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의 상징이라는 볼보. 하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바로 아늑함이다. 세계적인 모터쇼에 참가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은 모두 자사의 제품을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볼보는 좀 달랐다. 세련된 슈트와 드레스로 치장한 다른 럭셔리 브랜드의 스태프들과는 달리 볼보의 스태프들은 편안한 베이지색 니트 차림인 때가 많아 의아했다. 그래서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답은 ‘스태프의 모습이 편안해 보여야 다른 이들도 편히 차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 그동안 볼보는 편한 세월을 보내지 못했다. 1999년에는 포드로, 2009년에는 다시 중국 지리(Geely) 자동차에 팔려간 것. ‘중국 브랜드가 되었으니 기술만 흡수당하고 볼보도 이젠 별 볼일이 없겠구나’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풍파 속에서도 볼보의 집념은 실로 대단했다. 오히려 모회사의 풍족한 지원을 바탕으로 볼보만의 색깔을 더욱 또렷하게 펼쳐간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당연히 안전이었다. 21세기의 볼보가 추구하는 안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사용자의 안전은 물론 다른 차량과 승객, 보행자와 자전거 라이더, 나아가 동물의 안전까지 챙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전에 책임감을 느끼는 브랜드로 발전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2020년까지 볼보 자동차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완벽주의 덕분에 이제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모르는 차는 가장 안전한 차로 선정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1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토르의 망치’라는 애칭이 생긴 풀 LED 헤드램프. 아이코닉하고 강인한 전면부를 완성하는 디자인 요소로, 향후 볼보의 모든 제품에는 T자형 주간등을 기본 사양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2 태블릿 PC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로형 9인치 센터콘솔 디스플레이. 버튼을 최소화하고 세련미를 극대화했다.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작동이 이루어지고, 반사 방지 코팅 처리를 하여 빛 반사를 방지했다.

두 번째는 친환경 엔진의 개발이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4-5-6기통 엔진은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연 50만 대도 채 생산하지 않는 볼보가 모든 엔진을 새롭게 개발하기엔 무리다. 설령 개발한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그리고 경쟁자들과 싸울 만한 좋은 엔진이 나올 가능성 또한 희박했다. 그래서 볼보는 엔진 하나를 아주 잘 만들고 좋은 변속기를 모든 모델에 적용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Drive-E 파워트레인이다. 똑같은 엔진 블록을 디젤과 가솔린 엔진에 함께 사용하고, 필요한 출력에 따라 터보차저 하나부터 터보 차저·슈퍼 차저·전기식 컴프레서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까지, 과급 모듈로 해결한다. 전기 하이브리드 방식도 물론이다. 그 결과 볼보는 V40부터 모든 모델이 8단 자동 변속기를 사용하는 등 단숨에 진정한 럭셔리 브랜드의 수준으로 올라섰다.

3 우아함이 돋보이는 XC90의 실내 디자인. 천연 우드 트림을 적용해 실내 공간이 규모에 비해 안락하고 따듯해 보인다.

4 핸들을 쥐었을 때의 부드러운 촉감이 매력적인 핸들. 여성 운전자가 사용하기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유연하다.

마지막으로 볼보는 자신만의 럭셔리, 즉 ‘스칸디나비안 럭셔리’를 더욱 선명하게 내세웠다. 20여 년 전에 떠난 배낭여행에서 만난 부드러운 목재와 작은 화분, 그리고 책꽂이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 스웨덴 국철의 화장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XC90을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이는 발표회장에서 나는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는 기후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죠. 그 덕분에 스웨덴은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이 발달한 것입니다.” 그랬다. 그들이 의미하는 럭셔리는 비싸고 고급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가 볼보가 추구하는 럭셔리에 가깝다. 그래서 XC90은 실로 웅장한 규모를 지녔지만, 앉는 순간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세 가지 주제를 핵심으로 차근차근 준비한 볼보는 규모는 크지 않아도 세계 자동차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소 브랜드가 되었다. 안전, 다운사이징, 그리고 올바른 럭셔리라는 세 가지 테마에 지극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볼보가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XC90이다. 고급스럽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보수적이지만 편안하다. 럭셔리 볼보의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