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DES-AMG GLE 63

GLE는 이전까지 M 클래스라 불리던 모델이다. 굳이 계보를 따지면 M 클래스 3세대 페이스리프트 버전에 해당한다. M 클래스는 2세대 이후 모노코크 구조로 바뀌었지만 오프로더 성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럭셔리를 지향하며 분위기를 바꾼 레인지로버와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이다.

GLE 63의 바탕이 된 3세대 M 클래스는 데뷔한 지 5년 됐다.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이루어진 페이스리프트와 더불어 안팎이 크게 달라졌지만, 갈수록 빠르게 변하는 디자인과 기술 흐름을 따라잡기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시승에 함께 나온 볼보 XC90와 비교하면 구세대 차라는 느낌이 확연하다. 꾸준히 고급스러워지고는 있지만 내장재에는 여전히 미국적 투박함이 남아 있다. 실내를 휘감은 가죽과 검은색 유광 우드그레인이 실내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하지만, 대시보드 가운데 어색하게 올라앉은 독립식 디스플레이 아래쪽은 구형 M 클래스와 큰 차이가 없다. 선명하고 세련된 화면 구성의 대형 디스플레이와 커맨드 인터페이스만으로도 차의 여러 기능을 다루기에는 충분하지만, 아직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방식의 인터페이스를 선호하는 사람의 취향에 가깝다. 다른 건 제쳐놓더라도 시각적으로는 큰 차답지 않게 답답해 보인다.

뒷좌석을 위한 편의장비는 비교적 잘 갖춰놓았다. 앞좌석 헤드레스트 뒤에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위한 모니터를 갖춰놓았는가하면, 보조 전원 소켓과 열선 기능처럼 차급에 어울리는 장비도 빼놓지 않았다. 다만 구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뒷좌석 공기조절장치는 좌우 공간 온도를 따로 조절할 수 없고, 뒷좌석용 모니터는 크기가 작다.

하나뿐인 보조 전원 소켓도 위치가 쓰기 편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큰 차의 매력이 가장 돋보여야 할 부분인 공간 역시 빼어나다고 할 수준은 아니다. 앞좌석은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뒷좌석의 여유가 아쉽다. 일단머리 위 공간이 충분하고 시트 앉는 부분이 높아 불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무릎 공간이 아주 넉넉하지 않은 탓에 큰 차라 생각했을 때 기대하게 되는 만큼 여유가 크지는 않다.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GLS 클래스의 영역을 침범 할 수 없는 GLE 클래스의 한계다.

최근 들어 AMG 모델은 점점 더 성능이 높아지면서 그에 걸맞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개입되고 있다. 승용 모델 라인업에 일반 AMG 모델보다 강력한 S 모델이 추가되고 있는 것도 안정성을 높여주는 4매틱이 더해지면서 강력한 가속감이 둔해지는 것을 보완하려는 의도다. 그렇게 보면 4매틱이 기본 장비인 GLE에서 5.5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이 거침없이 뿜어내는 힘이 만들어내는 통쾌한 가속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오프로드를 고려해 7G트로닉 자동변속기의 저단 기어비를 키운 영향도 있다. 그래도 거친 비포장도로에서는 액셀러레이터를 조심스럽게 밟아야 한다. 힘은 언제든 넘쳐나기 때문이다. GLE 63의 강력함이 빛을 발하는 곳은 역시 포장도로다. 회전계 바늘은 순식간에 레드존 가까이로 치닫고, 속도계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도 금세 두 자리 숫자에서 세 자리 숫자로 넘어간다.

그러나 몸놀림은 처음부터 스포티한 설계로 안정감을 타고난 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부드럽고 여유 있게 달리려는 차의 움직임을 에어 서스펜션과 4매틱이 애써 자제시키는 느낌이다. 움직임은 확실히 안정적 이지만 그만큼 가속감은 밋밋하고 핸들링은 정확하지만 날이 무디다. 스티어링과 브레이크 감각도 비교적 깔끔하지만 만만찮은 덩치가 주는 부담은 가시지 않는다. 그처럼 몸이 느끼는 가속감의 강렬함이 적은 것을 의식한 듯, 메르세데스 벤츠는 GLE 63의 배기음만큼은 한껏 요란하게 과장시켜 놓았다. 아무리 고성능 모델이라 해도 대형 SUV에 어울리는 소리는 아니다. 차의 성격도 그렇지만 배기음 역시 짧은 간격으로 가감속이 반복되는 곳보다는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로 교통상황에 대응하는 고속도로 쪽이 맞아 보인다.

GLE 63에서는 오프로드에서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만능 차로 만들려는 벤츠의 욕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벤츠 차들에 호감이 큰 것과는 별개로, GLE 63에 줄 수 있는 점수는 평균 이상은 돼도 모든 영역에서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다. 덩치의 부담을 힘으로 이겨내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어디서도 큰 차나 고급차에 어울리는 배포를 느끼기는 어려워서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큰 차=고급차’라는 등식이 늘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번에 경험한 두 차는 모두 큰 고급차였다. 큰 차가 고급스럽기까지 하니 덩치가 주는 풍요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번 시승은 큰 차일수록 속이 꽉 차야 하고, 그러면서도 차에 탄 사람에게 넉넉함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웠다. 풍요로움을 고전적인 스포티함으로 표현하려던 GLE 63보다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틀안에 현대적인 감각이 잘 녹아든 레인지로버에서 큰 차에 어울리는 여유가 느껴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차 크기가 이 정도 되면 안전장비에서 편의장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채워도 모자란 점이 쉽게 드러난다. 크고 알찬 차를 만나기란 작고 알찬 차를 만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큰 차를 타는 사람들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어깨에 힘을 주나 보다. 정말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면 격에 걸 맞은 ‘가진 자의 여유’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