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23년의 힘

한 가지 일을 10년간 지속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여기 다섯 명의 사람들은 23년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한길을 걸어왔다. 군더더기를 덜고 핵심만 남긴 그들의 밀도 높은 삶.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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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원피스는 에르뎀, 브이넥 재킷은 레하, 운동화는 나이키.

 

 

BAEK SU YEON
백수연_국가대표 수영선수 

물에서 보낸 23년. 0.1초를 앞당기기 위해 흘린 뜨거운 땀은 기록으로 남았다.

수영선수 백수연이 맨 처음 수영장에 들어간 건 여섯 살 때다. 자유형과 배영, 평영, 접영 네 종목을 2년간 배우고 선수반으로 옮길 무렵,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수연이가 평영을 독특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인상적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평영은 그녀의 인생이 된다. 평영은 양팔을 번갈아 사용하는 자유형과는 또 다르다. 양팔을 동시에 쓰고 양다리의 움직임과 합을 맞춰야 하는 타이밍과 밸런스 감각이 중요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올라가는 1년 사이에 키가 14cm 컸다. 당시에 키가 이미 170cm가 넘었다. 키가 크면 팔다리가 길어, 물속을 긁었을 때 0.1초라도 더 빠를 수 있다. 백수연의 기록에 유리하게 작용한 요인이지만, 이는 곧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신체 조건과 신체 능력이 좋은 선수들이 있어요. 전 그렇지는 않아요. 유연성이 부족하고 순발력과 민첩성도 떨어지죠. 스타트도 느린 편이고. 그나마 감각이 발달해서, 후천적인 훈련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백수연은 광주광역시 체육회 소속 선수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2012년 런던 올림픽 등 줄곧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참가했다. 2017년 여자 평영 100m에서 1분 07초 70을 기록했다. 종전 한국 신기록 1분 08초 14를 넘어선 최고 기록이다. “1분 7초대에 들어온 선수는 제가 처음이에요. 제 스스로도 처음 세운 기록이어서 믿기지 않았죠.” 물과 함께한 지 23년 동안 가장 빛났던 시간은 또 있다. 런던 올림픽 예선전에서 자신의 기록을 넘어섰고, 준결승전에서 그 기록을 다시 깼다. 오랜 훈련으로 쌓은 모든 기량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경기다. 반면 어떻게 해도 기록이 나오지 않는 해도 있었다. 2015년은 성적 부진의 이유조차 몰라서 힘들었던 해다. 이유를 끝까지 찾고자 했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훈련도 못 할까 봐, 마음을 비우며 슬럼프를 극복했다. “나이 들어서 기록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나 싶었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 해였어요. 선수로서 좋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가장 힘들죠.” 수영은 기록의 경기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다. 목표를 향해 훈련한 대로 결과를 냈을 때 얻는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힘이 된다. 또 결과가 목표에 못 미치면 오기가 생겨 다음 훈련에 매진할 동기가 되어준다. 그렇게 23년을 살았다. “평영 100m 기록을 한 번 더 깨고 싶어요. 또 평영 200m 기록은 한 번도 넘어선 적이 없어서 늘 숙제로 남아 있죠.” 내년 도쿄 올림픽에서 그녀의 도전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를 하기 직전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기록이 본래보다 좋지 않았는데, 이유는 있었다.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폐렴을 앓은 것. 2주 동안 약을 복용하고 일주일간 휴식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장시간 쉰 것은 처음이었다. “막상 경기 당일 컨디션이 괜찮아서 욕심을 냈는데 역시 아니었어요. 결과를 보니, 놓친 부분이 많았어요.” 늘 같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기 힘들기에 항상 긴장하며 정신과 육체를 컨트롤해왔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훈련이 있는 평일 오후 2~4시 사이, 여느 친구들처럼 회사에 있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회의하고 방황하던 시간도 있었다. “집이 안양이에요. 잠실에서 훈련을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 밤이 되죠. 클럽에 가서 놀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음 날 역시 컨디션에 영향을 줘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요. 제 본분에 충실하자고 판단했죠. 지금은 흔들렸을 때 삐뚤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30대가 되기 전 무엇을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에 엄마와 해외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여유가 되지 않으면 제주도라도 함께 가보고 싶단다. 제주도에서 훈련해도 체육관과 숙소에만 머물렀고, 해변을 걸어본 적조차 없다. 백수연 선수는 한 번도 바다에서 수영해본 적이 없다.

 

 

셔츠는 코스, 더블 재킷과 행커치프는 에트로, 로퍼는 커먼 프로젝트, 팬츠는 본인 소장품.

 

 

KIM WAN TAE
김완태_MBC 전 아나운서   

23년간의 모노드라마, 더 넓은 세상에서 아나운서 인생의 두 번째 무대를 꿈꾸다. 

 

1996년에 입사한 MBC는 김완태 아나운서의 인생 첫 직장이다. 첫 직장에서 23년을 보내고 지난해 12월 31일 자로 퇴사했다. 정년 퇴임까지는 아직 십수 년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프리랜서를 선언하며 회사 밖으로 나와 화려하게 활동을 하는 젊은 아나운서와는 상황이 좀 달라 보인다. 나이 50을 넘겼고, 그간 MBC에서 교양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캐스터로 활동해왔던 터. 예능 프로그램도 아닌, 제작비 적은 스포츠 중계에 경력 많은 프리랜서를 캐스팅하는 일은 드물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나운서국 부장직에서 안정적으로 보수를 받으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두 번째 도전에 응원을 보내고 싶은 이유다. “결국 직장인이거든요. 직급이 높아질수록 실무보다 조직 관리가 더 중요한 직무로 주어져요. 어느 순간 제가 하고 싶은 일에서 멀어져서 초심을 떠올리며 퇴사를 결심했죠.” 


김완태 아나운서는 입사 3년 차쯤 스포츠 뉴스를 맡았다. 스포츠에 문외한이었지만 이왕 맡은 분야를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가 스포츠 중계까지 맡게 되었다. 사실 스포츠 분야는 신인 아나운서가 진행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중계가 시작되면 담당 PD도 캐스터의 말을 막지 못한다. 오랜 경력의 아나운서가 기량을 쏟으며 진행해야 하는 파트다. 게다가 중저음 음역대의 스포츠 캐스터가 환영받는 시절에 등장한 그의 목소리는 독특한 편이다. 진행 초반에는 ‘아나운서 쪼가 있다’, ‘네 목소리는 스포츠 캐스터 스타일이 아니다’ 등 주변 선배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스포츠에 대한 지식을 숙지하는 일도 어려웠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서점에 가도 관련 서적이 드물 때라 어렵게 자료를 찾아 공부했다. 그런 노력을 기초로 딱딱한 중계에서 벗어나 친숙하고 재미있게 진행하면서 그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기가 높은 축구나 야구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올림픽 종목을 중계하며 더 큰 즐거움을 느꼈다. 최근 널리 알려진 컬링 중계의 경우, 1998년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초반에는 거의 개척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태권도, 레슬링, 유도와 같은 격투기, 드론 레이싱, F1, 심지어 세계 줄타기 선수권 대회를 중계하기도 했다. “아나운서에게 스포츠 중계는 일종의 모노드라마예요. 시청자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경기를 관람하죠. 무대에서 독백으로 극을 끌어가는 느낌을 받아요.” 아나운서들이 라디오와 스포츠 중계를 좋아하는 이유도 자신의 역량을 제일 많이 보여줄 수 있어서라고. “후배들에게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여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직업이다, 그거면 최고가 아니냐’는 말을 하곤 했어요.” 이것이 23년간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느낀 최고의 성취감이 아닐까 싶다. 소치 동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딴 후 마지막 갈라쇼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그의 목소리가 방송을 탔다. 그녀가 중학교 때 출전한 피겨 스케이팅의 중계를 맡으며 인터뷰한 경험이 있었으니, 유수처럼 흐른 세월과 선수의 마지막 경기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을 것이다. 


퇴사하고 한동안 지속되는 자유로움이 무척 기뻤다. 일요일 저녁이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월요병도 없거니와 이렇다 할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슬슬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홍보로 일하던 친구가 저를 찾아왔어요. 스포츠 커뮤니케이션 스타트업을 시작해보겠다며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죠. 제약이 많았던 지상파를 벗어났으니 좀 더 자유로운 소통 방식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 그는 세븐 헌드레드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올리브색 셔츠는 클럽 모나코, 롤업 데님 팬츠는 아페쎄.

 

 

KWON GYEONG SEOK
권경석_주식회사 산돌 디자인 자문 이사
우연과 용기가 만나 시작된 폰트 디자이너로서의 삶. 어느덧 23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필연은 우연과 용기의 합작품이다. 권경석 이사가 산돌에 입사한 것은 필연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광고 디자인 혹은 그래픽 디자인 관련 진로를 꿈꾸던 그에게 한 폰트 회사에서 인턴십을 할 기회가 생겼다. 우연이었다. 2~3개월의 인턴십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광고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막상 광고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니 재미없었어요. 주체적인 디자인을 한다기보단 클라이언트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야 했거든요.” 입사한 지 3개월, 과감히 그만두었다. 불현듯 폰트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한 경험이 떠올랐다. 디자이너로서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휘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곧바로 입사하고 싶은 폰트 디자인 회사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20여 곳의 회사 중 산돌이 첫 번째 회사였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회사는 인원 충원을 마친 후였다. 아르바이트라도 좋다면 이력서를 가져와보라는 말에 회사를 찾았다. 작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는데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포기하려던 찰나, 그래도 떨어진 이유가 궁금했다. 용기를 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뽑고 싶었지만 이력서를 잃어버려 연락하지 못했는데 때마침 잘 전화했단다. 23년 전, 권경석 이사가 만들어낸 필연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터주었다. “당시 국내 폰트 디자인 업계는 태동기였어요. 이제 막 디지털 폰트가 도입되던 때였죠. 앞으로 개척해야 할 디자인 시장이었던 만큼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었어요.”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존중되는 폰트 디자인 업계에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23년간 일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산돌Neo 시리즈부터 현대카드, 삼성, LG 등 국내 유수 기업의 한글 서체, 네이버 나눔고딕체, 애플 디바이스의 한글 서체 등을 개발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린 시간이었다. 수많은 서체를 개발하는 동안 매 순간이 소중했지만 그에게 최고의 순간은 2008년 나눔고딕체를 개발하던 때였다. “나눔고딕체는 제가 폰트 디자이너로 일하며 깨달은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서체예요. 한글만의 미감, 과학적 원리, 필순 등 모든 것을 고려해서 제작했어요.” 그의 노력은 폰트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중에게도 통했다. 논리적으로 말하지 못할지언정 나눔고딕체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 친절함,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들 평했다. 그러나 원래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 나눔고딕체의 성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나눔고딕체 프로젝트 착수 직전 삼성의 기업 서체를 개발했어요. 그때 한글만의 아름다움, 과학적 원리 등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연구했어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죠.” 삼성의 기업 서체 개발은 3차에 걸쳐 이뤄졌다. 근 10년이 걸렸다. 기나긴 이 시간은 한글만의 고유성을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권경석 이사는 산돌의 수석 디자이너를 거쳐 현재는 디자인 컨설턴트를 맡고 있다. 산돌에서 8월에 출시된 고딕Neo Extended 서체를 비롯해 주로 새로운 서체 개발의 자문을 맡거나 강연에 나가는 등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폰트 디자이너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아직 존재한다. “처음 입사할 때 창립자이신 석금호 의장님께 10년 안에 반드시 본문 서체를 선보일 것이라 약속했어요. 정말로 10년 안에 산돌의 대표 본문 서체 중 하나인 Neo 시리즈를 만들어냈죠. 많은 것을 이뤘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돌아보니 아직 아쉬운 게 있더라고요. 기존의 서체를 답습한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서체를 언젠가 꼭 만들고 싶어요.” 


권경석 이사가 탄생시킨 Neo 시리즈는 그 자체로도 성공적이었으며 많은 서체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고딕Neo, 명조Neo 등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고딕체, 명조체를 새롭게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모든 것이 집약된 완전히 새로운 서체를 만드는 게 꿈이다. 아직 뭔가 더 하고 싶은데 혹여 후배 디자이너의 성장을 막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권경석 이사. 선량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따뜻한 걱정이지만 기우다. 오랜 시간 그가 쌓아온 노하우가 집약된, 언젠가 탄생할 새로운 서체는 되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이다.

 


칼라가 특징인 원피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어링과 네크리스, 브레이슬릿은 모두 본인 소장품.

 

 

ELI PARK
박혜경_미술품 경매사, 에이트 인스티튜트 대표

서른 살이 되던 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그리고 23년이 흘렀다.

 

“1996년은 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어요. 결혼을 했고, 홍보 마케팅 일을 그만두며 미술계에 처음 뛰어든 해였거든요.” 국내 최초의 미술품 경매사로 알려진 에이트 인스티튜트의 박혜경 대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 전까지는 자신이 앞으로 미술업계에 종사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기업 홍보 마케터로 일하던 시절, 현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이 회사 사보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에서 잠재성을 알아보았다. 이호재 회장은 더 이상 예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고, 미술품 역시 홍보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변화하는 미술계에 필요한 인재로 그녀를 선택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 가나아트갤러리의 아트 디렉터로 미술계에 입문했다. 전혀 다른 업계에 뛰어드는 일이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박혜경 대표는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은 그녀를 도전하게 만들었다.


1996년 전후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기였다. 문화 예술계 역시 마찬가지. 소수만이 예술을 향유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홈쇼핑을 통해 미술품을 사고파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를 박혜경 대표가 주도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미술 유통 방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1998년, 서울옥션이 설립되며 초기 멤버로 합류해 미술품 경매사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가 판매할 미술품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경매를 준비할 때 제가 판매할 작품에 대해 끝없이 공부했어요. 경매는 단 한 번,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모든 것이 결정돼요. 그래서 컨디션 조절에도 많이 신경 썼어요. 경매 예정일 1주일 전부터는 음료도 가려 마시고, 전날에는 식초를 탄 계란을 챙겨 먹곤 했어요.” 대답에서도 느껴지는 타고난 완벽주의 성격과 일에 대한 넘치는 에너지는 그녀에게 많은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국내 미술품 최고가 신기록이 나왔고, 경매에 출품된 모든 작품이 성공적으로 판매된 ‘화이트 글로브 세일’을 이루기도 했다. 그녀가 서울옥션의 대표 경매사로 일하는 동안 서울옥션은 코스닥 상장 기업으로 거듭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다. 


2010년, 오랜 시간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품 경매사로 일한 박혜경 대표는 서울옥션을 떠나 민간 최초의 문화 예술 교육 컨설팅 그룹인 ‘에이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에이트 인스티튜트는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 해설 있는 국내외 예술 기행 등 다양한 아트 콘텐츠 및 미술 투자 자문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종합 아트 컨설팅 컴퍼니다. 미술품 경매사로 일하며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하던 지난날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미술 시장의 큰 흐름을 살피며 미술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날로 높아지고 있음을 깨닫고 에이트 인스티튜트를 오픈하게 됐다. 혹자가 보기엔 박혜경 대표 커리어의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옥션의 대표 미술품 경매사로 일할 때나 에이트 인스티튜트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지금이나 목표는 똑같이 대중과 예술을 이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이어주느냐, 즉 방식만 달라졌을 뿐. 홍보 마케터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일에 관한 것이라면 단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박혜경 대표가 세운 회사답게 에이트 인스티튜트는 향후 10년간의 대략적인 커리큘럼이 완성된 상태에서 개관했다. 치밀한 준비 끝에 문을 연 덕에 에이트 인스티튜트는 미술 애호가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순항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 박혜경 대표에게 지난 23년 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물었다. “30대 시절은 스스로 생각해도 호흡 조절이 미숙했어요. 열정이 넘쳤고 근시안적으로 일하는 경향이 있었죠. 미술계에 입문하고 23년이 지난 지금은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고 조금 여유로워졌어요.”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 우리나라 예술계의 잠재성을 믿고 널리 알리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아온 지난 23년의 발자취는 박혜경 대표의 목표가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수 있다고 보증해주고 있다.

 

 

 

LEE HUN CHUNG
이헌정_아티스트

‘추상적인 지점’을 향한 23년의 여정. 앞으로도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이헌정’을 검색하면 인물 정보 직업란에 ‘도예가’라는 단어가 뜬다. 그를 대표하는 단어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다. 이헌정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1996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 활동 초기엔 도예 작품을 중심으로 설치 미술 작품을 함께 선보였다. 그러나 23년의 세월 동안 그의 예술 세계 범위는 마치 유기체처럼 증식해갔다. 양평에 있는 아틀리에이자 집인 ‘캠프 A’를 꾸리며 가구에 대한 흥미를 발견했다. 아트 퍼니처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다. 늦깎이로 다시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건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년 전엔 공예와 디자인 개념을 접목한 실용적인 도예 브랜드 ‘바다(BADA)’를 론칭하고,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겸 다이닝 공간, 그리고 게스트하우스까지 갖춘 ‘캠프 B’를 꾸렸다. 최근에는 페인팅 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이제 ‘도예가’라는 단어는 그의 행보를 담기에 너무 작은 그릇이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이헌정’이라는 작가의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헌정 작가에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은 마치 타고난 소명처럼 보였다. 


이헌정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을 여행에 자주 비유한다. 그래서 작품 활동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아틀리에의 이름 또한 캠프다. “지난 23년을 단 한 번의 여행이라 친다면, 그 여행은 ‘어떤 추상적인 지점’을 향한 크고 작은 여행의 반복이었어요.” 그가 말하는 추상적인 지점은 특정 단어로 명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예술 생애에 걸쳐 다가가고자 하는 지향점이다. 그러나 어디인지, 어떠한 곳인지는 아직 그조차 모른다. 그래서 계속해서 여행한다. 기나긴 여정, 그동안 변한 것은 작품의 장르가 확장됐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여행에 임하는 마음가짐 또한 달라졌다. “젊었을 때는 예술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작업의 순간을 즐기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어요. 앞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죠.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비정형적인 형태, 유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색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자유가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녹록한 것은 아니다. 감정의 극한까지 치닫고 작품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비로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한다. 그가 지난 23년간 꾸준히 지켜온 단 한 가지는 ‘치열함’이다. 


여행자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귀환할 장소가 없는 움직임은 방랑에 가깝다. 쉼 없이 여행을 떠나는 그에게 귀환의 장소는 결국 도예다. 전통 도예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달항아리를 일 년에 몇 개씩 꾸준히 빚어오고 있다. 새하얀 컬러, 반듯하고 둥그런 형태에 담긴 선조의 철학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대의 맥락에 어울리는 달항아리를 빚는다. 달항아리는 당대의 문화와 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헌정 작가는 올해에만 벌써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올해 하반기에는 조용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는 이헌정 작가. 아마 새로운 달항아리를 빚으며 여독을 풀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차릴 것이다.  

임한수 Stylist 노지영 Hair&Makeup 장하준

 

 

 

더네이버, 피플, 인터뷰, 23년의 힘

CREDIT

EDITOR : 한지희, 양혜연PHOTO : 임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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