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는 늘 ‘제2의 백남준’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미디어 아티스트 육근병. 1992년 백남준에 이어 한국 작가로는 두 번째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카셀도큐멘타에 초대되며 세계 미술 시장에 반향을 일으킨 그가 아닌가. 백남준 그리고 한국의 미디어 아트를 논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취미로 음악을 했어요. 4인조 밴드인데, 이름은 옥시즌(웃음). 저 장비들은 그때 쓰던 것들인데 20년이 훌쩍 넘었네요.” 문득 처음의 시작은 음악이었던 백남준의 모습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는 육근병.

1 ‘Eye’ 연작에 등장하는 고인돌 거푸집이 그의 양평 작업실 앞에 장승처럼 서 있다 2 Kassel Documenta 9, 1992 3 설치 후 철거되는 미디어 아트의 운명을 보듯, ‘Survival is History’의 철 구조물이 그의 작업실 앞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4 Cotthem WINSTIL, 2003, Barcelona, Spain

“고인돌은 우리나라 역사에만 있어요. ‘무덤=문명’이죠.” 그러고 보니 무덤 같은 거푸집이 그의 작업실 앞에 마치 장승처럼 서 있었다. 죽은 자들이 집합하는 장소인 공동묘지(고인돌). 그는 이곳에서 무서움 대신 기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개개인의 역사를 담은 장소 같기도, 육신은 사라졌지만 영적 심성이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세계의 ‘눈’ 같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인 ‘Eye’ 시리즈엔 무덤 같은 흙더미 위에 눈을 비추는 비디오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다. “자, 보세요. 무덤의 모양과 어머니의 젖가슴, 묘하게 닮았죠?”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렇듯 생명의 젖줄인 구멍을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역사화되고 성장해왔다. 그의 구멍(눈)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눈이자 역사의 눈이다. “우리가 몰랐던 보이지 않는 역사가 ‘Eye’ 속에 숨어 있어요. 특히 문화 필드에 있는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관점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어요.” 그는 자신의 아이덴티티, 그것이 곧 역사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국제 무대에서 우리 미술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우리의 역사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 작가들은 자기 역사든 인류 역사든 관점이 명확하고 그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데, 우리나라는 훌륭한 인재는 많으나 역사에 너무 취약하다는 게 그의 주장. 그는 한동안 삼국, 후백제, 고려 등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어 열띤 강연을 펼쳤다. “일본은 질서 정연하지만 질펀한 휴먼 냄새가 없어. 그런데 한국은 어수선해 보이지만 그 안에 질서가 있어. 비대칭적 질서 말이야. 춤사위나 엇박자도 그렇고. 이 비대칭을 외국 사람들은 절대 흉내 내지 못해.” 그는 요즘 또 다른 역사를 공부 중이다. 숲속 잡초의 역사(?)를 담은 ‘Nothing’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건 그냥 풀포기예요. 이 평범한 피사체를 날마다 가서 찍는 거죠.” 그는 매일 히말라야를 정복하듯이 같은 장소의 풀포기를 찍고 또 찍는다. 물론 위대하고 아름다운 공간도 아니다. 그의 카메라에 포착된 하찮은 풀 한 포기. 그것은 마치 거대한 생명의 야자수처럼 그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나름의 거대한 역사, 우주가 있음을 우리에게 넌지시 툭 던져놓는다. “중국의 시 중에 70페이지짜리가 있어요. 처음 시작은 ‘호숫가에 개구리가 앉아 있다’. 한데 다음 장이 뭘까 하고 열어보면 아무것도 없어. 다음 장엔 뭐가 있겠지 하고 또 넘겨보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 이렇게 끝나는 거야. ‘풍덩’. 텅 빈 공간, 그게 바로 시가 가진 카리스마야. 그게 시고, 그게 예술이야.” 빈 공간이 아닌 빈 공간. 자신의 경우엔 그것이 역사일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의 작품 제목처럼 ‘Survival is History’, 생존은 역사인 것이다. 그는 이렇듯 영상으로 시를 쓴다. 누군가는 써 내려가야 할 깊고 장대한 역사의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