스포티 룩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중 2018 S/S 발렌시아가를 통해 선보인 삭스 스니커즈는 스포티즘의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 새틴 혹은 스트레치 소재의 롱부츠와 삭스 스니커즈는 시즌을 넘어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브랜드에서 변형한 디자인을 출시하고 있다. 이 모든 런웨이의 혁신이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해마다 존재감을 뽐내며 진화를 거듭하는 스포티즘. 스포티 룩의 변주는 다양한 패션 아이템과 결합하며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2019 S/S 런웨이에는 하이엔드 럭셔리의 범주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잔뜩 드레스업한 스포티 룩이 연이어 등장했다. 아노락 재킷이나 트랙 슈트, 어글리 스니커즈 등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이 뉴 스포티즘의 열풍 속에 런웨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본연의 형태나 소재가 아닌, 실크나 트위드, 새틴과 같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더한 채 말이다. 다수의 럭셔리 브랜드가 ‘새로운 스포티즘’의 구현에 집중한 결과이다.

켄들 제너의 ‘최애템’으로 떠오른 바이크(일명 사이클링 쇼츠) 쇼츠는 샤넬을 비롯해 꽤 많은 럭셔리 명품 하우스가 런웨이에 선보였다. 고급스러운 트위드 재킷에 이 바이커 쇼츠를 입은 모델이 런웨이에 등장했을 때 그렇게 쿨해 보일 수 없었다. 또 프라다는 1960년대 레이디라이크 룩을 재해석해 리본을 장식한 톱과 헤어밴드로 여성스러움을 살리면서 바이커 쇼츠와 삭스 샌들을 매칭한 스타일을 제시했다. 언제 어디서든 입을 수 있는 뉴 스포티 룩을 완벽하게 구현한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뉴 스포티즘에 럭셔리한 터치를 더했다. 시크한 오버사이즈 핏의 셔츠와 조거 팬츠에 지퍼를 장식하고 커다란 폴더 백을 팔 안쪽에 낀 채(마치 빅 사이즈 클러치를 손이 아닌 팔로 든다고 느껴지는) 드레스업한 스타일을 완성한 것. 이 외에도 나열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많은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하이엔드 스타일을 입힌 스포티 웨어를 런웨이에 올렸고, 이는 고스란히 가장 뜨거운 트렌드가 되었다.

스포티즘의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을 것이다.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극대화하고 보다 젊어진 소비자층의 욕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때문에 그간 스포츠 웨어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페미닌한 레이스와 오간자 같은 의외의 소재가 사용될지도 모른다. 스웨트셔츠에 사용되던 투습성 좋은 면과 운동복에 사용하던 플렉서블 저지 소재는 당분간 주연 아닌 조연으로 전락할지도 모르고. 결국 스포티즘은 젠더리스로 대변되는 사회 문화적 격변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전통적인 스포츠 웨어가 상당 부분 남성의 영역에서 발생한 산물이었다. 땀에 젖은 스웨트셔츠와 오버사이즈 핏으로 상징되던 맨즈 웨어에 페미니즘 바람과 젊어진 소비 연령 등의 사회 경제적 흐름이 영향을 미치며 파고든 것이다. 남성성을 대표하는 커다란 실루엣과 상반된 페미닌 소재의 조화로운 매칭, 이것이 바로 가장 동시대적인 스포티 룩이 아닐까. 덕분에 마감에 지쳐 한없이 편한 복장으로 마치 내 집인 양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에디터도 약간의 수혜(?)를 받았다. 앞으로 불어올 ‘뉴 럭셔리 스포티즘’이 어떤 형태로 진화해 나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더네이버, 패션트렌드, 스포티 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