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MUDA ZONE
‘어중간함’을 매력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버뮤다 팬츠뿐이다. 이 어중간한 팬츠의 시작은 버뮤다 제도의 원주민 복장에서 유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버뮤다 지역에 머물던 영국 군인이 무릎길이로 바지를 잘라 입은 데서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활동성이 좋고 자유분방해 보인다. 하지만 이번 시즌, 여러 브랜드에서 우르르 내놓은 버뮤다 팬츠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된다. 포멀하거나 캐주얼하거나. 요즘 트렌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보테가 베네타 역시 버뮤다 팬츠를 컬렉션의 중심에 세웠다. 캐주얼하면서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은은한 광택의 유연한 양가죽을 소재로 통 넓게 디자인했고, 이를 몸에 찰싹 달라붙는 니트와 매치한 쿨한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솔기를 그대로 드러내 미완의 멋을 강조한 아크네 스튜디오나 운동복을 개량한 듯한 라코스테는 버뮤다 팬츠를 캐주얼한 무드로 풀어낸 대표적인 예다. 반면 재킷과 짝을 이뤄 포멀한 룩을 완성한 브랜드로는 막스마라, 알투자라, 샤넬, 끌로에, 생로랑 등이 있다. 슈트의 고전적이고 클래식한 면과 버뮤다 팬츠의 경쾌하고 스포티한 만남의 묘한 시너지가 여러 디자이너의 욕망을 자극한 모양이다.

HOT MICROMINI
페스티벌이나 해변가에서 즐겨 입던 데님 쇼츠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얼핏 핫 팬츠의 미덕이 분방함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몸에 착 감기는 실루엣이 드러내는 여성스러운 아찔함이 훨씬 강하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밑위가 아주 짧고 몸에 꼭 맞는 바지’라는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해석해 데님 쇼츠처럼 밑단이 헐렁하지 않도록 만들고 재킷을 입혔다. 이를테면 턱시도 재킷과 실크 셔츠, 핫 팬츠를 한 벌의 슈트인 양 매치한 생로랑처럼. 알렉산더 왕이나 에르마노 설비노 역시 핫 팬츠와 비슷한 길이의 재킷을 스타일링했는데, 넉넉한 품의 재킷 덕에 앞선 브랜드들보다는 좀 더 경쾌한 무드가 흐른다. 에르메스나 마이클 코어스, 이자벨 마랑은 위아래를 모두 같은 색으로 맞춰 마치 한 벌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며, 디올과 샤넬은 레이스와 트위드로 제작해 여성성을 부각했다. 핫 팬츠에 미처 기대하기 어려웠던 면모가 원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칫하다간 상스러워지기 십상인 핫 팬츠의 치명적인 단점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세련된 방식이다.

SEE-THROUGH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다 은근히 드러내는 게 오히려 섹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래서 관능적이고 싶을 때, 시스루를 찾는다. 블랙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속이 비치는 시스루 셔츠를 입는 식으로. 혹은 로맨틱한 무드를 표현하기에 이만한 게 없다. 레이스와 시어한 소재를 섞은 블라우스나 스커트는 여성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극적인 방법이다. 그렇다면 속이 훤히 비치는 바지는? 뇌리에 똬리를 튼 건 가수 박진영의 비닐 바지이기 십상일 터. 그렇다면 이번 시즌 런웨이는 시스루 바지에 대한 환상을 새롭게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전통 제작 기법과 섬세한 수작업으로 다양한 드레스를 만드는 세실리에 반센도 시스루 팬츠에 주목했다. 마치 누에고치가 뽑은 실처럼 가느다란 천을 이용해 만든 슈트는 동서양의 멋이 공존한다. MSGM과 알렉산더 맥퀸 역시 시스루 슈트를 만들었는데, MSGM은 눈이 시릴 정도로 쨍한 분홍빛으로 물들인 레이스 장식의 시스루 슈트에 스니커즈를 매치해 활달한 면을 부각했고, 맥퀸은 귀족적인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했다. 반전의 묘미를 추구한다면 정신없이 찢어진 디테일을 넣은 재킷에 섬세하기 그지없는 오간자 소재 팬츠를 매치한 아크네 스튜디오가 좋은 예다. 하지만 거리에서 시스루 팬츠를 입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땐, 레지나 표의 컬렉션처럼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입고 찰랑거리는 시스루 팬츠의 밑부분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참고하자.

WIDE LEATHER
가죽 바지가 유행의 궤도에 올라온 지는 꽤 됐지만 굳이 트렌드 아이템으로 소개하는 건 계절 탓이다. 봄과 여름에 즐길 수 있는 가죽 아이템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는데, 가죽 바지도 그중 하나라서. 하지만 벗을 때마다 홀라당 뒤집어지기 일쑤인 스키니 팬츠나 자칫 맨살에 생채기를 내는 지퍼 장식이 곳곳에 달린 록적인 무드는 이번 시즌 스타일이 아니다. 질 좋은 니트에 턱을 여러 겹 잡은 가죽 바지를 매치한 아뇨나와 큼지막한 주머니를 적재적소에 넣고 통을 넉넉하게 만든 에르메스의 짙은 초록색 가죽 바지는 낭만적인 여름밤에 더 어울리고, 스카프처럼 디자인한 상의와 가죽 버뮤다 팬츠의 궁합을 선보인 보테가 베네타, 셔츠와 크로셰 베스트를 레이어드하고 빨간색 가죽 바지를 매치한 알투자라는 봄나들이를 나설 때 적격이다. 전반적으로 바지 통을 넉넉하고 유연하게 만들어 가죽 바지의 부담스러운 이미지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그동안 ‘걸 크러시’나 ‘섹시’ 등 가죽 바지에 따라붙는 수식에 부담을 가졌다면 이번 시즌만큼은 마음의 문을 열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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