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양혜규 작가가 <의사 擬似-이교적 모던>이라는 모토 아래 대립되는 두 개념 사이의 충돌을 표현한 모티프를 제시해 꾸민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Haegue Yang X Galeries Lafayette Quasi-Pagan Modern Coutesy of Galeries Lafayette, 2016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본격적인 쇼핑의 계절, 연말이 성큼 다가왔음을 가장 먼저 느끼게 해주는 공간은 상업 시설이다. 대표적으로 백화점이나 브랜드의 상징적인 스토어에서 선보이는 윈도 디스플레이가 그렇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로 이어지는 하반기, 이제 지갑을 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은 것. 영화 <34번가의 기적>이나 ‘White Christmas’ 같은 캐럴송처럼 홀리데이 시즌을 여는 백화점의 윈도 디스플레이는 이 계절의 하나의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오래된 전통이지만 조금도 진부하지 않다. 12월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 주위를 기웃거리는 일은 없는가?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바꾸는 백화점은 가장 앞서 행인들에게 이 계절의 설렘을 전한다.

상업 공간이 장식에 가장 치중하는 때 역시 하반기이다. 홀리데이 시즌에 펼쳐지는 데커레이션만 봐도 그 백화점, 브랜드의 수준을 알 수 있을 정도니까. 고객 유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다. 까닭에 이맘때가 되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공간에 새옷을 입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데,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두드러진 변화는 상업 공간과 ‘예술’과의 만남이다. 백화점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공간을 보다 남다르게 꾸미기 위한 전략으로 예술에 손을 내민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와의 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참신한 신진 작가들을 찾는다. 현대미술 작가나 젊은 아티스트를 소개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예술가로부터 창조적인 에너지를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 백화점이나 유명 브랜드에서 아트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재료와 대상이 된 것. 예술가 또한 새로운 영역 확장과 동시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장의 하나로 상업 시설을 이용한다. 이를 두고 ‘윈윈’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제 상업 시설과 예술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건 시대 착오적인 일이다. 갤러리보다 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세계적인 백화점 쇼윈도에서 만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반대로 패션이 갤러리의 전시 대상이 된 것도 최근 눈에 띈 트렌드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흐름에 한국 작가가 조명받고 있다는 점. 얼마 전 프랑스 라파예트와 협업한 양혜규 작가가 대표적이다.

1, 3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이 건축가 집단 로열 인스티튜드 오브 브리티시 아키텍트와 협업한 윈도 프로젝트. 2 구찌 크루즈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프를 바탕으로 꾸민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스토어. 4, 5 셀프리지의 2016 홀리데이 장식. 6 봉마르셰의 크리스마스 윈도. 7, 8 프렝탕에서 선보인 쿠사마 아요이와 루이 비통의 협업 디스플레이, 2012.

2016년 특별 초대 작가로 선정된 현대미술 작가 양혜규는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의 라파예트 백화점을 도화지 삼아 창조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400여 개의 쇼윈도, 백화점 중앙, 하물며 쇼핑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을 입었다. 파리에 라파예트가 있다면, 런던에는 셀프리지 백화점이 있다. 언제나 한발 앞선 스타일과 실험 정신으로 영감을 주는 셀프리지는 기발한 콘셉트와 기획력으로 늘 주목받는데, 최근 셰익스페어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을 기념해 각 브랜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매치해 완성한 데커레이션은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 셀프리지의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이야 말해 뭐하겠나. 올해도 가장 먼저 쇼윈도를 장식한 셀프리지 백화점의 키워드는 행위 예술. 살아 있는 산타클로스가 여러 브랜드의 쇼윈도 속을 누비며 마네킹 옆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모습은 행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팀 버튼의 영화가 현실이 된 듯한 무한한 상상력을 쇼윈도에 부려놓은 파리 봉마르셰의 쇼윈도는 과연 이곳이 백화점인가, 테마파크인가 헷갈리게 할 정도. 럭셔리 브랜드의 스토어 윈도 역시 눈여겨볼 만한 곳이 많다.

특히 2017 크루즈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은 구찌 밀라노 스토어의 윈도는 ‘영국’ 그 자체의 세계를 구축했다. 전통적인 영국 건축 양식인 붙박이장 디자인의 나무로 된 아치에 그파피티 프린트로 벽면을 장식한 모습은 어릴 적 현실이 되길 바랐던 바비의 집과 꼭 닮았다. 이제, 당신이 상업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건 단지 제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쇼윈도에 담긴 하나의 예술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제품은 때로 극을 위한 소품이 된다. 자 이제, 책을 덮고 백화점으로 달려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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