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에는 없는 삼등 열차의 메뉴  
“이쪽 빵은 장작같이 기다라니 베어 먹으며 거리를 걸을 수 있어 더없이 즐겁습니다.” 나는 처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한 나는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다. 무한 탑승이 가능한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하룻밤을 보낼 심산이었다. 침대차도 쿠셋(접이식 침대)도 예약하지 못했으니 삼등칸에 몸을 기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스트라스부르에서 눈을 떴다. 역 바깥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어느 빵 가게 앞에 줄을 서 있었고, 나는 장작같이 기다란 바게트 하나를 들고 다시 기차에 탔다. 가난뱅이의 여행은 이렇게 통한다. 물론 하야시 후미코의 경우가 더 큰 모험이었음은 분명하다. 1931년 11월, 대공황이 세계를 덮치고 만주사변으로 동북아 정세가 살얼음 같은 때였다. 그 시절 여자 혼자 조선, 중국, 러시아, 동유럽을 기차로 통과해 파리로 갔다. 떠돌이 행상인 부모를 따라다니던 소녀가 <방랑기>라는 베스트셀러로 제법 돈을 쥐기는 했다. 그러나 먼 여행에 사치를 부릴 만큼은 아니었고 겨우 삼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식당차가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것은 딴 세상. 트렁크 네 개에는 홍차 한 통, 사과 열 개, 배 다섯 개, 소시지 세 종류 등을 챙겨 넣었다. 거기에 주전자, 포크, 숟가락, 깜깜한 밤을 이겨낼 램프도 넣어야 했다. 짐만 보면 거의 피난 열차 수준이었다. 하나 가난뱅이들의 열차 칸에는 럭셔리한 오리엔트 특급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유럽행 삼등 열차는 일본의 나룻배처럼 많은 사람이 떼 지어 줄줄이 걸터앉아 있습니다.” 승객끼리 음식을 나눠 먹는 건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화장품을 달라고 보채는 여인도 있었다. 옆 객실의 독일인이 레코드판을 틀면 여기저기 객실 문이 활짝 열렸고,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그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룻밤 스릴 넘치는 풋사랑을 엿보고, 낯선 소년과 짧은 우애를 나눴다. 가난하지만 젊은 여행과 부유하지만 늙은 여행.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쪽일까? 누구든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하야시 후미코는 가난한 여행도 야무지고 예쁘게 만들어갈 사람이다. 그러니 험난한 여정을 돌이켜보며 말하지 않나?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수첩에 꼬깃꼬깃 ‘전철표, 엽서, 야채’ 등 구매 목록과 가격을 적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파리의 어두운 골목을 기 죽지 않고 돌아다니며 샘솟는 호기심을 채울 줄 아는 여행자였다. 
이 글을 쓴 이명석은 문화 칼럼니스트이다.  

 

길에서 여자들을 만나다 
혼자 여행한다는 것, 그것도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건 꽤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전쟁이 고조된 분위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극심해진 와중에, 도쿄에서 한국을 지나 중국과 러시아를 지나 독일을 거쳐 프랑스 파리라니. 무모하기 그지없다. “어쨌든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고.” 그녀는 간당간당한 예산을 손에 쥐고 힘차게 도쿄를 출발한다. 그리고 “어느 곳에 있더라도 찬란하게 살아 있는” 여자들을 본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자. 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존재다. 사람들은 십대 후반 정도로 어리게 보고 보살펴주기도 하지만, 뭔가 뜯어낼 것이 없나 기웃거리기도 한다. 느닷없이 끌어안으며 가슴을 만지는 치한도 만나지만, 외투를 덮어주고 검은 빵을 나눠주는 무뚝뚝한 사람들과 같이 흔들리며 달려간다. 그녀는 길에서 많은 여자를 만난다. 먼저 러시아 여자들. “일본에서는 기껏해야 달구질하는 미장이 여자의 거친 일 정도에 속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여자들만으로 긴 선로를 만듭니다.” 발랄하고 건강하고 돼지처럼 울퉁불퉁한 러시아 여자들은 그녀의 마음에 쏙 든다. 물론 모든 여자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아이를 안고 온 엄마는 사사건건 물건을 달라 조르고, 포동포동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같은 객실을 쓰게 된 처음 보는 남자와 남들도 있는 데서 애욕에 빠져 일을 벌이지만 또 상큼하게 헤어진다. 파리에서는 몽파르나스 묘지 근처에서 몹시 야윈 여인을 만난다. 2프랑을 달라며 구걸하던 여자는 결국 저자의 하숙집까지 따라온다. 몸을 팔려고 해도 돌아보는 남자가 없다며 하소연하는 서른여덟의 뻔뻔한 이 여자는 사흘이나 머물다 인도인 할아버지를 만나 산뜻하게 나가버린다. 
도쿄로 돌아오는 배의 삼등실을 같이 쓰게 된 건 쉰두 살의 꽃꽂이하는 부인과 하프를 연주하는 아가씨, 그리고 하녀다. 창문이 하나 달린 찬합 같은 침상, 움막 같은 어두운 삼등실도 여자 넷이 종일 노래를 부르고 바느질 하며 시간을 한땀 한땀 기워간다. 그녀의 글 속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여자를 이야기할 때 유독 생생해진다. 마치 다른 삶을 사는 나 자신을 보듯, 그녀들은 서로를 본다. 아마 나도 그녀들을 길에서 만났다면 그랬겠지. 어느 곳에 있더라도 사는 모양새는 매한가지라고.
이 글을 쓴 박사는 북 칼럼니스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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