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자화상의 이면

수년간 여성의 자화상 복제본을 수집해온 프랜시스 보르젤로. 그는 어느 날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정리하며 묘한 특징을 발견했다. 그렇게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이 탄생했다.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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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조금 속이 불편해진다. 그들은 나를 관찰한다. 세계의 이면을 보려는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내 뒤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영혼까지 투명한 예술가들이다. 저를 봐달라고 내민 자화상이건만, 시선의 힘에서 내가 밀린다. 그들이 나를 그려주길 기다리듯 가만히 그 앞에 선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말을 건네는 그림들. 뒤로 가면 다른 의미로 불편해진다.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척추를 드러낸 그들이, 몸에 총을 겨눈 그들이, 묶인 채 돌아선 그들이, 혹은 아무도 없이 흐트러진 침대가. 그들이 “이게 나예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들이 마치 혼자 있는 시간을 들킨 것처럼 훅, 하고 다가온다.
프랜시스 보르젤로가 여성의 자화상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어느 날 자신의 서랍을 열어보았다가, 영리하고 진지한 무수한 얼굴을 마주한다. 여자들의 자화상은 여성의 미술 역사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여자들의 자화상은 필사본에 처음 슬쩍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던 때부터 오늘날 ‘셀카’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으면서도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써왔다. 여자들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남자들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와 거의 같다. 그러나 여자들의 자화상은 빈정거림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거울’에서 연상되는 자기도취나 허세, 자기애로 치부되기도 하고, 희소가치가 있는 여성 미술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 아래 놓이기도 했다. 남자들에 비해 더더욱 촘촘하게 깔린 제약의 붉은 선을 밟지 않기 위해 여성들은 더욱더 영리해져야 했다. 기행을 일삼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진 남자들과 달리 사생활 또한 엄격하고 정숙하기를 요구하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알리고 묘사하기 위해 여자들은 더 교묘하고 영리하게 굴었다. 그러니 자화상의 변화는 고군분투의 기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자유로워지고 더더욱 과감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작고 큰 싸움이 계속 쌓여왔기 때문이다.
여성 화가가 남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을 터부시한 시절, 여자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차단한 시절,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엄금한 시절에도 그들은 그림을 그렸다. 훌륭했지만, 제약이 없었다면 더더욱 훌륭했을 그림들이었다. 1880년대 파리에 살던 화가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열망하는 것은 혼자 돌아다니는 자유, 오고 갈 자유, 튀일리 궁전, 특히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을 자유, 아름다운 상점을 둘러볼 자유, 교회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 밤에 오래된 길을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허락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 없는 그런 자유 말입니다. 나처럼 보호자를 대동하고 루브르에 가려면 마차와 여성 동반자 또는 가족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보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많이 습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자는 ‘여성 화가 잔혹사’라 요약해도 될 법한 역사의 과정을 차근차근 짚는다. 그 모든 이야기에 생기와 얼굴을 부여하는 것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그려진 자화상 180여 점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드러낸 것과 드러내지 않은 것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프고 고독한 궤적이 선연히 드러난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와 같은 형태로 공공연하게 전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전통을 이어갔고 새 길을 개척했다.
이 책의 개정 과정 자체가 역사의 발전을 반영한다. 1998년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2016년의 개정 증보판에서는 현대의 변화를 덧붙였다. 약 20년의 시간이 가져온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을 담기 위해 완결을 선언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기리라. 수미일관 인상적인 것은 자화상에 담긴 에너지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 있건 자신의 시대 안에서 온전히 활활 불타올랐다. 자부심과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에 붙어 있는 여성 화가들의 목록을 찬찬히 본다. 그들의 생생한 표정이 책 한 권에 모여 있다.
※ 이 글을 쓴 박사는 북 칼럼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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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설미현PHOTO :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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