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속옷의 속사정

은밀하고 조용하게 혹은 대담하게, 속옷이 바뀐다.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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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드러운 감촉의 실크로 우아한 실루엣을 만드는 아락스. 2 몸을 옥죄는 장치 하나 없이 유연하게 만든 이세이 미야케의 브라렛과 팬티. 3 코스에서 선보인 다양한 형태와 소재의 브라렛. 4 고급스럽고 호사스러운 면면을 선보이는 라펠라. 5 지속가능한 소재를 활용해 뉴트로 무드를 강조한 MCM의 언더웨어 컬렉션. 

 

어른이 된다는 것의 기준점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속옷이라고 말하겠다. 물론 속옷은 기저귀를 뗀 후부터 늘 입었지만, 속옷에 주체성은 없었다. ‘어떤’ 속옷을 입을지 내 손으로 정한 때부터, 속옷을 ‘어떻게’ 입을지 전략을 짜기 시작한 때부터가 진짜 ‘어른’이다. 그렇다면 속옷의 시초는 언제였을까? 구약 성서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뒤 수치심을 느끼고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린 것, 혹은 고대 이집트 시대에 겉옷 안쪽에 무언가를 껴입은 것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속옷이 실질적으로 등장한 건 르네상스 시대 이후다.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강조한 복장이 유행하면서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이 등장했다. 하지만 코르셋은 여성의 신체를 압박해 갈비뼈의 변형을 일으키거나 내장 기관의 이상을 초래했고, 여성을 성적으로 객체화한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를 외치는 혁명이 일어난 뒤, 코르셋의 소재와 모양이 변하면서 코르셋에서 분리된 유방지지구는 현재의 브래지어가 되었다. 반면 팬티는 브래지어의 근원과는 반대의 환경에서 나왔다. 18~19세기경 프랑스와 영국인이 입던 드로어즈가 그 시작인데, 일하는 여성의 활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치마 안에 입던 짧은 바지가 지금의 팬티로 발전한 것이다. 한 쌍으로 입는 여성 속옷은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으로 세상에 나왔고,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한다. 우리는 그 흐름에 따라 속옷을 어떻게 입을지 전략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고. 

 

화려한 레이스를 이용한 속옷 컬렉션을 전개하는 에탐. 7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캘빈 클라인의 새로운 컬렉션, CK ONE의 언더웨어. 8 간결한 디자인과 차분한 색상으로 여성의 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네거티브 언더웨어. 9 정교한 커팅과 디자인으로 몸의 선을 아름답게 살려주는 로셀 잉글랜드. 

 

속옷 트렌드는 보통 겉옷의 유행과 궤를 같이한다. 핀업 걸이 유행했을 무렵에는 여성의 실루엣을 더욱 과장하고 극대화하려는 목적으로 ‘총알 브래지어’가 여자의 가슴을 장악했다. 언더 와이어가 없는 동그란 모양에 끝이 뾰족한 콘 모양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그 이후 와이어를 삽입한 브래지어가 나오면서 자취를 감췄지만, 1990년대에 장 폴 고티에가 마돈나를 위해 제작한 총알 브래지어 모양의 코르셋 슈트 덕에 또 한 번 유명해졌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이야기는 속옷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1960년대, 디자이너 루디 게른라이히가 만든 두 개의 멜빵과 하이웨이스트 비키니 하의로 구성된 울 저지 수영복은 속옷을 착용하지 않는 ‘토플리스 룩’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 시절,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논란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모든 금기에서 해방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변화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는 상황 속에서 속옷이 화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 겉옷 트렌드에 따라 속옷의 경향이 바뀌는 건 중력처럼 당연한 일이다.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가 우리에게 선사한 충격을 떠올려보자. 그 시기는 바로 청바지 밑위가 짧아지던 때다.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는 마크 월버그와 케이트 모스를 광고 모델로 내세웠고 광고에 드러난 속옷 밴드 위 ‘Calvin Klein’ 로고는 그 무엇보다 강하고 매혹적인 메시지였다. 캘빈 클라인은 그렇게 밴드에 로고를 넣은 속옷의 상징으로, 속옷을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2017년 라프 시몬스가 캘빈 클라인을 이끌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을 때도,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의 기본 로고는 그대로 두었을 정도니까. 1990년대가 미니멀리즘으로 물든 건 어쩌면 캘빈 클라인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반대의 변화가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아낌없이 투자하려는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고급스러운 소재, 섬세한 자수 등을 더한 수입 속옷이 대세로 등극한 것이다. 라펠라, 아장 프로보카퇴르, 에탐 등 유럽에서 건너온 속옷은 여성의 판타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이 속옷을 ‘풀 세트’로 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터. 생각해보자. 실제로 연인이 보고 싶어 안달난 날은 잘 익은 복숭아 껍질처럼 부드러운 감촉과 정교한 레이스로 완성한 호사스러운 속옷을 완벽하게 장착한 날이지 않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또 하나의 흐름은 로고를 잔뜩 얹은 스포츠 브래지어다. 스포츠웨어가 하이패션의 영역에 안착한 시기와 겹친다. 제러미 스콧은 브랜드 로고를 정신없이 박은 스포츠 브래지어를 등장시켰고, 마돈나는 공식 석상에 보이런던의 스포츠 브래지어를 입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뉴트로’ 트렌드에 로고가 박힌 속옷이 다시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다. 요즘에는 자신의 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는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가 지지를 얻는다. 인위적이고 판에 박힌 모습보다는 다양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에 집중하는 태도다. 리한나는 여러 인종과 체형의 여성을 위해 새비지 X 펜티라는 속옷 브랜드를 론칭했다. ‘경계를 확장하고 여성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이 같은 흐름은 빅토리아 시크릿마저 움직였다.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몸매를 지닌, 바비 인형 같은 모델의 표상이었던 그 브랜드 말이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과 트랜스젠더 모델을 기용하고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팬티나 브래지어 대신 몸을 좀 더 편하게 만드는 브라렛을 적극적으로 선보이는 방식으로 보디 포지티브의 가치를 내세우는 중이다. 에디터 역시 얼마 전 브라렛을 ‘깔’별로 잔뜩 구매했다. 와이어나 패드가 없는 홑겹 브래지어인데, 얼핏 수수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파리지앵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거 같아서 입으면 입을수록 ‘내추럴’의 위력을 몸소 실감한다. 


이제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고급 소재, 장식을 추종하는 시대는 지났다. 획일화된 기준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곳에 돈을 쓰고 싶어 한다. 예쁘긴 하지만 마치 화보 촬영용 샘플 옷을 받아서 입은 듯 불편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진정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보디 포지티브라는 트렌드가 언제 또 새로운 유행으로 바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긍정적 태도에 기반한 트렌드는 골백번 바뀌어도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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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홍혜선PHOTO : 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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