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가 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롤스로이스가 출현했다. 바로 롤스로이스 블랙 배지(Black Badge)다.

솔직히 난 롤스로이스를 느낄 만한 지위나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공부를 통해 머리로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기 어렵단 뜻이다. 그것은 최상류층의 문화다. 경험해보지 못한 걸 이해하기는 어렵다. 설령 내가 갑자기 갑부가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저 돈이 많은 것과 상류 문화를 체득해온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를 시승할 기회가 오면 브랜드의 가치나 문화적인 요소를 이해하기보다 차량의 만듦새와 분위기 등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블랙 배지는 달랐다. 차의 느낌도 달랐지만, 보다 솔직하게 소통하려는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본사의 심사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구입할 수 없었다는 롤스로이스다. 하지만 요즘의 롤스로이스는 그 시절처럼 콧대가 높지는 않다. 물론 여전히 1년에 4000대 남짓한 생산량 제한으로 문턱 높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과 고객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에 따르지 못하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럭셔리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다. 사실 롤스로이스만 해도 몇 번의 아픈 기억이 있지 않은가.

블랙 배지는 새로운 모델이 아니다. 롤스로이스가 자신의 외연을 넓히는 그 극단으로 선택한 독특한 존재다. 팬텀 시리즈로 시작한 새로운 롤스로이스의 역사는 고스트를 거쳐 레이스와 던에 이르기까지 보다 역동적이고 격식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확장돼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역동성과 자유로움이 고스트와 레이스에서 응축되어 블랙 배지로 탄생하게 됐다.

시승회는 블랙 배지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됐다. 이 시간의 대부분은 왜 블랙 배지가 필요했으며, 왜 블랙 배지가 롤스로이스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여전한 롤스로이스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블랙 배지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롤스로이스의 이단아처럼 비춰지는 건 롤스로이스로서 무척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때문에 블랙 배지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설명하는 건 롤스로이스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럼에도 롤스로이스가 이 같은 파격적인 라인인 블랙 배지를 론칭한 까닭은 명료했다. 고객층이 달라지고 있어서다. 55세였던 평균 고객 연령은 단 5년 만에 43세까지 떨어졌다. 이 같은 통계를 받아 든 롤스로이스는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방법만으로는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미 만족도가 떨어진 고객들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 가장 강력한 롤스로이스 가장 역동적인 모델인 레이스에 블랙 배지를 달며 통합 제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조종 성능을  향상시켰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롤스로이스는 재미있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롤스로이스를 나름의 방법으로 커스터마이징한 모델들이었다. 소개된 차들의 주인 대부분은 젊은 나이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롤스로이스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차를 자신에게 맞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롤스로이스 브랜드에게 자칫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다. 롤스로이스답지 않은 차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머슬카의 분위기가 나는 차도 있었다.

젊은 고객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롤스로이스를 달라.” 바로 이것이 블랙 배지의 출발점이 됐다. 그래서 블랙 배지는 단순히 생김새만 다른 차에 머무르면 안 됐다. 성격까지 새로워져야 했다. 

젊고 부유한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차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고객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역동성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롤스로이스만의 기품은 충실히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는 두 가지 임무를 설정했다. 첫째는 롤스로이스의 헤리티지에서 변화의 역사를 찾아내 작금의 요구를 롤스로이스답게 풀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롤스로이스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롤스로이스 같지는 않은 차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롤스로이스의 헤리티지에는 변화를 추구했던 사례가 가득했다.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인 찰스 롤스도 롤스로이스의 초창기에는 레이싱 헤리티지를 주도해온 인물이었다. 사회적 통념이나 다른 사람의 이목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더욱 중요시한 사람이었단 얘기다. 또한 롤스로이스의 소중한 고객이었던 이브 생로랑이나 하워드 휴스 등도 모두 당시의 사회를 스스로 변화시킨 인물이었다. 더욱이 시승회가 열렸던 라스베이거스는 하워드 휴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블랙 배지 모델의 인테리어와 시계에는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무한대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로고는 20세기 초 세계 최고속 기록 보유자였던 맬컴 캠벨 경(Sir Malcolm Campbell)이 사용하던 것이다.

블랙 배지는 기존의 롤스로이스 모델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쿠페 레이스와 세단 고스트다. 롤스로이스 엔지니어들은 고스트의 6.6리터 V12 트윈 터보 엔진에 40마력과 6.1kg·m의 토크를 더해 최고출력 603마력, 최대토크 85.7kg·m의 괴력을 고스트 블랙 배지에 선사했다. 8단 자동변속기도 이에 걸맞은 긴박함을 유지하도록 새롭게 업그레이드됐다. 특히 가속페달을 밟는 양에 따라 변속 패턴이 다양하게 변화되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페달을 4분의 1 이하만 사용하는 크루징 상황에서는 일반 고스트처럼 매직 카펫 라이드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변속 패턴을 유지했다. 그러나 가속페달을 그 이상 밟으면 엔진 회전수를 충분히 사용하기 위해 고단 기어로 변속하는 시점이 보다 뒤로 늦춰진다. 감속 시에는 반대로 더욱 민첩하게 시프트다운이 이뤄진다. 레이스 블랙 배지는 출력이 그대로다. 이미 623마력이란 충분한 출력을 뿜어내므로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보다 역동적이고 통쾌한 가속을 위해 최대토크를 무려 7.1kg·m나 증가시켰다. 레이스의 8단 자동변속기도 업그레이드돼 운전자의 의도에 훨씬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스포티한 변속 패턴을 갖췄다. 아울러 더 커진 토크에 대응하기 위해 드라이브 샤프트를 새롭게 개발해야 했다.

그런데 롤스로이스는 출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바꿔 말해 블랙 배지의 성패는 출력보다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조종 성능이다. 블랙 배지는 에어 서스펜션을 새롭게 튜닝하고 카본 알루미늄 휠을 도로주행용 자동차에 최초로 적용하는 등 조종 성능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섀시 개발 담당 엔지니어인 피터 퀸징어에 따르면 블랙 배지의 조종 성능 향상은 어떤 부품에 의존하기보다는 통합 제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타이어까지 새롭게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타이어의 아버지라는 롤스로이스 엔지니어 로버트 랍은 “타이어를 단단하게 만들면 조종 성능은 좋아지겠지만 롤스로이스 특유의 매직 카펫 라이드는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블랙 배지를 위해 새롭게 개발한 타이어는 단단하게 만드는 대신 골격을 이루는 카커스 층에 사용된 섬유에 장력을 더해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죠”라고 했다. 내부 섬유의 장력이 강해진 타이어는 승차감은 해치지 않으면서도 조종 시에는 물컹거림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블랙 배지는 엔지니어부터가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시승은 트랙에서 이뤄졌다. 롤스로이스를 트랙에서 시승한다는 건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아무튼 고스트 블랙 배지 뒷좌석에 오른 우리는 라스베이거스 대로를 따라 새롭게 연 서킷인 ‘스피드베이거스(SPEEDVEGAS)’로 항했다. 고스트 블랙 배지를 시승하면서 블랙 배지는 여전히 롤스로이스이고, 따라서 매직 카펫 라이드는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디테일이 살아 있다 도로주행용 차에 최초로 적용된 카본 알루미늄 휠과 20세기 초 세계 최고속 기록 보유자였던 맬컴 캠벨 경의 무한대 로고. 

트랙에서는 레이스 블랙 배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맞은 관계자는 “블랙 배지로 트랙에서 경주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롤스로이스로도 트랙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워밍업 랩을 돌면서 느낀 레이스 블랙 배지는 여전히 매끄러웠다. 기어를 로 모드로 놓고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니 2.5톤이 넘는 거구가 맹렬하게 가속했다. 타이트한 스피드베이거스의 코너를 뛰쳐나가진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부드럽게 코너를 따라 들어가며 바닥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감각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차체의 롤링을 처음엔 적절하게 허용하다가 일정 수준 이상에서는 부드럽게 억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롤링을 애초부터 상당히 억제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속을 만큼 통합 제어가 정교했던 것이다. 비록 속긴 했지만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쿨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이어진 라스베이거스 근교의 산속 와인딩로드 시승은 전날 이뤄진 트랙 시승보다 더욱 즐거웠다. 황량하지만 자연 그대로인 풍광을 바라보며 다이내믹하지만 여전히 매끈한 롤스로이스의 마법 양탄자 위를 내달리는 드라이브는 다른 어떤 모델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스티어링 감각이 조금만 더 명료하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롤스로이스로도 상당한 페이스의 와인딩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블랙 배지가 선사하는 파격이니 말이다.

블랙 배지의 겉모습은 은근히 파격적이다. 색깔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당연히 밝게 빛나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어둡다는 블랙 컬러로 마무리됐다. 롤스로이스의 상징인 환희의 여신이 그렇고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그렇다. 엠블럼도 바탕이 검정이고 글씨가 밝게 빛나 마치 음영 반전을 연상케 한다. 바로 그 자체가 반전이요 틀을 깨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블랙 배지의 사상이다. 롤스로이스이되 지금까지의 어떤 롤스로이스와도 같지 않은 이미지와 개성으로 블랙 배지는 완성됐다.

이번 행사를 통해 수많은 잊지 못할 것들을 보고 겪었다. 그랜드 캐니언의 장관이 그랬고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섭씨 47도까지 올라갔던 기록적인 폭염도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롤스로이스의 진화가 다시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블랙 배지처럼 ‘삐뚤어질 테다’라는 도전 정신이 롤스로이스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는 점도 절대 잊을 수 없었고.

젊은 당신이 롤스로이스를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주저 없이 블랙 배지를 고르라 말하고 싶다. 아버지 차를 빌려온 듯한 오해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아울러 레이스를 살 계획이라면 반드시 블랙 배지를 선택해야 한다. 최고의 레이스다. 혹시 블랙 컬러가 부담스럽다면 환희의 여신을 비롯해 모든 것들을 원래 색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

기존의 롤스로이스가 정이었다면 블랙 배지는 반이다. 롤스로이스는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새로운 ‘합’의 브랜드로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