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반복되는 공연계의 비슷한 레퍼토리에 식상한 차였다. 그래서 국립발레단의 신작 소식이 더욱 반가웠다. 게다가 무용계 거장 조지 발란신의 작품이 아닌가. 4월 29일에서 5월 1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릴 <세레나데>. 이름만 봐서는 사랑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전혀 거리가 멀다. 정보의 바다라는 포털 사이트조차 이 작품에 관해서는 해박한 자료를 내놓지 못했다. 공연을 2주 앞둔 국립발레단 연습실로 당장 달려가야 했던 이유다. 더구나 첫 전체 리허설이 열리는 날이었다. 조지 발란신 트러스트에서 날아온 트레이너 달라 후버를 비롯해 강수진 단장, 그리고 얼마 전 캐스팅을 마친 무용수 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발레단의 얼굴이자 수석 무용수인 김지영이 퍼스트 캐스팅으로 일찍이 이름을 올린 터. 특히 김지영의 파트너로 신예 박종석이 캐스팅돼 눈길을 끌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조지 발란신 트러스트의 컨펌을 거쳐야 했던 터라 캐스팅이 다소 지연됐고, 여느 때보다 연습 시간도 빡빡했다.

1 중학생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박종석. 9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올해 처음으로 국립발레단에 합류했다. 더욱이 국립발레단의 최고참 수석 무용수 김지영의 파트너로 낙점, <세레나데>의 무대를 채운다. 2 <세레나데>의 첫 전체 리허설 현장에 동참한 강수진 단장.

스토리 없는 공연? “조지 발란신이 학생을 가르치다 구상한 작품이 <세레나데>예요. 그 때문에 리허설 도중 실수로 넘어지는 걸 작품에 넣기도 하고, 연습에 늦게 들어오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해요.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름답게 풀어놓은 거죠, 우스운 실수담도 있고.” 국립발레단의 최고참 수석 무용수이자 이번 <세레나데>를 이끌 발레리나 김지영. 국립발레단을 통해서는 처음이지만, <세레나데>와 그녀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 이미 해본 작품이에요. 물론 당시에는 지금의 역할이 아닌 군무의 솔리스트로 참여했지만요.” 벌써 2003년의 일이니 10년을 훌쩍 지나 다시 <세레나데>를 만나게 된 셈이다.
사실 <세레나데>는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다. 한데 <세레나데>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 조지 발란신의 안무를 더한 <세레나데>는 1935년 초연과 동시에 현대 무용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에는 스토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기존 클래식 발레의 동화적 스토리에 익숙한 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니
<호두까지 인형>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아름다운 스토리에 익숙한 당시의 발레 관객은 오죽했겠는가. 역시 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공개되자마자 비슷한 질문이 이어졌고, 조지 발란신은 이렇게 반문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스토리를 원하는 겁니까?” 그의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동화적 스토리와 화려한 무대 장식에 감춰져, 정작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 그는 ‘몸’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스토리를 삭제하고, 무대 장치도 배제했다. 발레 고유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인간 본연의 몸에 집중하기 위해 <세레나데>는 조지 발란신이 20세기 예술계에 던진 새로운 메시지였고, 그는 20세기 무용의 새 시대를 열었다.
“막이 열리고 달빛 아래 서 있는 무용수를 보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새벽녘 달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조명과 마주한 무용수를 본 순간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 김지영은 말한다. 그렇다고 여느 발레처럼 의상이 화려한 것도 아니다. 민소매 레오타드와 발목까지 오는 로맨틱 튀튀가 전부다. 마땅히 무용수의 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포즈와 스텝만이 텅 빈 무대를 오롯이 채운다.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 극적이고 아름답게.
“이 작품 자체가 음악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작품이에요. 음악을 몸으로 표현했다고 할 정도로 음악과 춤이 중요하죠.” 안무에 음악을 맞추는 대신,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 맞춰 안무했을 정도다. 조지 발란신이 그토록 열광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총 4악장으로 구성되었다. 차이콥스키 역시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감정을 모두 담았다고 회고했을 만큼 애착이 큰 작품이다. 특히 왈츠풍 제2악장, 차이콥스키 특유의 우수를 느끼게 하는 제3악장은 압권. 음악과 어우러진 무용수의 몸짓은 싱그러운 바람이 흩날리는 봄날의 영상처럼 평온하고 때로는 극적으로 흐른다. 우아한 백조처럼 제2악장에 맞춰 왈츠를 추는 김지영·박종석 커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로맨틱 튀튀 하나쯤은 집에 두어도 좋겠다 싶다. 비록 스토리는 없지만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과 음악만으로도 충분한 공연이 될 수 있을 거라던 김지영의 자신감은 괜한 게 아니었다.

김지영, 박종석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줄 <세레나데>.

“저 역시 미국 있을 때 <세레나데> 공연을 했어요. 스토리 없이 음악과 안무에 중점을 둔 무대지만, 사실 스토리는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김지영의 파트너 자리를 꿰찬 박종석. 사실 그는 미국 발레단을 거쳐 올해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20대의, 코르 드 발레(솔로를 추지 않는 무용수를 가리키는 말로, 군무를 뜻한다) 무용수다. 그런 그가 최고참 수석 무용수 김지영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그는 운이 좋았다지만, 사실 그는 나이에 비해 탄탄한 실력을 갖췄다. “중학생 때 유학을 갔다가 이번에 귀국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발레를 시작해 유학을 떠났고 워싱턴 발레단, UBC 발레단 등 미국에서 9년 정도를 보낸 후 돌아온 터였다. “우리나라 남자 무용수 대부분은 인간 승리의 케이스가 많죠. 그런데 종석이는 기초부터 배운 케이스로, 무엇보다 잘 배웠고 전도유망하죠.” 김지영의 말마따나 우리나라에는 남자 무용수가 많지 않고,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무용을 시작한 경우도 드물다. 여자 무용수가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발레 장르의 특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김지영이 아직은 어린, 파트너 박종석을 극찬하는 이유다. 더구나 나무랄 데 없는 신체 구조까지 갖췄으니. “보통은 주역 무용수가 힘든데, <세레나데>는 군무가 더 힘든 작품이에요.” 군무로 참여한 네덜란드 시절을 회상하며 김지영은 덧붙인다. 어쩌면 <세레나데>의 파격은 스토리의 유무가 아닐지 모른다. 주역과 군무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몸’이 지닌 아름다움을 통해 발레 본연의 본질로 돌아가려고 한 뚝심에 있을지 모른다.

1 프로 데뷔 20년. 오직 춤만 좋아했던 김지영의 지고지순한 ‘몸’이다 2 국립발레단의 신작으로 주목받는 <세레나데>의 두 무용수. 마치 인연처럼 김지영은 네덜란드에서, 박종석은 미국 발레단에서 이미 <세레나데>를 만났다. 김지영은 10년이 훌쩍 넘은 그 시절의 로맨틱 튀튀를 입고서 연습실에 섰다.

지고지순한 20년 “지금 입은 로맨틱 튀튀는 네덜란드에 있을 때, 그것도 <세레나데> 할 때 입었던 거예요.” 연습 내내 다른 단원의 것에 비해 유독 낡고 해진 김지영의 로맨틱 튀튀가 눈에 들어왔고, 오랜 연습의 흔적일 거라 여긴 터였다. 10년이 훌쩍 넘은 그 시절의 로맨틱 튀튀를 갖고 있었다니. 이것 말고도 버리지 못한 튀튀와 토슈즈가 집에 가득하다며 그녀는 환히 웃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옛날 생각이 났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올해로 프로 데뷔 20년을 맞았다. 무대에 수천 번 올랐지만 가장 떨린 무대도, 기억에 남는 무대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고. “2011년 무렵인데 공연을 며칠 앞두고 파트너가 다쳐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어요. 급하게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로 교체됐는데, 예상 외로 호흡이 잘 맞는 거예요. 이런 감정은 처음인데, 공연이 끝난 후 일주일 정도는 마음이 아련했어요.” 완벽한 케미를 자랑하던 그는 게이였다며 섣부른 상상을 차단시켰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 나름 애교 많아요(웃음).” 강하고 완벽할 것 같지만, 무대 뒤 김지영은 조금 낯선 모습이다. 연습 중 실수라도 하면 특유의 수줍고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신선했는지 그녀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정도. 연습하지 않을 때는 늘 집에 있는 집순이, 먹는 걸 좋아해 다이어트 대신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행복한 미식가, 옛날 일은 기억을 잘 못한다는 허당녀. 무대 밖 김지영의 민낯은 지극히 평범하다. 화려한 무대 위의 장치를 거둬낸, 조지 발란신의 담백한 무대처럼 말이다. 10세에 발레를 시작해 1997년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두 달 만에 수석 무용수 자리에 오른 김지영. 네덜란드를 거쳐 2009년 친정인 국립발레단에 재입단해, 지금까지 자그마치 20년이다. 뛰어난 점프와 턴, 탄탄한 기본기라는 수식이 무의미할 만큼 김지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레리나로서 또 다른 길을 열어가는 중이다. “무대에 서고 안 서고를 떠나서 춤 자체는 아직도 너무 좋아요. 몸이 안 따를 수는 있을지언정.” 20년,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여전히 춤이 좋다는 것이다. 오로지 ‘춤’만 좋아하던 지고지순한 김지영의 ‘몸’. 그 아름다운 인간 본연의 이야기가 <세레나데>를 통해 흐른다.

1,3  트레이너 달라 후버와 함께 연습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2 프로 데뷔 20년. 오직 춤만 좋아했던 김지영의 지고지순한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