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비밀의 화원

시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로크 양식의 고택에 개성을 불어넣고 싶었던 며느리. 공간과 공간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로 같은 구조의 집이 신비로운 비밀의 화원으로 변신했다.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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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나무가 우거진 정원을 프린트한 벽화 벽지로 연출한 전실. 코너에 놓인 접이식 의자는 1960년대 빈티지. 세르조 아스티(Sergio Asti)의 디자인으로 가구 브랜드 자노타(Zanotta)에서 제작했다. 

 

이 집의 전실에는 사방으로 각각 현관, 침실, 거실 그리고 욕실로 통하는 문이 있다. 그중 거실은 기존의 문을 없애고 드나들기 쉽게 아치형 입구로 변신한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홀은 비밀의 정원처럼 연출하기 위해 수작업으로 완성한 벽화 벽지로 마감했다. 벽지는 프랑스 벽지 아틀리에 아낭보(Ananbô)에서 제작한 것이다.

 

“역사적인 건물임은 잘 알지만 천편일률적인 모습은 탈피하고 싶었어요.”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마르첼로(Marcello)는 시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1900년대 초 완공된 팔라초(Palazzo)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 라구사(Ragusa)주에 속하는 모디카(Modica)에 자리한 팔라초는 현재 마르첼로 가족이 살고 있는 집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바로크 양식’의 집이기 때문이다. “바로크 특유의 장식이 오히려 더 과하고 구조 역시 복잡해서 어떻게 변신시켜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꽃이 만개한 듯 화려한 1900년대 시멘트 타일을 보존한 거실. 벽에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표현한 포르나세티 벽지를 붙여 공간감을 주었다. 

거실 한쪽에 마련한 다이닝 코너. 철제 프레임의 우드 캐비닛과 브라스 & 대리석 소재의 선반에는 푸른 식물을 놓아 싱그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칠리아 라구사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이지만 주 전체가 바로크 스타일로 완벽하게 통일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17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지진과 화산 폭발로 라구사주는 폐허가 되었고, 이후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는데, 그중 모디카는 후기 바로크 건축이 마지막 꽃피운 도시다. 모디카 중심에 자리한 산 조르조(San Giorgio) 대성당은 1542년에 건립되었지만 두 번의 지진을 겪은 후 40여 년간 진행된 개축을 통해 1738년 바로크 양식의 결정체로 재탄생하며 주변 건축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900년대 초, 당시 주변에 새롭게 축조되거나 재건된 건물 대부분이 지향한 표본이 바로 산 조르조 성당이다. “이 집이 딱 그 당시 건축된 곳이죠. 한 귀족 가문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화려한 장식과 미로 같은 실내 구조는 산 조르조 대성당에 근거한 것이라 해요.” 마르첼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집은 수도원과 성당, 그 접점에 있는 느낌이다. 둥근 돔 천장이 있는 건물 아트리움은 성당의 판테온을 떠올리게 하고, 공간과 공간이 연속되는 구조 때문에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방은 마치 수도원을 연상시킨다. “양쪽으로 열리는 현관문을 열면 무도회장처럼 화려한 패턴 타일이 깔린 공간이 나타나기도 해요. 저는 화려한 바로크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정돈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구로 꾸민 서재. 책장과 카운터 책상은 옛날 학교 도서관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타자기는 이탈리아 최대 사무기기 제조사인 올리베티 브랜드에서 생산한 빈티지다.

 

마르첼로가 집 단장을 결심하고 가장 신중하게 고심한 부분은 디자이너 선정이었다. 모디카의 구도심에 자리한 입지,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이 보이는 전망을 지닌 팔라초를 무턱대고 고칠 수 없는 법. 마르첼로는 전통 건축과 지역 문화에 이해가 깊은 디자이너를 섭외해야 했고, 그 적임자로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검(Studio Gum)을 운영하는 발렌티나 잠피콜로(Valentina Giampiccolo)와 주세페 미날디(Giuseppe Minaldi)를 선택했다. 라구사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두 디자이너는 시칠리아섬의 다양한 전통 건축물을 개인 주택부터 별장, 호텔 등으로 위트 있게 변화시켜 주목받은 실력파. “이 지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은 디자이너예요. 특히 모디카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라 전통 가옥을 개조한 숙박 시설이 많은 편인데, 스튜디오 검이 담당했던 호텔은 제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가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실용적이고, 시칠리아 전통미를 모던하게 풀어낸 인테리어 디자인은 마르첼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거실 창가 코너. 암체어는 1950년대 빈티지로, 이탈리아 패브릭 브랜드 데다르(Dedar) 원단으로 새롭게 커버했다. 초록색 테이블 램프 역시 1960년대 빈티지. 벽에 걸린 그림은 이탈리아 아티스트 미리암 파체(Miriam Pace) 작품이다.

 

스튜디오 검의 두 디자이너가 마르첼로의 집을 둘러본 후 내린 처방은 단점을 개성으로 치환하자는 것이었다. “19세기 이 지역에 지어진 건물을 보면 공간이 또 다른 공간을 추종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점이 눈에 띕니다. 문을 열면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나는 구조죠.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호기심을 유발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비밀의 문’을 통해 은밀한 공간까지 만들어놓은 집도 있으니까요.” 디자이너 발렌티나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 집은 유독 미로 같은 구조가 돋보인다. 건물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트리움이 있고, 나선형 석조 계단을 오르면 마르첼로의 집 현관문이 나온다. 이 현관문을 열면 전실에 해당하는 홀이 자리하고, 홀의 세 벽면에는 각각 거실, 서재, 주방으로 향하는 문이 나 있다. 그리고 각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욕실, 다이닝, 침실 등으로 통하는 문이 또 등장하는데, 그중 서재와 침실은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결국 문을 계속 열고 들어가다 보면 모든 공간이 끝없는 돌림노래처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에요.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어요. 공간이 연속되다 보니 창문이 거의 없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죠. 상당히 치명적인 단점이죠.” 디자이너가 짚은 단점을 듣던 마르첼로가 빠르게 수긍한다. “맞아요! 저는 살아보지 않아서 크게 인식하지 못한 부분인데, 시조부는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원래 이 집은 1940년대 시조부가 주택으로 구입했는데, 줄곧 댄스 교습소 등 상업 공간으로 임대했거든요.”

 

카펫처럼 깔려 있는 타일 바닥을 보존한 서재. 바닥이 화려한 만큼 가구와 그림은 흑백으로 매치했다. 의자 ‘오아시스’는 자노타 제품, 그림은 포르나세티 전시 포스터다. 

 

디자이너 발렌티나와 주세페는 명암이 뚜렷한 이 집을 큰 구조 변경 없이 고루 밝고 화사하게 개조할 것을 계획했고, 이에 결정적 모티프가 된 것은 부겐빌레아와 재스민으로 둘러싸인 아트리움과 각 공간의 바닥을 화려하게 수놓은 시멘트 패턴 타일이었다. “푸른 식물과 꽃으로 둘러싸인 화사한 아트리움을 지나 집 안에 들어서면 카펫처럼 깔린 형형색색 타일이 마음을 들뜨게 하더군요.” 디자이너 발렌티나와 주세페가 팔라초 전체 건물을 통틀어 조망해 얻은 영감은 ‘비밀의 정원’. 그리고 이는 의외로 한정된 공간에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거실 한쪽에 마련한 다이닝. 블랙 글라스 상판의 월넛 테이블은 1940년대 빈티지, 와이어 의자는 오르세이(Orsay), 서스펜션 조명 ‘비스토시(Vistosi)’는 1960년대 무라노 글라스 빈티지다. 벽에 걸린 사진은 사진작가 에마누엘라 미날디(Emanuela Minaldi) 작품. 

 

“사실 이 집에서 빛이 들지 않는 곳은 배열상 가운데에 위치한 방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 하나가 집 전체를 음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건 동선상 교차로에 해당하기 때문이에요.” 현관으로 가는 길목이자 서재와 거실 그리고 욕실 등 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존재하다 보니 늘 지날 수밖에 없는 곳. 디자이너는 해당 공간 벽면에 수풀이 우거진 정원을 표현한 뮤럴 벽지를 붙이고 세 면에 하나씩 존재하던 문 중 두 개를 떼어내 개방적인 구조를 완성했다. 문을 없앤 후 생긴 2개의 아치형 입구는 이웃한 공간의 자연 채광을 끌어들이는 창문 역할도 겸한다. 복도와 교차로 등 이렇다 할 용도가 없던 공간에 빛과 자연이 깃들면서 일어난 변화는 가히 놀랍다. 비밀의 정원같이 변모한 공간은 의자를 놓아둔 것만으로 안락한 휴식처가 되었고, 이웃한 공간에서 바라보면 마치 창 너머 정원이 펼쳐지는 듯한 효과가 돋보인다. 하지만 디자이너 발렌티나는 여기서 감탄하기에는 이르다 말한다. “이곳에 남아 있는 문 개수를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그러고 보니 문짝을 떼어낸 2개의 입구를 제외하면 한 개의 문이 남아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어느 곳에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발렌티나는 그 비밀을 벽지에서 찾아보라 말한다. “문과 문으로 연결되는 전통 공간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디자이너는 욕실 문을 뮤럴 벽지로 마감함으로써 ‘중요한’ 공간을 눈속임 기법으로 재치 있게 감춰뒀다. “이 집에서 유일한 욕실은 제가 알려주지 않는 한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마르첼로는 자신의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이 화장실을 찾느라 여기저기 문을 열어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가장 어두운 공간이 뮤럴 벽지를 통해 울창한 정원이 되었다면 그와 반대인 밝은 거실은 탁 트인 대자연을 품은 듯 개방적인 분위기로 진화했다. 몰딩 장식을 없애 깔끔하게 정돈한 벽면에는 뭉게구름 가득한 흑백 벽지를 붙이고 꽃문양 전통 시멘트 타일 바닥은 그대로 살렸다. “하늘 아래 드넓은 꽃밭이 펼쳐진 풍경처럼 다가가면 좋겠어요.” 디자이너 발렌티나의 의도는 다행히 집주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실내 분위기가 바뀌니 바깥 풍경이 특별하게 다가와요.” 마르첼로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즐비한 구도심 풍경이 처음 본 듯 새롭고, 이런 전망이 존재하는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닫는다. 

 

바로크 양식의 집을 변신시킨 스튜디오 검(Studio Gum)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발렌티나 잠피콜로와 주세페 미날디. 

 

스튜디오 검은 이 집의 디자인 작업을 두고 ‘비밀의 문’을 열고 새로운 보물을 찾는 설렘 그 자체였노라고 소회를 밝힌다. “흥미로웠던 건 집 지하 창고에서 옛날 가구를 골라 집 안에 매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시아버지가 모아둔 가구와 소품도 물려받은 터. 1950년대 학교, 도서관, 공공기관 등에서 사용하던 가구부터 미드센트리 모던 디자인에 이르는 빈티지는 이 집의 개성을 확실히 책임졌다. “낡은 암체어는 천갈이로 되살리고, 육중한 다이닝 테이블에는 부피감 없는 와이어 의자를 새로 구입해 배치했지만 모두 원래 이 집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워요.” 

 

건물 외부로 난 계단과 연계된 현관. 실내에서 문을 열면 이웃 건물 담벼락을 따라 난 넝쿨 식물과 현관 앞 화초들이 화사한 기운을 전한다. 

 

200년 전 바로크 스타일 팔라초는 디자이너의 섬세한 감각과 위트를 통해 멋지게 부활했지만, 마르첼로 가족은 정작 이곳에서 1년 중 6개월밖에 살지 않는다. 계절에 맞게 집을 옮겨 생활하는 이 지역 고유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 “11월부터 4월까지 도시 주택에 살다가 7월까지는 바닷가, 그리고 8월부터 10월까지는 올리브 수확을 위해 농장에서 지내요.” 절기에 따라 해야 할 일, 즐길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집에 사는 묘미에 대해 마르첼로가 말한다. “집도 오래 떨어져 있다 만나면 달리 보여요. 앞으로 이 집이 얼마나 더 많은 매력을 선사할지 기대됩니다.”  

WRITER LEE JUNG MIN Interior Design Studio Gum(Studiogu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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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한지희PHOTO : Filippo Bamberghi(Photof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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