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기
  • 페이스북
  • 인스타그램

NEIGHBOR_Lifestyle

OH ART, BE FREE!

우리는 왜 예술에 아름답기를 강요하는가?

2018.01.16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미술관 한가운데에 변기를 놓고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사람들을 유례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예술이란 자고로 아름다움을 좇아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당대 예술 사조를 조롱하고 비튼 일종의 선언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일침이었다. 더럽고 추함의 표상인 화장실 변기가 권위의 상징이자 격조 넘치는 갤러리 안에서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하는 비장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 대한민국 서울역 광장 앞에는 거대한 ‘슈즈 트리’가 설치됐다. 헌 신발 3만 켤레와 해체된 자동차 부품으로 만든 슈즈 트리는 온갖 악취를 품은 흉물의 상징으로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였다. 헌 신발을 덕지덕지 쌓은 거대한 조형물 앞에서 사람들은 “이게 무슨 예술이냐”며 사나운 입과 혀로 돌을 던졌다. 서울로7017의 오픈을 기념으로 전시된 슈즈 트리는 9일 만에 종적을 감췄다. 
한국에서 공공 미술이란 늘 비판의 대상이었다. 청계천 들머리에 설치된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 ‘스프링’이 그랬고, 프랭크 스텔라가 비행기 잔해물로 만든 포스코센터 앞 ‘아마벨’이 그랬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작가들이 합류한 프로젝트도 좀처럼 맥을 추지 못했다. 슈즈 트리를 완성한 황지해 작가 역시 세계 최고 권위의 정원 박람회인 <첼시플라워쇼>에서 2년 연속 수상한 아티스트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녀의 ‘실패작’을 두고 “시민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라는 손 안 대고 코 풀기 식 평가를 내놓기에 급급했지만, 이런 해석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시민이 예술로부터 원하는 그것, 그 근본에는 늘 ‘아름다움’에 대한 맹렬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곧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이 시대에 팽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마르셀 뒤샹의 ‘샘’을 위대한 작품으로 칭송하면서. 
따지고 보면 현대 미술은 보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흉물스럽고 추악함에 더 친숙할지 모른다. 기괴하고 불편한 성형 수술의 실제 상황을 퍼포먼스로 재현한 생 오를랑,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작품 ‘Self’를 선보인 마크 퀸, 앙상하다 못해 소멸할 듯한 몸을 조각으로 형상화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애초에 아름다워 보이기를 포기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 안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 그렇게 동시대 예술에서 미적 가치란 고정된 형태가 아닌 맥락과 관계 속에서 유연하게 변화한다. 아름다움은 결국 관계 속에 있다고 가정할 때, 예술 작품 앞에 선 관객의 눈 역시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열린 해석 속에서 그 어떤 추악한 작품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쓰레기를 소재 삼아 예술을 빚는 정크 아트 또한 현대 미술의 주요 흐름 중 하나다. 폐선박으로 건축물을 만든 건축가 신형철은 1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팝업 건축물 ‘Temple’을 설치하면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그가 수차례 고치고 덧칠한 폐선박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치 전복된 세월호처럼 도심 속에 과감히 뒤집어놓은 고철 덩어리 안으로 관객은 일말의 거부감 없이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것이 관객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끽하는 방식이었다. 그 밖에도 먼지, 재활용품, 헌 옷 등 불구가 된 것들에서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는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에 저항한다. 예술이 예술다운 예술로 남기 위해서 관객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어쩌면 예술이 예술답기를 강요하는 일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아름답지 않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만이 가지는 특권이니까 말이다.  

 

 

 

 

 

더네이버, 아트, 예술

CREDIT

EDITOR / 전희란 / PHOTO / PR / NEIGHBOR

Twitter facebook kakao Talk 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