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컴컴한 1학년 교실에 숨어서 처음 소주를 마셨다. 많이 마시지는 못했고, 한 병을 두세 명이 번갈아가며 병째 마셨다. 식도가 홧홧해져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잔 삼아 마시기도 했다. 한 병을 다 마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빈병을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리곤 시뻘건 얼굴로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보통 밤 11시나 되어야 하교를 했는데, 그날은 시간이 참 잘도 흘렀다.

태어나 처음 맛본 술은 소주가 아니라 막걸리였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현관문 앞에 서서 몰래 한 모금 마셨다. 달고 시원했다. 결국 선 채로 두 모금 더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식탁 앞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전에는 심부름 값을 주지 않으면 한밤에 절대로 슈퍼에 가지 않았는데, 그 이후부터는 알아서 다녀왔다. 온갖 술맛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의 술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손님들이 잔뜩 다녀갔다. 부모님이 손님들을 배웅하러 간 사이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정수리 언저리가 짜릿했다. 밤새 혀끝에 쌉쌀한 맛이 감돌았다. 그날 이후로 보리차만 봐도 맥주 생각이 났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툭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다. 생맥주와 소주, 어쩌다 막걸리.

20대 초반에는 값이 싼 술을 주로 마셨다. 가끔 누군가 사주는 칵테일을 마시며 감탄을 내지르기도 했다. 난데없이 공돈이 생기는 날이면 질이 좋지 않은 위스키를 마셨다. 술맛은 잔이 좌우하지, 라고 외치면서. 낮술을 즐기면서부터는 한동안 고량주를 즐겨 마셨다. 서른이 넘어서부터 와인을 마셨다. 슬슬 안주를 가리기 시작했다. 어떤 술을 마시든 취할 때까지 마셨다. 나는 취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웃음이 잦아지고, 막말도 심하고, 애교도 느는 편이다. 술을 마실수록 건강해지는 타입이랄까. 탁자 위에 고꾸라져 잠들거나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뜨는 유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사가 점잖은 편도 아니다. 특히나 요즘은 술을 마셨다 하면 만취를 해서 실수가 잦았다. 얼마 전에는 목포에 1박 2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동행한 친구들과 목포에서 우리를 맞아준 여러 명과 어울려 독하기로 유명하다는 진도 홍주를 마셨다. 말할 것도 없이 금세 취해버렸다.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도통 지난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내 베개 옆에는 시든 배추 한 포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동행한 친구가 말해주길, 술자리가 길어지고 안주가 떨어지니 내가 벌떡 일어나 근처 밭으로 달려가더라는 것이다. 안주를 구해 오겠다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배추 한 포기를 들고 와서는 배춧잎을 한 장씩 떼어 동석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했다. 빤했다. 술자리가 파할까 두려워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친구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친한 척하다가 정말로 친해졌고, 술을 마시면서 끼를 부리다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은 내게 주량이 세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 주량은 체력과 아주 무관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주량이 셀 수밖에 없다. 주량이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허용하는 술의 양이기 때문이다. 가끔 심하게 주사를 부릴 때가 있다. 생각보다 빨리 취하는 날도 더러 있다. 그런 날에는 술 마시는 속도를 천천히 줄이면 줄였지, 마시는 양까지 줄이진 않았다. 적어도 누군가를 해코지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주사가 아니라면 굳이 그것이 술을 끊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남을‘불편’하게 만드는 주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반가웠다.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내용의 고백, 달래기 어려운 눈물과 울음, 맞장구치기 거북스러운 허세와 허풍. 술자리에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인의 행동들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 술에 취하면, 누구나 솔직해지기 마련이니까. 우리 중 누구도 아주 솔직하게 살진 않으니까. 그런 자신을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도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솔직하게 살 수 없는 게 요즘이다. 미덕 앞에서도 겸손하게 굴어야 하는 시대라서 그렇다. 놀랍게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알아서 집에 가니까, 취하는 게 딱히 무섭지도 않다.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친한 척하다가 정말로 친해졌고, 술을 마시면서 끼를 부리다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 술이 깨어 돌이켜보면 지난밤에 내가 한 행동은 온통 실수투성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내가 한 실수를 통해서만 누군가에게 이해되어지는 사람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언제나 가능했다. 나는 누군가의 실수를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했다. 그렇다면 술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해 마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 어떤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자유를 넘어서면 방종이랬다. 자유 너머 방종마저 허락하는 시간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린 깨어날 테니까 취하면 취할수록 좋았다. 원샷은 권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한 시간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about 툭하면 술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작가 황현진은 시대의 오늘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소설을 쓴다.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2011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최근작으로 소설 <달의 의지>가 있다.

By Hwang Hyun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