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농부의 조합?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달라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추산되는 도시 농부의 수는 8억 명에 이르고, 그사이 서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시 농부의 붐이 불기 시작한 3년 전의 서울에서는, 추진력 있는 힙스터가 삼삼오오 모여 옥상 위에 흙을 깔고 호미를 들었다. 얼마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씨앗을 심고 수확을 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리는 농사를 견디기에 도시인들은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그러는 한편 서울시의 적극적인 도시 농업 활성화 정책으로 도심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텃밭이 우후죽순 늘었다.
이제는 특별히 새로울 게 없는 도시 농업인데도 여전히 ‘나 이렇게 잘 산다’고 삶을 홍보하는 SNS 계정에서는 속속 초록의 풍경이 올라온다. 물질을 위해 삶의 여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명품 백이나 값비싼 자동차를 갖는 일보다 초록을 기르고 가꾸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부러움의 대상이 된 건 아닐까? 한계를 모른 채 속도를 더해가는 이 도시에서 땅의 생명체만이 묵묵히 제 속도에 맞게 자라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숙제를 풀기 위해 도시 농업은 멋 부림이나 선택의 대상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다음의 도시 농부 셋이 귀농 대신 도시 속 농부로 성장하기를 꿈꾸는 이유다.

1 훈연기로 연기를 쏘면 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2 생물 다양성을 위해 한때 80%가 폐사한 토종벌을 보호하고 있다. 3 명동 한복판을 배경으로 선 박진 대표. 4 친환경 양봉에 자주 사용되는 탑바 하이브 벌통은 어반비즈서울에서 특별히 만들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모여 있다는 표현이 걸맞은 서울의 명동. 명동에서도 가장 복잡한 거리의 고층 건물 위에는 진짜 벌 떼가 살고 있다. 어반비즈서울의 이야기다. 2013년, 도시에서 꿀벌을 키우는 소셜 벤처 기업 어반비즈서울을 창업한 이는 박진 대표다. 회사를 다니며 농학과에 편입할 정도로 농업에 관심이 컸던 그는 우연히 도시 양봉이 훌륭히 정착된 런던, 도쿄, 뉴욕의 사례를 접했다. 그 순간 가슴이 뛰었다. 서울이라고 못할 게 없으니까. “영등포구를 제외한 24개구가 산을 끼고 있는 서울은 도시 양봉을 하기에 최적의 도시예요. 벌의 활동 반경은 평균 2km인데, 어느 곳에 벌통을 두어도 꿀벌이 먹이를 찾는 게 어렵지 않죠.” 어반비즈서울은 지난 3년간 크게 성장했다. 서울시의 정책적 지원도 힘이 됐다. 서울을 포함해 전국 6개 도시에 도시 양봉장 26곳이 생겨났다.
상추나 토마토를 심는 것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농사와 달리 양봉은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의욕만으로 벌을 들일 수는 없는 일. 박진 대표가 위탁도시양봉서비스인 ‘허니뱅크’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반비즈서울에서 확보한 장소에 도시 양봉장을 개설한다는 공고를 내면 사람들은 이곳에 키울 벌에 투자하는 방식이에요. 설치와 운영은 우리 쪽에서 진행하고요. 꿀벌 체험, 꿀 수확, 꿀벌 관찰을 할 때마다 투자자를 초대해 느슨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죠. 교육도 하면서 자발적인 참여자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삭막한 도시에 수많은 꿀벌을 쏘아 올린 박진 대표가 갈 길은 아직도 험난하다. 가깝게는 허니뱅크를 통해 꿀나무 심기 행사를 벌여야 하고, 꿀벌 축제도 그가 꿈꾸는 그림 중 하나다. 서울시 면적의 1/4에 이르는 옥상이 더 푸르게 변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모든 옥상에 벌을 놓자는 말이 아니에요. 빈 옥상에 꽃과 나무를 심으면 건물의 온도가 내려가고 공기가 정화될뿐더러, 꿀벌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죠. 꿀벌이 살기 좋은 도시는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고요.” 작은 벌들이 이 도시에 불러올 작지만 큰 변화를 위해 그는 오늘도 벌통을 놓는다.

1 파절이 회원들의 손때가 묻은 농기구. 2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싱그러운 가지. 3 제법 널찍한 옥상에는 비닐하우스와 주방도 갖춰놓았다. 4 농사를 지으면서도 스타일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김나희 대표. 

“하이힐을 신고 온 여자가 신발만 갈아 신고 농사를 짓다가 다시 하이힐을 신고 나가는 것. 그것이 저희가 바라는 파절이의 모습이에요.”
파절이 대표 김나희의 이야기를 들으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니, 농사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2013년에 협동조합 형태로 처음 출범한 파절이는 젊은 예술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힙한 도시 농부를 꿈꾸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이 모여 만들었다. ‘농사’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다양한 클래스와 워크숍, 파티를 진행해온 이들은 도시 농업의 붐에 큰 역할을 했다. 어려움을 한 차례 겪은 뒤 지금은 비영리 단체로 형태를 달리했지만, ‘농사로 놀자’는 그들의 슬로건에는 변함이 없다.
“도시 농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농사가 주가 되어서는 안 돼요. 농산물을 수확해 팔기에는 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잘 갖춘 농장의 수확물과는 가치를 비교하기 힘들죠. 그래서 도시 농사는 항상 문화 콘텐츠와 함께 가야 해요. 농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파절이가 도시 농업의 붐이 한풀 꺾인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커뮤니티의 힘이다. 회원 수 100여 명, 그중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은 30명 안팎.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린피스 소속이었던 지금의 파절이 대표 김나희가 있다. 그녀는 재미를 위한 재미보다는, 도시 환경과 지속 가능한 도시 농업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재미있는 농사를 주장한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위해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여는 ‘목요밥상’을 기획한 것도 그 일환이다. 올해부터 서울시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된 목요밥상 행사는 회원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
젊은 도시 농부 모임으로 시작한 파절이는 현재 새로운 세대의 공감과 참여를 어떻게 끌어낼 것이지 고민 중이다. 농사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는 게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다. “작은 화분에 상추를 키우는 일도 농사가 될 수 있거든요. 누구나 도시 농부가 될 수 있다는 얘기죠. 의상도 마찬가지예요. 농부라고 해서 꼭 고쟁이에 밀짚모자를 써야 한다는 공식이 있나요?” 언젠가 서울에서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호미를 들고, 한쪽에서는 선베드에 누워 태닝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면 그 중심에는 파절이가 있을 것이다.

1 잡초를 뽑는 농부의 손은 아름답다. 2 난간까지 화분으로 활용한 홍대텃밭다리. 3 초록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는 박정자 대표. 4 며칠 내린 비에 토마토가 탐스럽게 열렸다.

자란다, 자란다, 잘한다. 성장과 격려의 중의적 의미를 지닌 ‘자란다’는 10년 차 농부 박정자를 주축으로 하는 도시 농부 브랜드다. 농부인 동시에 농사 멘토인 박정자는 태생 자체가 도시 여자였다. 시장에서 파는 냉이와 밭에서 나는 냉이를 구분할 줄 모름은 물론, 흙 만지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던 그녀가 돌연 텃밭으로 뛰어든 건 교육을 위해서였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텃밭을 가꾸고 먹거리 교육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주부로서 끼니를 준비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던 제가 웬일인지 선뜻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거예요. 단지 가르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는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가르칠 수 없잖아요.” 교육이라는 목적을 두고 시작했지만 정작 변화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씨앗이 잎이 되고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며 삶의 여유가 생겼고 너그러워졌다. 육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위로였다. 아이들이 잘 못 먹는 채소를 과감하게 씹어 삼키는 모습도 큰 즐거움이었다. “학교 텃밭에 매운 쌈채소를 심은 적이 있는데, 어느 날 한 아이가 한 손으로 코를 잡고 그 채소를 먹는 거예요.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더니 ‘제가 기른 거니까 맛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진정한 먹거리 교육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는 거 아닐까요?”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현재 초보 도시 농부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홍대텃밭다리와 비빌기지 내의 키친팜이 대표적이다. 그녀가 도시 농부에게 늘 강조하는 부분은 책임감이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떤지 잘 파악한 뒤에 농사를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해야 하고요. 날씨처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여야죠. 누군가를 원망해서도 안 되고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 그게 진짜 농부의 자세일 거예요.” 그녀는 촬영 중에도 수시로 잎을 쓰다듬고 흙을 어루만지며, 열매의 상태를 살폈다. 그 순간, 그녀가 말한 ‘진짜 농부’의 모습이 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