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가 열리는 주간이면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인파가 경기장 주변으로 몰려든다. 올해는 이든이 역시 그 인파에 합세했다. 인구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독일인 데다 아이펠 산맥 속의 작은 시골 마을인 뉘르부르크의 평상시 모습은 아주 한산하다. 당연히 경기장 주변 도로는 죄다 왕복 2차로 국도다. 그 흔한 신호등도 찾아보기 힘들다. 트랙 반경 10킬로미터 안에서 내가 찾은 신호등은 뉘르부르크링 GP 서킷 스타트라인에 매달린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결승이 시작하는 5월 마지막 토요일을 며칠 앞두고 인근 통행량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다. 

노르트슐라이페의 남쪽과 동쪽을 따라 관람객을 위한 큰 캠핑 사이트가 이어지는데, 주차장에 진입하려는 차량으로 인해 가끔 정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 정체가 풀리는 과정이 흥미롭다. 왕복 2차로, 신호등이 없는 주차장 입구 앞 도로. 중앙선을 넘어 주차장으로 좌회전하기 위해 잠시 정차한 차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비보호 좌회전이므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직진 차량에게 통행 우선권이 있다. 다가오는 운전자 역시 좌회전 방향지시등을 켜고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대로 속도를 유지하며 신속히 그 자리를 지나간다. 빨리 지나가줘야 당신이 좌회전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 다른 차량들이 하나둘 멈춰 서며 꼬리가 늘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통행 우선권이 있음에도 십중팔구 맞은편 차량이 속도를 줄여주며 좌회전을 할 수 있게 배려해준다. 상대 운전자는 마주 선 차의 좌회전 의도는 물론, 그 뒤에서 그 차가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차량 행렬까지 자신의 멈춤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물론 몇 초, 몇 분이 지나더라도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차량이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주는 모습도 우리에겐 낯설다. 

또 다른 정체의 주범은 트랙 주변에서 저속 주행하는 농업용 트랙터나 트럭들 뒤쪽으로 행렬이 몰리는 경우다. 최고속도 자체가 낮거나 짐을 많이 적재한 트럭들은 갓길이 조금이라도 넓어지면 도로 우측 가장자리로 바짝 붙어 운행을 한다. 뒤따르는 차들을 먼저 보내주기 위한 조치다. 뒤따르는 행렬이 중앙선을 넘어 추월을 하던 중 맞은편에서 교행하는 차가 나타나면 어떨까? 맞은편 차 역시 적극적으로 왼쪽 갓길로 붙어 추월 행렬에게 공간을 비워준다. 넓지 않은 왕복 2차로가 순식간에 3차로처럼 나눠 쓰인다. 추월하는 차들은 마주 오는 차의 배려 속에서 중앙선을 반쯤 걸친 채 추월을 이어갈 수 있고 곧 정체는 풀리게 된다. 한국이라면 추월하는 차에게 경적과 하이빔을 날리면서 정면충돌하기 전까지 길을 비켜주지 않을 확률이 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며 블랙박스 영상을 TV 프로그램에 제보했을지도 모를 일. 

뉘르부르크링 테마파크 건너편에 자리한 대형 주차장에서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사실 말이 주차장이지 그곳은 외곽에 펜스만 둘러놓은 비포장 공터로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만 주차 요금을 받는다. 주차 라인도 없고 주차장 내부를 관리하는 직원도 없지만 주차된 차들이 일사불란 대열을 갖춰 빽빽하게 빈 땅을 메워간다. 그럼에도 언제나 비워진 자리가 있다. 인도로 연결되는 외곽 펜스 중간의 보행자 전용 출입구 앞이다. 그곳에 차를 대면 가장 가깝게 경기장으로 이동할 수 있고, 주차금지 표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므로 선뜻 세워볼까 고민하게 되는 주차장 최고의 명당 위치다. 물론 주차를 제지하는 이도, 단속하는 이도 없다. 걷는 시간 5분은 단축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독일인들은 암묵적 약속이나 한 듯 그 공간을 일정 크기 이상이 되도록 비워둔다. 간이 화장실과 샤워실 앞 행인들의 통행 공간도 마찬가지. 다른 섹션의 여러 주차장에 가봐도 한 번의 예외조차 없었다. 

위의 사례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교통 공간을 점유가 아닌 공유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내 앞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대신 남에게 비켜주고 나눠 쓰는 공간만이 있었다. 부모들이 도로를 공유하는 습관을 보며 자랄 수 있는 독일 아이들이 부러웠다. 우리도 그만큼 멋진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신나게 레이스카를 구경하고 베이비 시트에 올라탄 이든이는 조용히 북적이는 뉘르부르크링 주변에서 아무 방해 없이 긴 낮잠을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