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

영화 <밀정>의 클라이맥스는 이정출(송강호 분)이 일본 고위층과 친일파들의 연회장에 폭탄을 터트리는 장면일 것이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로 영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던 이정출은 이 장면에서야 비로소 정체성을 확실히 보인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영화에 대해 “일본 경찰과 의열단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는 기차신이 20분 넘게 지속되지만 모든 장면이 긴장감 넘친다.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펼쳐지는 폭탄 시퀀스도 그 못지않게 팽팽하다”고 평했다. 라벨의 대표곡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볼레로는 느린 템포의 라틴 음악을 총칭하는 음악 용어다. 이와 관련해 볼레로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유래한 ¾박자의 무용이나 무곡이라는 것이다. 플라멩코의 고장 스페인에서는 남녀 무용수가 캐스터네츠를 잡고 추는 춤과 음악을 볼레로라 불렀다. 이것이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유행하면서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 볼레로의 또 하나의 기원은 19세기 말 쿠바 카리브해에서 추던 ²/₄박자의 민속 춤이나 무곡에서 찾을 수 있다. 스페인과 쿠바의 볼레로, 둘 사이에 음악적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둘 다 무곡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이처럼 볼레로는 무용을 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쓰리 볼레로>의 세 안무가가 볼레로를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 아니었을까. 김용걸, 김설진, 김보람. 세 사람의 이력도 주목할 만하다. 김용걸은 프랑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출신의 발레리노이며, 김설진은 벨기에 피핑톰무용단 출신의 현대무용가다. 그런가 하면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대표인 김보람은 스트리트 댄서 출신이다. 각자는 자신의 강점을 무기로, 서로 다른 볼레로를 만들었다. 먼저 최연장자인 김용걸의 ‘볼레로’는 군무가 특징이다. 작품은 지난해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단에 의해 초연했던 것을 기초로 했다. 초연 당시 참여한 무용수는 41명으로, 미약하게 시작해 창대하게 끝나는 라벨의 음악처럼 작품은 한 명으로 시작해 41명의 군무로 마무리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를 비롯한 무용수 37명과 수원시립교향악단 85명이 함께한다. 일치된 움직임으로 군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에너지를 기대해도 좋겠다.
2014년 <댄싱9>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김설진의 작품명은 ‘볼레로 만들기’다. 라벨이 주제의 반복을 통해 볼레로를 완성했듯, 무용수의 움직임을 더해 완결된 작품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의도다. 앞서 김용걸의 작품이 일치된 동작을 통한 군무를 특징으로 한다면, 김설진은 반대로 전혀 다른 동작을 하는 여섯 무용수의 움직임으로 조화를 꾀한다. ‘볼레로 만들기’의 또 다른 특징은 악기가 아닌 다른 음향적 요소의 추가다. 일상적인 소리, 어쩌면 소음이 음악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흥미롭겠다. 마지막으로 김보람은 ‘철저하게 처절하게’를 준비 중이다. 사실 김보람은 볼레로와 인연이 깊다. 그는 2008년 CJ영페스티벌에서 볼레로 리듬에 맞춘 ‘에브리바디 시즌Ⅲ 볼레로’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무용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음의 높낮이, 길이, 음과 음 사이의 관계 등 라벨의 볼레로를 그대로 표현하며 주목을 끌었다. 이번 작품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이해 가능하다. 전작처럼 그는 볼레로 특유의 선율과 리듬을 해체하고 재조립할 예정이다. 물론, 그의 전매특허인 유머러스함이 어디 가겠나. 볼레로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쓰리 볼레로>는 6월 2일부터 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볼레로, 볼래요?

<볼레로 만들기>

이 글을 쓴 김일송은 공연 칼럼니스트이다.

더네이버, 국립현대무용단, 볼레로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