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개념미술가 셰리 레빈의 ‘Fountain(Buddha)’.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의 1917년작 ‘Fountain’을 차용해 만든 작품으로, 그녀의 작품엔 미술계 흐름을 주도하는 주류 남성 작가들의 원작을 차용한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Sherrie Levine, Fountain (Buddha), 1996 © Sherrie Levine, Courtesy of David Zwirner, N.Y.

2 미술관 3층 전시실에 선 일라이 브로드와 이디스 브로드. Photo by Elizabeth Daniels, Courtesy of The Broad

부부를 언급할 때 아트 컬렉터 외에도 항상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중 65번째 ‘슈퍼리치’, 개인 재산 72억 달러(약 9조원) 중 35억 달러를 사회 발전을 위해 기부해온 ‘기부 천사’, 주택 건설업계의 전설 KB Home과 연금보험사 Sun America의 설립자인 ‘자수성가 기업가’, 로스앤젤레스의 예술계와 아티스트를 열정적으로 후원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 헌신해온 ‘LA의 메디치’.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사회 발전과 예술계 발전을 위해서 일해온 두 컬렉터의 백그라운드만 들어도 그들의 컬렉션이 얼마나 깊이 있고 방대할지 짐작할 수 있다. 자선 사업가 일라이와 이디스 브로드(Eli and Edythe Broad)가 바로 그들이다. 올해 82세, 80세를 맞이한 일라이와 이디스. 1963년 LA로 이주하면서 컬렉션을 시작했으니, 그 세월과 컬렉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작가 200여 명의 작품 2000여 점. 브로드 컬렉션은 마치 컨템퍼러리 아트의 대백과사전을 보는 듯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만들어진 동시대 현대미술 블루칩 작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 브로드 2층에 위치한 수장고. 미술관 1층과 3층에 전시된 작품을 제외한 소장품 2000여 점이 모두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유리벽을 통해 수장고 내부를 관람객이 일부 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Photo by Iwan Baan, C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지난해 9월, 그들은 지난 50년간 수집해온 세계적인 컨템퍼러리 아트 컬렉션을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다. 50년에 걸친 위대한 컬렉션의 새 보금자리이자 영원한 안식처가 될 미술관 ‘더 브로드(The Broad)’가 그것이다. 이들의 컬렉션 역사가 더욱 위대한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일라이 브로드. 그는 ‘슈퍼리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의 페인트공 아버지와 양재사 어머니를 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대신 그에겐 뛰어난 두뇌와 집념이라는 더욱 큰 자산이 있었다. 여섯 살 무렵 디트로이트로 이주한 그는 미시건 주립대에서 회계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직후 그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디스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최연소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주급 70달러(약 9만원)를 받으며 2년간 회계사로 일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고객 중 한 명이 주택건설업으로 큰돈을 버는 것을 보고, 주택건설업자인 도널드 쿠프만과 함께 1957년 KB Home을 설립했다. 그들이 개발한 저렴하고 실용적인 형태의 주택은 일주일 만에 모두 판매됐고,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두 번의 사업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라이는 아내 이디스와 함께 컬렉션에, 자선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3층 전시장에 설치된 네오 라우흐, 로버트 롱고, 마크 브래드퍼드의 초대형 페인팅 작품들. Photo by Bruce Damonte, Co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어린 시절부터 <라이프 Life>에 실린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던 이디스는 LA로 이주한 뒤 갤러리를 다니며 작품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갔고, 이때 첫 소장품인 조르주 브라크의 석판화를 50달러에 구입했다. “100달러였던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판화도 사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예술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하던 일라이가 수프 캔 그림을 100달러나 주고 샀다는 걸 알면 정신 나갔다고 할 것 같아 포기했죠.” 한데 20여 년 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워홀의 회고전을 보고 그의 작품에 매료된 일라이는 이디스 몰래 워홀의 ‘Small Torn Campbell’s Soup‘를 경매에서, 그것도 1170만 달러(약 140억원)에 구입했다. 이 작품의 낙찰 현장을 지켜본 이디스는 ‘누가 저 작품을 1170만 달러나 주고 구입했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일라이는 이러한 일련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디스의 도움으로 아트 컬렉션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1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재스퍼 존스의 대표작 성조기 페인팅. Jasper Johns, Flag, 1967 © Jasper Johns/Licensed by VAGA, New York, NY, Courtesy of The Broad  
2 미국을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시리즈. Andy Warhol, Small Torn Campbell’s Soup Can (Pepper Pot), 1962 © 2015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ampbell Trademarks used with permission of Campbell Soup Company, Courtesy of The Broad
3 개념주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바버라 크루거의 80년대 대표작으로, 낙태법 반대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Barbara Kruger, Untitled (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 © Barbara Kruger, Courtesy of The Broad
4 일라이와 이디스가 가장 좋아한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초기 작품. Roy Lichtenstein, Live Ammo (Blang), 1962 © Estate of Roy Lichtenstein, Photo by Douglas M. Parker Studio, L.A., Courtesy of The Broad

부부의 첫 소장품은 9만5000달러를 주고 구입한 반 고흐의 1888년도 드로잉이었다. 이후 그들의 집은 후안 미로, 앙리 마티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당시의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으로 모든 벽과 공간이 소진되었다. “아쉽지만 첫 소장품인 고흐의 드로잉 작품은 지금 우리 침실에 걸려 있는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붉은색 페인팅과 교환했어요. 자연 광선에 취약한 작품 특성 때문에 관리하기 쉽지 않았고, 작품 자체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라우션버그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컨템퍼러리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 컨템퍼러리 아트를 접했을 때 일라이는 왜 사이 톰블리의 밋밋하고 낙서 같은 페인팅과 스텔라의 정신없는 조각이 매력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컨템퍼러리 아트를 접하면서 이에 대한 매력을 공감하게 되었고, 1973년부터는 컬렉션의 방향을 컨템퍼러리 아트로 완전히 전환해 컬렉션을 발전시켰다. 일라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의 작업보다 동시대 현상을 낱낱이 분석해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에 더 매력을 느꼈다. 따라서 브로드 컬렉션에 소장된 작품은 주로 물질만능주의, 매스미디어, 소비주의 사회를 보여주는 작업, 사회적 타락과 부패 등 이슈를 다루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또 한 작가의 특정 작업이 아닌 전작을 깊이 있게 컬렉션하는 것이 브로드 컬렉션의 특징으로, 신디 셔먼과 제프 쿤스의 빅 컬렉션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 외에도 이디스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톰블리의 페인팅을 시대별로 소장하고 있으며, 요제프 보이스의 에디션 570점,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1960~1990년대 주요 작품 30여 점, 앤디 워홀의 주요 시리즈,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 페인팅을 포함한 그의 대표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당시 이스트 빌리지에서 활동하던 바스키아와 헤링 등의 작품도 여러 점 구입했는데, 한 작품당 5000~7000달러에 구입한 바스키아의 작품은 최근 경매에서 주요 작업들이 2000만 달러를 넘나드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제프 쿤스의 셀레브레이션 시리즈 중 제작 과정이 가장 까다롭고 복잡했던 ‘Tulips’과 크리스토퍼 울의 흑백 텍스트 페인팅. Photo by Bruce Damonte, Co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브로드 컬렉션은 제프 쿤스의 모든 시리즈 작품을 갖고 있는 대표적 컬렉션으로, 그의 작품 3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일라이는 제프 쿤스가 뉴욕의 주식 브로커였다는 특이한 이력에 매력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아트 마켓이 불황이던 1990년대 초반, 쿤스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의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제작비도 부족했어요. 당시 쿤스는 ‘셀레브레이션’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 작품당 제작비만 해도 70만 달러에 달했죠.” 쿤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일라이는 작품도 보지 않고, 제작도 되지 않은 이 시리즈 작품 3점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즉시 쿤스에게 100만 달러를 선지급했다. 또 이전 작업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마이클 잭슨과 래빗 시리즈의 아티스트 프루프(Artist Proof) 버전을 100만 달러에 구입, 쿤스가 재정난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그가 구입한 작품은 3000만~5000만 달러를 넘나드는 금액에 거래되고 있으며, 심지어 크리스티의 주인이자 세계적인 컬렉터 프랑수아 피노는 래빗의 다른 에디션을 6000만~8000만 달러에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물론 부부의 소장품이 모두 작가들이 블루칩 반열에 오르기 전에 구입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말부터 구입하기 시작한 앤디 워홀의 작품은 경매를 통해 몇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으며, 뉴욕의 한 딜러의 집에서 처음 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I’m Sorry’는 15년을 기다린 끝에 1995년 뉴욕 소더비에서 25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그들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작품 가격이 얼마든 최고 컬렉션을 만들기 위해 지불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컬렉션을 금전적 투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브로드 컬렉션의 현재 총가치는 22억 달러(약 2조 6000억원)에 달하며, 실제 일라이는 컬렉션을 통해 천문학적 금액의 수익을 얻었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투자로 미술품을 컬렉션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고 말한다. “진정성 있는 예술에 대한 애정, 작품을 보는 예리한 안목,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투자 없이는 기대하는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의 3층 전시실에 설치되어 있는 에티오피아 출신 여성 작가 줄리 머레트의 초대형 페인팅. Photo by Bruce Damonte, Co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브로드 부부는 작가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당연히 컬렉션에 소장된 작가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신디 셔먼, 로버트 라우션버그, 제프 쿤스는 물론이고, 에드 루샤를 비롯한 LA를 기반으로 한 주요 작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작가들의 작품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은 부부가 살고 있는 브렌트우드에 다수 설치되어 있는데, 생전에 리히텐슈타인은 이디스를 위해 다이닝룸을 디자인해주었고, 리처드 세라는 그들의 정원을 위해 ‘No Problem’이라는 작품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이 작품을 구성하는 판 4개는 고속도로 폭보다 넓어 트럭 4대에 나누어 운반했고, 그 트럭들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배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뿐 아니라 작품을 정원에 들이기 위해 나무와 벽을 일부 제거해야 했고, 작품을 내려놓기 위한 보강 작업도 대단했다. 작품 설치를 지켜보던 부부는 작품의 안전성이 걱정돼 세라에게 계속해서 안전하냐고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No Problem”을 외쳤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Untitled’였는데, 이 때문에 ‘No Proble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 재스퍼 존스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만든 작품으로, 조각과 페인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담한 시도가 돋보인다. Jasper Johns, Watchman, 1964 © Jasper Johns/Licensed by VAGA, New York, NY,  Courtesy of The Broad

2 건물의 외관을 장식한 장막 안쪽으로 들어서면, 마치 동굴 입구 같은 더 브로드 미술관의 로비와 3층 전시 공간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난다. Photo by Iwan Baan, Co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3 일라이가 컬렉션의 소장품 중 가장 아끼는 팝 아티스트 에드 루샤의 60년대 페인팅. Ed Ruscha, Norm’s, La Cienega, on Fire, 1964 © Ed Ruscha, Courtesy of The Broad

1 브로드 컬렉션에서 가장 최근에 구입한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 Yayoi Kusama, Infinity Mirrored Room - The Souls of Millions of Light Years Away, 2013 © Yayoi Kusama, Courtesy of  David Zwirner, N.Y.

2 3층 전시실에 설치된 로버트 테리언의 대형 조각. Photo by Elizabeth Daniels, Courtesy of The Broad and Diller Scofidio + Renfro

“사실 이디스는 처음엔 파운데이션 설립에 반대했어요. 집에서 작품을 즐기는 걸 너무 좋아했고 자신을 드러내길 꺼린 탓도 있어요.” 그는 부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세우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아내를 설득해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작년 9월, LA 다운타운 그랜드 애버뉴에 문을 연 미술관 ‘더 브로드’가 그것이다. 12만 스퀘어피트(약 1만1200m²), 3층 규모의 더 브로드는 브로드 부부가 지난 50년간 수집한 컬렉션 2000여 점으로, 미술관 대여를 통해 한두 점씩 전시된 것 외에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기에 기대감 역시 컸다. 미술관 건축은 뉴욕 하이라인 파크의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건축가 그룹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가 맡았다. 이곳의 콘셉트는 장막과 저장소(Veil and Vault)로, 여느 미술관과 달리 수장고가 미술관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방대한 컬렉션을 보여주기 위해 충분한 공간 확보가 큰 숙제였던 건축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장고를 미술관 중심부에 만들고 관람객이 수장고 내부에 보관된 작품들을 살짝 엿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뜻깊은 개관식 날, 일라이는 이러한 컬렉션은 단시간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감과 함께 더 브로드가 MOC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함께 그랜드 애버뉴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이 지역 아트신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찬 포부를 밝혔다. “문명은 성공한 사업가·금융가·변호사들에 의해 기억되는 게 아니라 예술에 의해 기억됩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동시대 문화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수집해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 자체로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고 일라이는 강조한다. 노부부의 열정과 50년 역사가 빚어낸 ‘더 브로드’는 분명 한 시대의 예술이자 문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 이 글을 쓴 채민진은 Perspectrum Art Advisory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