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다른 언어에 담아내는 번역가 달시 파켓

영화 속 대사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다른 언어에 담아내는 번역가 달시 파켓. 영화 <기생충>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의 숨은 공로자인 그는 언어를 매개로 세계와 세계를 잇는다.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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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시 파켓이 입은 와이드한 칼라가 돋보이는 스판 소재 셔츠는 라르디니.

 

 

‘의미’는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은 ‘언어’라는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된다. 그래서 글과 말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무형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단 한 글자를 두고도 몇 날 며칠을 씨름한다. 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쓰기 위해 조사 ‘이’와 ‘은’을 두고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는 유명한 일화처럼 말이다. 단어와 문장에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질과 가치관, 더불어 모국의 역사와 문화가 총체적으로 집약돼 있다. ‘언어의 한계는 곧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하나의 단어, 그리고 문장은 그 자체로 세계이고 우주이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Parasite’가 호명된 순간 모든 한국인이 열광했다. 한국 영화사에 있어 최초이자 쾌거였다. 그 화려한 수상의 이면에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세계를 이어 새로운 우주를 창조해낸 번역가 달시 파켓이다.

 

 

기생충, Parasite 그리고 달시 파켓
‘영화 <기생충>의 번역가’, 현재 달시 파켓의 이름 앞에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다. 대중에게는 <기생충>의 수상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살인의 추억>을 비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대부분과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및 <암살>, <국제시장>, <히말라야> 등 굵직한 한국 영화들의 대사를 옮겼다. 그리고 최근엔 7월 말 개봉 예정의 영화 <사자>의 번역 작업을 마쳤다. 번역가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벅찰 것 같은 작업량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번역만이 아니다.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저예산 독립영화제인 ‘들꽃영화상’의 집행위원장 역할도 한다. 동시에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Koreanfilm.org’라는 한국 영화 소개 사이트도 운영 중이다. 때때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요즘 계절 학기 기간이라 스케줄 조정하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인터뷰 당일, 강의를 마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스튜디오에 온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러나 촬영 내내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고 표정이 정말 좋다는 칭찬에는 조금 수줍어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질문과 대답 사이로 자주 적막이 흘렀다. 질문과 약간의 공백, 뒤이어 나오는 조심스러운 대답. 내성적인 성격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추측은 다른 확신이 되었다. 질문과 대답 사이의 공백은 하나의 언어로 표현된 질문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이었고, 가장 적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 생각을 다듬는 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생충>에 나온 ‘짜파구리’라는 단어 하나를 두고 어떻게 옮길지 2시간 넘게 고민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번역을 할 때 원래의 대사가 가지고 있는 톤과 뉘앙스, 그리고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옮기려 노력해요. 원 대사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지나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 번역이라 생각하거든요.” 그의 번역이 <기생충>의 수상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사를 단순히 같은 뜻의 문장으로 옮긴 것이 아닌, 감독의 의도와 원 대사의 느낌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아낸 덕분이다. 이 과정을 거쳐 <기생충> 속 등장한 서울대는 ‘Oxford’로, 카카오톡은 ‘WhatsApp’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짜파구리는 라면과 우동을 합친 ‘Ram-dong’이라는 신조어로 재탄생했고 모두가 이를 주목했다. 그러나 영문 자막 버전의 <기생충>을 볼 때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짜파구리’란 메뉴를 어떻게 ‘Ram-don’이라 표현할 생각을 했는지도, ‘서울대’란 단어를 들은 순간 ‘Oxford’가 바로 떠올랐는지도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메타포 역할을 한 ‘수석(壽石)’이 왜 처음엔 ‘Landscape Stone’이라고 칭해지다 후반부에서는 ‘Scholar’s Rock’이라 표현됐을까였다. 


“저는 하나의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할 때 반드시 같은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석은 한국에서 꽤 오래 산 그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하물며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외국인을 이해시키기란 더 어려운 일. 영화 번역은 책처럼 각주를 붙일 수도 없기에 부가 설명을 할 수도 없다. 영화 속에서 배우가 말하는 원 대사의 길이와 발음까지 유사한 단어로 바꿔 원 대사와의 싱크로율을 높여야 하기에 수식어를 덧붙이기도 불가능했다. 그가 찾은 방법은 수석이 언급될 때마다 수석이 지닌 의미와 상응하는 각기 다른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 영화에서는 수석이 총 2번 등장한다. 만약 2번 다 ‘Landscape Stone’이라고 번역했다면, 관객이 인식한 수석의 의미는 ‘Landscape Stone’ 단 하나겠지만,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해 수석이 ‘Landscape Stone’이자 ‘Scholar’s Rock’이라 설명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섬세했다. <기생충>의 번역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온 그의 다른 작업물이 궁금해졌다.


달시 파켓이 입은 시스루 조직의 화이트 코튼 셔츠는 맨 온 더 분.

 

 

본질을 전달하는 숨겨진 중간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살인의 추억>. 1986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전반에는 당시를 살아온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와 정서가 깔려 있다. 영화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를 대체 어떻게 번역했을까 찾아보았다.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 아마 밥을 먹거나 아침에 일어나는 일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을 제대로 하고 지내냐는 의미일 것이라 짐작했다.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형사인 주인공 박두식이 용의자인 박현규를 처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된 번역이었다. 영화 비평가이자 영화제 위원장, 그리고 영화 소개 사이트의 운영자. 번역가 외에 그가 겸직하고 있는 다른 직업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영화를 좋아하고 관련된 일을 해서 얻는 이점이 있어요. 영화의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죠. 영화 속 입체적 인물의 캐릭터를 머릿속에 그려내기도 한결 쉽고요. 이는 번역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쳐요.” 영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아시아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원생 시절, 친구들의 추천으로 한국 영화를 접하게 됐다. 처음 본 작품은 <서편제>였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판소리’는 아직 한국 문화가 생소한 그에게 너무 낯선 음악 장르였다. 등장인물의 행동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를 계속해서 보게 된 건 1997년 대학교 영어 강사 자리를 제안받고 한국에 오면서부터다. 처음에는 2년 정도 머물 심산이었지만 한국의 편안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한국어 공부 겸 취미로 한국 영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나며 한국 영화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 번역 일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당시 재직 중인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영화진흥위원회가 있었고 영화진흥회로부터 홍보물 감수 일을 의뢰받았다. 이를 계기로 자막 감수 요청도 들어왔다. 자막 감수를 꾸준히 하다보니 영화 <살인의 추억>의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살인의 추억>을 번역할 당시는 한국어가 서툴러 공동 번역으로 진행했지만 2004년 영화 <국제시장> 번역을 기점으로 단독 번역으로 작업을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15년 가까이 수많은 한국 영화의 대사를 영어로 옮긴 그에게도 아직 어려운 요소는 존재한다. 예를 들면 높임 호칭과 존댓말, 혹은 영화 <아가씨>나 <암살>처럼 외국인은 이해하기 힘든 특정 시대물이나 사투리도 그에게는 어려운 존재다.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특정 말투의 문장을 사용하면, 그 말투를 지닌 사람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문장이 길고 설명적인 대사가 많은 요즘의 한국 영화 대사도 번역하기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자막을 읽어야 하는 관객들에게 긴 대사는 피로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중의적인 문장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해요.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문장은 한 번 읽고 바로 머릿속에 입력되지 못하고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하잖아요” 그는 눈앞에 놓인 난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헤쳐나가고 있다.

 


인생의 반에 가까운 시간은 모국인 미국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지금은 영화와 언어를 매개체로 두 나라의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달시 파켓. 인터뷰의 말미, 그에게 낯선 문화에 익숙해지는 법에 대해 묻자 반쯤 농담조로 대답했다. “음… 포기하는 것?(웃음)” ‘포기’를 영어로 대치하면 ‘abandonment’다. ‘포기’라고 해석되는 동시에 ‘버림’이라고도 해석되는 단어다. 그가 말한 ‘포기’는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편견과 기대를 버리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번역’할 수도 있겠다. 묵은 것을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과정에서 그는 대상을 이해하고 본질을 꿰뚫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렇게 생겨난 통찰력은 대상의 본질을 다시 ‘적확한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멈추지 않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자료제공 CJ엔터테인먼트 
Hair&Makeup 장하준 Stylist 이승은​

 
 
 
 
 
더네이버, 인터뷰, 달시 파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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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양혜연PHOTO : 임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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