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야기 속을 걷다

이 글을 쓴 박사는 북 칼럼니스트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 속에서, 나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이지만 내가 한 것 같은 말을 만난다. 문장들이 물결을 일으키며 나를 필연적으로 가 닿아야 할 곳으로 밀고 간다. 이야기를 만나면서 그 이야기와 꼭 닮은, 그렇지만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움튼다. 그렇게 글을 쓰게 된다. 읽을 때의 나와 쓸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지만 단단하게 맞물려 있다. 책으로 들어간 나는 이야기 속을 거쳐서 또 다른 내가 되어 나오고, 펜을 쥔 나는 내 주변에 무성한 숲을 만들고 그려내고 그 속에서 길을 찾아낸다. 그 숲은 또 누군가에게 이야기의 동굴이 될 것이다. 지나가는 이를 툭툭 건드려 아, 아, 아, 아 맑은 소리 내게 하는, 그러나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숲.

이 책은 한없이 돌아가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한없이 돌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길은 지루하고 막막한 길이 아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다 보면 뜻밖의 깨달음과 함께 뱉어진다. 정면으로 아픈 진실과 마주친다. 문장에 걸려 비틀거린다. 오래 머물며 오래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이야기들은 차례로 나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 오래전 리베카 솔닛을 삼켰듯이, 수많은 독자와 청자를 삼켰듯이.

우리는 불완전하고 약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을 갖게 된다. 깨달을 가능성, 변할 가능성. 더 잘 실패할 가능성, 실패하다가 천재지변처럼 ‘건너편’으로 나갈 가능성.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 사람들이 내게 주는 가능성. 그러다 결국 돌아올 가능성, 돌아와서 그전과는 다른 ‘나’를 발견할 가능성. 이 책은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야기가 설교나 강의와는 다른, 더 큰 힘을 갖는 이유는 들어가는 곳이 같더라도 나가는 곳이 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반은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우리를 홀렸던 동화들을 그의 책 속에서 다시 읽으며, 이번에는 다른 출구로 나가본다. 낯설지만 한편으로 아주 낯익은 세계. 작은 이야기들이 석류알처럼 박혀 있는 이 커다란 이야기는 내게 또 다른 ‘건너편’을 보여준다. 내가 도달한 곳이 당신들도 도달한 그곳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얼음의 실로 짠 서늘한 이야기

이 글을 쓴 이명석은 문화 칼럼니스트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45kg의 살구 더미와 함께 왔다. 평생 자신을 질투하고 차별해온 어머니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알츠하이머병과 함께 왔다. 팔려버린 어머니의 집에서 따온 살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침실 바닥에 넓게 펼친다. 그냥 두면 서로 짓눌러 터져버릴 테니까. 그리고 조금씩 유리병 속에 채운다. 살구만으로는 부족하다. 병 속의 빈틈에는 다른 이야기들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 썩지 않는다.  

놀랍고도 특이한 책이다. 회고적인 에세이이자 문학 비평이고 깊은 심상으로 가득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아포리즘이라는 말이 세속의 오염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이 책을 정의할 가장 적절한 말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가장 아픈 이야기를, 평생 읽고 겪은 이야기로 감싸낸다. 처음에는 동화로 시작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을 부여받는다. 방 안 가득 쌓인 건초더미를 하룻밤 안에 황금으로 바꿔야 한다거나, 숲 속에 뿌려진 진주 천 개를 모두 찾아야 한다거나, 찻숟가락으로 산더미 같은 모래를 옮겨야 한다. 그 불가능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아이에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무서움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이어 몹시도 차가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북극의 이야기. 메리 셸리가 그 소설을 구상한 역사적으로 추웠던 1816년의 여름.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서 소년의 가슴속에 박혀 그의 마음을 꽁꽁 얼려버린 얼음 조각. 작가가 운명적인 연락을 받고 훌쩍 떠나 찾아간 아이슬란드의 물의 도서관. 부서질 것 같은 얼음들이 실을 자아내고 서서히 작가의 상처를 보듬어간다. 그렇게 직조된 이야기가 결국 어떤 이들을 구원해낸다는 걸 보여준다. 가장 분명한 예는 블루스 연주자 찰리 머슬화이트다. 그가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우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이 애쓰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그는 결심한다. 나는 왜 이 아이의 반만큼도 용기를 가지지 못할 걸까? 아이가 구출될 때까지만이라도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말자. 아이는 구출되고, 그는 더 이상 술에 지지 않았다.

Editor 설미현 Photographer 김래영 Cooperation 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