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별안간 폐선박 한 척이 나타났다. 얼핏 봐도 생을 다한 것처럼 심하게 훼손되고 녹이 슨 배는 바다가 아닌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완전히 전복되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마당에 펼쳐진 진풍경이다. 마르셀 뒤샹이 전시장 안에 변기를 놓고 ‘샘’이라는 근사한 작품명을 붙였을 때 관람객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템플(Temp’L)’이라는 근사한 이름의 거대한 고철 덩어리는 신형철 건축가가 만든 도심 속 파빌리온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MoMA가 공동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6의 당선작이다. ‘임시’라는 뜻의 템퍼러리(Temporary)와 ‘사원’이라는 의미의 템플(Temple)을 결합한 ‘템플’은 실제로 폐선박을 고쳐 만든 임시 건축물. 버려진 60톤 무게의 쇳덩이가 건축가의 예술적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다. 목포에서 공수한 이 배는 더 이상 항해하지 않지만 도시인의 쉼터로서 또 다른 항해를 꿈꾸고 있다. 그 키를 잡고 있는 주인공은 건축가 신형철이다.

폐선박의 아랫부분을 템플의 지붕으로 탈바꿈시켰다.

1 커다란 고래 뱃속을 연상시키는 구조. 2 차가운 질감의 외부와 따뜻한 느낌의 내부는 얇은 철제를 경계로 나뉜다. 3 배 전면부의 곡선은 미술관 내부와 주 출입구를 향하고 있어 동선 유도가 가능하다.

건축과 예술의 경계에서
템플을 아무 배경 지식 없이 목격한 관객에게 ‘이것이 건축인가 예술인가’ 물었다고 치자.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도 건축보다는 임시 건축의 형태를 한 ‘설치예술’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템플이 진화한 새로운 건축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우리 시대 미술의 경계는 열려 있어요. 건축은 인접한 예술을 늘 품기 때문에 건축가는 그 외의 영역들까지 볼 수 있어야 하죠. 물론 건축에 튼튼한 기반을 둔다는 전제하에서요. 제가 다른 분야의 예술에 늘 관심을 가지고 설계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예술의 경계가 점점 무의미해지는 현시대에서 신형철의 건축은 확실히 한발 앞서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그의 성장 배경이 한몫한다. 회화 작가로 활동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인 동생을 둔 그는 자연스럽게 여러 예술의 긍정적인 상호 간섭 속에 살아왔다. 유년 시절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고, 다양한 건축 양식을 습득했다. 도시 곳곳에 있는 수많은 미술관과 성당은 건축과 예술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훌륭한 배움터였다.
그의 아버지인 故 신성희 작가 역시 예술을 단지 예술 안에 가두지 않는 화가였다. 평면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늘 그것을 입체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었다. 평면 뒤에 있는 것과 앞으로 튀어나온 것의 경계, 이를테면 1차원에서 3차원으로 가는 그 어딘가(신형철은 이를 ‘2.5차원’이라 표현했다)에 대한 고민이 늘 아버지의 작업에 녹아 있었다. 마치 아들이 건축가가 되고 딸이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자신의 작업실로 우리를 안내한 신형철은 15년 전 동생과 함께한 공모전 작품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은 건축물이 아닌 마네킹을 감싼 ‘옷’이었다.

“옷은 몸을 싸주는 껍질이고, 건축은 사람이 활동하는 공간을 싸주는 껍질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패션과 건축은 무관한 분야가 아니에요. 이 작품은 인체의 복합적인 형태를 연구하기 위해 평면으로 된 천을 오려서 벽돌을 쌓듯이 쌓아본 거예요.”

포르투갈에서 열린 ‘패션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공모전에 동생과 함께 출전해 수상한 것을 계기로 그는 5년 동안 건축가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로 살았다(물론 전공은 건축이다). 그런 중에도 그는 한 번도 건축과 동떨어져 지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설계 도면이 3차원의 건축으로 진화하고, 디자인 스케치가 하나의 패션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결국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건축가로 다시 돌아온 신형철의 건축에서 조형미와 구조적 아름다움이 함께 보이는 건 그 까닭일 것이다. 폐선박 내부를 아름다운 곡선 구조의 쉼터로 승화시킨 것도, 전작인 생명의 빛 교회 안에 나무를 수직으로 세워 전체적으로 곡선 구조를 완성한 것도 인체의 선을 깊이 연구하고 고민한 데서 얻은 결과일 테다.

1 생명의 빛 예배당에 대해 설명하는 신형철. 2 공모를 위해 가상의 선박 형태로 스터디를 했던 모형. 3 회화 작가인 아버지 신성희의 설치 작품.

생명을 불어넣는 건축
‘건축가의 일은 본래 도면을 그리고 그 도면대로 시공을 하는 것’이라는 신형철의 말에 따르면 템플은 건축의 영역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레디메이드 방식의 재활용 작업이 최근 건축계에서 뜨거운 화두라는 것이다. 이는 환경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 문제는 특히 건축가들에게 더욱 가까이 직면해 있고, 최근의 논의가 있기 아주 오래전부터 건축은 환경과 궤를 같이했다.

“그리스어 ‘Oikos’는 ‘주거’를 뜻하는 단어이자 환경(Ecology)과 경제(Economy)의 어미 ‘Eco’의 어원이에요. 이는 건축이 환경이나 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이죠. 실제로 오늘날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제품이나 건축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요.”

신형철은 버려진 폐선박을 통해 거대한 크기, 단면이 보여주는 절단의 힘과 열림, 그리고 재활용이 되는 부분까지 보여줌으로써 시대의 가치에 부응하는 아름다움에 관해 숙고했다. 녹이 슬고 상처투성이인 표면에는 드문드문 구멍을 뚫어 숨통이 트이게 했고, 음울하리라 예상했던 배의 내부는 하얀 페인트를 여러 번 덧발라 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거기다 곳곳에 대왕참나무와 마과나무를 심어 시원한 그늘과 숲을 만들었다. 그 결과 템플 앞에 선 관람객들은 일말의 거부감 없이 이 기묘한 설치물 안에 불쑥 들어가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한다. 버려진 배에 새로운 쓸모가 창조되면서 다른 의미의 재생과 환생이 실현된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재활용 작업에 임한 신형철은 사실은 예전부터 주어진 조건 안에서의 건축, 그리고 재생에 관심이 높았다. 2014년에 완공한 생명의 빛 예배당이 대표적인 예다.

“건축주가 누군가로부터 기증받은 홍송을 사용해 예배당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홍송은 숭례문 건축에 사용됐을 정도로 귀한 자재인데, 이 원목들을 어떻게 교회 건축으로 풀어낼 것인지 고민이 많았죠. 그러다가 베어져 죽은 나무는 늘 수평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어요. 비록 이미 생명을 다한 나무지만 수직으로 세워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곧게 선 나무들로 빼곡한 예배당 앞에서 부활한 예수를 떠올리든, 그저 아름다운 숲을 떠올리든 그것은 보는 이의 자유다. 뒤집어진 배 모양의 템플을 보면서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든, 그저 압도적인 무게감에 경도되든 그 역시 보는 이의 자유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운 쓸모와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건축가의 신실함 그 자체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덩어리 속에서 잠자는 다윗이나 모세를 발견했듯 이번 템플 작업을 통해 버려진 선박과 대화를 하며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답고 웅장한 공간을 발견해 빛 속으로 끄집어냈습니다.”

건축가 신형철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목도한 아름다움은 해체와 변형을 통해 미술관에 온전히 옮겨졌다. 지금 당신 주변을 한번 살펴보라. 쓸모 없어서 버려진 무언가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당신 눈앞에 현현할지도 모르니. 물론 발견하는 건축가의 눈과 귀, 손을 통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