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붓으로 칠하고 손으로 문지르는 작업 방식 덕에 노화백의 지문은 그 세월만큼 닳았다.

2 한국에 올 때면 그는 영은미술관에 머문다. 책상 하나와 책장, 이불 한 채를 펴면 적당한 그의 숙소 창문 너머로 가을의 노란빛이 황홀하다.

그가 잠깐 한국에 들를 거라는 기별을 전한 것은 그의 동생이었다. ‘그’는 바로 한국 추상회화 1세대 작가인 방혜자이며, ‘그의 동생’은 방훈 예술감독이다(누이의 예술적 지지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인 방훈 예술감독은 그 옛날 방혜자 화백의 파리 유학생 시절, 든든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저는 괜찮으니 시간 보시고 말씀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마저 그의 화풍을 닮은 듯하다. 그와 만나기 전 몇 번 통화를 했고, 그는 늘 통화의 마지막을 감사하다는 말로 맺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에게 인터뷰 따위가 감사를 표할 만큼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며, 파리에서 막 당도한 터라 피곤함은 절정에 달했을 터다. 더구나 70대 후반의 노화백이 아닌가.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은 경기도의 영은미술관. 파리에서의 삶을 꾸린 그에게 이곳은 어쩌면 친정집 같은 곳이다. 그는 이곳 창작스튜디오의 장기 입주 작가 중 한 명이며, 작업실에서 5분 거리의 작가 숙소가 그의 거처다. 집이 아닌 숙소라는 말이 제격인 것이, 책상 하나와 책장, 이불 한 채를 펴면 적당할 작고 소박한 공간이다. “며칠 전만 해도 저 창문 너머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는데 벌써 다 떨어졌어요. 이것 좀 보세요.” 노란빛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며 손수 아이패드로 찍은 샛노란 은행나무 풍경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의 아이패드엔 귀한 보물이 가득한데, 파리의 아들 내외 부부와 어여쁜 손녀도, 소박한 파리 아틀리에 풍경도 그중 하나다.   
“이건 아죽스에 있는 아틀리에예요. 아들이 직접 디자인했지요. 그 옆으론 작은 찜질방도 있어요.” 건축을 전공한 아들이 직접 설계한 프랑스 아르데슈 지방의 아죽스 화실. 얼핏 사진만 봐선 경기도 어느 시골 마을인 듯 소박하고 평온하다. 어머니를 위해 지은 찜질방은 또 어떻단 말인가. 이질감 없는 그 풍경을 보자니, 그에겐 파리든 서울이든 거주지 따윈 중요하지 않겠다 싶었다. 마구간에 말을 매어두는 게 싫어, 일부러 집 마당에서 말을 키운다며 사진 한 장을 건넨다. 이 말의 주인은 딸이라는 말과 함께. 이 아늑한 자연 속 아틀리에에선 종종 미술 워크숍도 열린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화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제가 대접하곤 하지요.” 평생 그림만 그렸으니 요리엔 젬병일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손을 흔들며 웃는다. 

지인이 선물한 하얀 작업복을 입고 그는 오늘도 숙소 인근의 작업실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한국에 잠깐 들른 그이지만 그는 그 틈에도 작업에 열심이다. 마치 친정집 같은 이곳 영은미술관은 한국에 올 때면 그가 머무르는 곳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면 그는 늘 이곳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화백은 촬영 중에도 화폭 주위를 떠나지 못했고, 그림을 보고 있노라만 또 그리고 싶어진다고 수줍게 웃었다.

1 그의 책상에는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 그는 아직도 매일 일기를 쓸 만큼, 글쓰기를 즐기던 문학소녀였다. 2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게 될 만큼, 인터뷰 내내 그는 조곤조곤 서두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음성은 자신의 화풍처럼 은은한 빛으로 다가왔다. 그는 파리에서 손수 말린 찻잎을 꺼내 우린 다음 조용히 차 한잔을 권했다.
 

1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서울-파리-서울: 프랑스에 한국화가>전이 세르누치 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엔 방혜자의 ‘빛의 탄생’이 전시 포스터로 제작돼 에펠탑, 퐁피두센터 등 파리의 주요 곳곳에 걸렸다. 2 얼마 전 출간된 세 번째 화집 <방혜자 빛의 노래>. 3 방혜자, 마음의 빛, 58.7×43.6cm, 2009 4 프랑스 아죽스의 집과 아틀리에. 4 ‘사람의 손으로 빛을 그릴 수 있을까?’그의 예술은 빛에 대한 찬탄과 의문에서 시작됐다. 빛을 향한 50년의 기나긴 고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는 오늘도 빛이라는 생명의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고요히 붓을 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화집을 맡았던 프랑스 출판사가 출간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이 친구들이 마감일까지 마무리를 안 하고 휴가를 떠나버린 거예요. 다행히 한국 출판사의 도움으로 출간 날짜를 맞출 수 있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얼마 전 출간된 세 번째 화집 <방혜자 빛의 노래>는 2007년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작품을 수록한 것으로, 방훈 예술감독이 총괄 디렉팅을 맡았다. 특히 기존의 화집 두 권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출간된 데 반해 한국어를 덧붙여 그 의미를 더한다. 파리에서 열린 출간기념회를 겸한 개인전이 끝나기 무섭게 내년 2월 7일까지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전 <서울-파리-서울: 프랑스에 한국화가> 전이 세르누치 미술관에서 열린다.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등 한 달에 한 번꼴로 전시가 열릴 만큼 바쁘지만 그가 잠시 고국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다.
“1943년 나치 치하에서 예술가 4명이 진리가 무엇인지, 예술은 또 무엇인지, 정치는, 철학은, 무엇인지 고뇌해요.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가 나누는 모든 말을 기록하자고 제안하죠. 그것도 17개월이나요. 그 기록이 1976년 프랑스어로 출간됐어요. 남편과 함께 그 책을 번역하고 있어요.” 출판사와의 미팅이 잘 풀리면 아마 이 책이 한국어로도 출간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미 에세이를 몇 번이나 출간했을 만큼 그는 글재주도 뛰어나다. 사실 그는 시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의 소질을 알아본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시를 쓰고 있을지 모른다. “예전엔 유학을 가려면 국가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갈 수 있었어요. 예술가에게 파리는 늘 꿈의 도시였지요.” 당시 한국의 현대미술은 그야말로 무의 상태였고, 그는 과감히 파리를 택했다. 1961년,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사감 선생님이 얘가 울어서 센 강 수위가 높아졌다고 할 정도였어요.”(웃음) 한국 식당 하나 없던 시절 파리에서 어린 방혜자는 많이도 울었다. “7년 동안 부모님을 못 봤어요. 그 당시만 해도 금의환향 안 하면 되돌아갈 수 없던 시절이었어요. 전화국에 가야만 전화를 할 수 있던 때라, 어쩔 수 없이 편지로 부모님과 소식을 주고받았어요. 한데 편지다 보니 보름 전 소식을 듣는 거지요.” 그는 그 시절 어머니가 보내준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중엔 눈물로 얼룩진 편지 하나쯤이 추억처럼 남아 있다.

건축가인 아들이 직접 설계했다는 아르데슈 지방에 위치한 방혜자 화백의 아틀리에. 소박하고 단아한 풍경은 그의 성정을 닮은 듯하다.

“그 시절 루시옹에서는 천연 색을 채취해 가루를 만들고 이것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정말 신기한 게 옛날 그림인데도 손상된 게 없다는 거예요. 3만6000년 전의 동굴 벽화만 봐도 아직 하나도 안 변했잖아요?” 그는 남프랑스 루시옹의 황토분과 부직포를 만나며 빛 자체에 더욱 천착하게 된다. ‘이걸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면 에너지를 받겠구나!’ 그는 그곳의 천연 염료와 흙에서 색의 에너지를 느꼈다. 그 자체로 빛을 머금고 반사하는 특성을 지닌 천연 안료는 그의 그림을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부직포 특유의 부드러운 섬유질 또한 투명하면서도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이쯤에서 궁금증 하나가 생긴다. 부직포에 자연 채색을 했다고 저렇듯 오묘한 빛의 오라를 풍길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엔 비밀이 하나 있다. “부직포의 앞뒤로 채색하는 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빛이 뒤에서도 나오고 앞에서도 나오고…. 식물성 염료를 이용해 옅게 겹으로 그리는 방식인데, 그 과정에서 깊은 맛이 나오죠.”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일단 부직포 뒷면을 칠하면 앞면에 은은한 색이 배어나오는데, 다시 앞면에서 그 빛을 고려해 색을 칠하게 된다. 이러한 양면 채색 기법은 빛의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색을 칠하는 방식 역시 붓으로 색칠한 다음 손으로 문지른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부직포의 질감에 색이 스미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앞뒤로 수차례 거치고 나면 그만의 깊은 색이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그의 빛은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은근함, 단아함에 가깝다. 그 안엔 새벽녘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묘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의 빛에 풍부함을 더해준 곳이 파리라면, 그 빛을 싹 틔운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다. 첫 유화 작품인 ‘서울풍경’을 펼쳐 들며 그는 말을 잇는다. “여길 보세요, 다 어두운데 여기 빛 한 점이 탁 있잖아요. 이때부터 내가 하고자 한 게 아니라 빛이 내게로 왔어요.” 서울대 미대 재학생 시절 그린 ‘서울풍경(1958)’은 평생 그림의 주제가 된 ‘빛’과의 인연이 시작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사람의 손으로 빛을 그릴 수 있을까? 생명의 빛을?’ 그의 예술은 이러한 빛에 대한 찬탄과 의문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그는 명동에 위치한 불어연구소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받았는데 그 연구소 옥상에서 첫 유화 작품인 ‘서울풍경’이 탄생됐다. 어둠 속에서 발견되는 한 점의 빛. 오늘의 빛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노라고 그는 말한다. “지문 때문에 휴대전화가 안 열릴 때가 많아요.”(웃음) 손으로 색을 문지르다 보니 그의 지문은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잠깐의 촬영을 위해 그림 옆에 서달라는 주문에도 그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보면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그는 촬영 대신 창문 너머의 가을빛을 보라며 우리를 재촉했다. 자연이 선사하는 이 빛을 음미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땅 위에 씨를 많이도 뿌렸습니다. 이제 하늘에 씨앗을 심을 때가 왔습니다. 밖으로 향했던 마음, 다 씻어내고 안으로 돌려, 삶의 마무리를 깨끗이 하겠습니다.’ 그의 책상 위엔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 뜻밖에도 일기라고 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물론 거창한 주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내려갈 뿐. 라디오에도, TV에도 별반 취미가 없는 그는 책 읽기를 즐긴다. 글(시) 쓰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즐긴다. “태어날 때 순수하게 태어났다가 다시 아기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빛의 세계에서 와서 빛의 세계로 들어가죠. 빛을 그리는 게 아니라 빛이 내게로 와서 빛 자신이 표현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하나의 색으로 빛이라는 생명의 씨를 뿌리는 그의 그림은 어쩌면 시와도 닮았다. 사랑과 치유의 빛을 심는 마음으로 그는 매일 붓을 든다. 시인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