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밤을 지새웠더니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꿀 같은 잠과 마음의 여유였지만 그럴 틈은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채로 촬영 소품을 구하러 파주로 향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E 220 d의 키를 집어 들고서.

시곗바늘은 오르고 올라 저녁 8시를 넘어섰지만 도로는 여전히 6시 반과 7시 사이 어디쯤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차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짜증이 밀려들었다. 신형 E 220 d는 앞차와 간격을 조절하며 달리는 데다 스스로 운전대를 돌리며 차선을 맞춰 달리는 ‘드라이브 파일럿(Drive Pilot)’ 기능이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신나게 운전을 즐겼겠지만 그날만큼은 그저 보조만 하고 싶었다. 크루즈 컨트롤을 켰다. 

실제 도로 흐름은 시속 20~30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크루즈 컨트롤은 시속 130킬로미터로 맞췄다. 어차피 앞차 움직임에 따라 달릴 테니 별다른 생각 없이 여유롭게 설정했다. 앞차를 따라가는 E 220 d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시시각각 다른 앞차의 속도에 그때그때 반응하며 급하게 쫓아가지 않았다. 여유롭게 제어하며 급한 조작을 피했다. 때문에 이따금 다른 차들이 앞으로 끼어들긴 했지만 앞차로 인해 느껴지는 불안감은 조금도 없었다.

조향은 달랐다. 직진 상황에선 ‘스티어링 파일럿(Steering Pilot)’이 차를 차선 가운데로 잘 유지해 달렸지만 코너에서는 양쪽 어디든 차선에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조향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패턴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E 220 d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고 그렇게 믿음이 조금씩 쌓여갔다. 기계에게 이런식의 믿음이 싹튼 건 기억이 닿는 한에서 처음이었다.

서강대교 부근에서 잠시 정체가 풀렸고 이내 약간은 깊어 보이는 굴곡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영문 S자처럼 이중으로 굽이져 있었다. E 220 d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차만 뒤쫓으며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여차하면 운전대를 잡으려 바짝 긴장한 채로 차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차는 내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신나서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휙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나도 외쳤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E 220 d는 정말 멋대로 잘 달렸다. 제2 자유로로 갈아탈 때는 앞차를 쫓아 스스로 램프를 돌아나갔다. 제2 자유로를 빠져나온 뒤에는 교차로에서 우회전도 했다. 앞차를 따라 꽤나 유연하게 잘 빠져나갔다. 정말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이렇게 차가 멋대로 달리는데도 마음이 차분했다. 멋대로란 단어가 막무가내나 천방지축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E 220 d는 오히려 차분했다. 감정이 있는 나는 상황에 따라 거칠게, 혹은 불안하게 운전하지만 E 220 d는 그렇지 않았다. 휘둘릴 감정이란 게 없으니 언제나 도로의 흐름에만 집중했고 잘 달리는 것에만 전념했다. 왠지 기계에 진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앞좌석 시트는 장거리 운전에도 피로하지 않았고 커브에서는 몸도 잘 지지해줬다. 

그래도 코너링은 확실히 내가 나았다. 차선과 앞차의 궤적만 주시하며 달리는 E 220 d는 커브의 각도와 속도에 따라 스스로 제동하는 것까진 했지만 아웃 인 아웃이나 슬로 인 패스트 아웃 같은 매우 기본적인 코너링 이론조차 실행하지 못했다. 참, 기계보다 낫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지. 아무튼 E 220 d를 크루즈 컨트롤로 운전하며 내가 직접 브레이크를 밟은 건단 한 번뿐이었다. 앞차 없이 혼자 달리던 중 전방에 붉은 신호로 멈춰 선 차들이 나타났는데E 220 d의 인식이 늦어 정지하지 못할 것 같은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급하게 제동했다. 그런데 E 220 d도 나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위험을 감지한 것 같았다. 브레이크 페달이 내가 밟은 것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내가 제동을 걸지 않았어도 E 220 d가 급제동일지언정 스스로 멈췄을까? 그건 모르겠다. 무조건 서야겠다고 긴장하며 브레이크를 밟은 탓에 계기반을 계속 쳐다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브레이크를 밟기 직전까지는 앞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하! 그런데 계기반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하나 발견했다. 내가 탄 E 220 d는 분명 아방가르드 모델인데 계기반 그래픽에는 삼각별이 보닛 끝에 불쑥 올라온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나타났다. 고백하자면 그 밖에 다른 흠을 찾지 못했다. 비슷한 디자인을 공유하는 C 클래스보다 길이가 늘어나며 옆에서 보는 비례감이 훨씬 향상됐고, 고급스러움이 오감으로 전해지는 실내 등 시각과 촉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별거 아니지만, 그리고 벤츠는 전부터 그랬지만 룸미러 아래쪽에서 켜지는 앞좌석 독서등도 정말 좋았다. 광원이 눈에 직접 드러나지 않아 눈부심이 없고 은은한 분위기가 연출돼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시트는 장거리 운전에도 피로감이 적었다. 전 세대 E 클래스에서도 마음에 들던 부분인데 디자인만 바뀌었을 뿐 만족도는 여전하다. 운전대의 리모트 컨트롤 버튼은 마치 터치스크린처럼 손가락으로 미는 동작을 인식해 반응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익숙해지니 편리했다.

엔진은 종전에 170마력, 40.8kg·m를 발휘하던 2.2리터 디젤 엔진에서 194마력,40.8kg·m를 내뿜는 2.0리터 신형 디젤 엔진으로 바뀌었다. 메르세데스 벤츠에 따르면 종전 2.2리터 디젤 엔진에 비해 무게는 17퍼센트 줄고 효율은 13퍼센트 개선됐다고 한다. 인증 연비는 복합 기준 리터당 15.1킬로미터였다. 내가 테스트를 위해 E 클래스를 이런저런 극한 상황에 내몰며 달린 90킬로미터 구간에서는 리터당 12킬로미터 정도를 나타냈고, 사무실에서 파주를 왕복하며 E 220 d가 운전한 110킬로미터 구간에서는 리터당 18킬로미터를 웃돌았다.

메르세데스 벤츠 E 220 d 아방가르드 모델은 6650만원이다. 여기에 옵션으로 제공되는 ‘드라이빙 어시스턴스 패키지 플러스’를 기본 적용한 인텔리전트 드라이브 모델은 6900만원이다. 곳곳에 매력이 넘치는데 경쟁 모델과 비교하면 가격도 괜찮다. 탐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