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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PICK_Lifestyle

40년, 그 열정의 뜰

한곳에서 40년을 살면, 그 공간 자체도 예술의 문턱 즈음에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집이든, 작업실이든 말이다. 도예 작가 신상호. 그가 지난 40년간 열정으로 다진 뜰과 스튜디오를 공개했다. 익히 소문난 그의 컬렉션까지 더해지니, 혼자 보긴 아까울 정도로 귀한 볼거리다.

2015.11.16


 

첨단 내비게이션도 이 외진 장소를 찾아내기엔 좀 버거웠나 보다. 한 차례 뜬금없는 장소로 우릴 안내하더니, 급기야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근처에 다 왔는데, 길을 못 찾겠다고.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장흥, 거기서도 가장 조용하고 외진 곳에 도예 작가 신상호의 집이자 작업실인 ‘신상호 스튜디오’가 자리한다. 연고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 외진 곳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신상호, 그의 컬렉션은 그의 예술 인생만큼이나 오래됐고, 규모 또한 상당하다. 컬렉션의 규모가 대체 얼마나 됩니까, 라는 다소 속물적인 질문에 그는 그 수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신상호는 컬렉션에 관해선 병적으로 집요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집착한 아름다움이란 대체 뭘까. 그에겐 물건의 크기, 연대, 투자의 가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단 하나, ‘느낌’. 그것뿐이었다. 빼곡히 진열된 그의 컬렉션을 보고 있자니, 열정 가득한 그의 컬렉션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하다.

 

 

 

“20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강사를 하던 시절. 가장 싼 곳이 어디인지 백방으로 찾아다녔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북쪽으로는 안 올 것 같았고, 내가 살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 때고, 연기 나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여타의 떠들썩한 곳은 맞지도 않고요.”
그렇게 1975년 이 땅을 샀고, 1년 후 이사를 왔다. 물론 지금처럼 거창한 공간은 아니었다. “처음엔 약 2645m²(약 800평) 규모의 다 쓰러져가는 우사에서 시작했어요. 그 옛날 구반포의 250만원 전셋돈으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지요.”
평수만 보면 시작부터 꽤 폼나는 인생이었구나 싶겠지만, 당시 땅값이라야 평당 2000원이 고작. 그러니 얼마나 싸고 허름한 출발이었는지, 안착하기까지 얼마나 신산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그의 말은 결코 허튼 공치사가 아닌 것이다.
소박한 집이자 작업 공간이던 이곳에 규모가 더해진 것은 1988년 무렵. 서울올림픽 당시 문화 행사의 하나인 ‘현대 도예 워크숍’이 이곳에서 열렸고, 세계 거장들의 공동 작업 공간이자 게스트 하우스로 쓰이게 됐다. 2개의 거대한 작업실과 사무 공간, 카페, 그리고 퇴직 후 더욱 공고해진 3개의 전시 공간까지. ‘신상호 스튜디오’라는 명패를 붙여도 좋을 만큼 제법 그럴듯한 지금의 공간을 갖추게 됐다. 삶의 필요에 따라 때론 용도가 변경되었고, 어느덧 40년을 맞은 이 공간에서 제법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신상호 스튜디오의 지붕 위엔 그의 조각 작품과 함께 눈여겨볼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굴뚝. 건축에 도예를 입힌,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 스타일을 구축한 첫 작업으로 그의 스튜디오에 그대로 설치됐다.

 

 

 

“왜 이제야 공개하느냐고 묻는데, 사람들이 찾아오면 작업하기도 힘들고. 그렇다 보니 도저히 오픈할 수가 없었어요. 퇴직 후 미술관 전시를 위해 큰 작품을 옮기는 과정에서 문득 생각했지요. 이곳에서 전시를 하면 작품을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은 덜겠구나!”
그의 작품과 오랜 컬렉션으로 꾸며진 너른 뜰과 스튜디오는 그렇게 대중에게 공개됐다. 아쉬운 점은 10월 한 달뿐이라는 것. <The Collector>라는 나름의 전시 타이틀까지 내건 이유도 그 때문이다. 40년을 온전히 이 동네에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조차 그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은둔 생활을 했다는 그이니 꽁꽁 감춰진 40년의 공간이 더욱 궁금할밖에. 퀑퀑 개 짓는 소리 요란한 그의 스튜디오와 웅장한 대문 뒤로 펼쳐진 넓은 뜰과 갤러리, 그리고 안쪽으로 이어진 가족의 집. 흙과, 불과 씨름한 수십 년의 시간과 ‘아름다움’을 찾아 세계를 쏘다닌 열정의 흔적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40년의 세월은 적은가요?”
신상호 스튜디오엔 그의 말마따나 적지 않은 40년의 기억과 농밀한 흔적이 켜켜이 쌓인 채다.

 

 

 


아프리카 미술의 원초적인 생명력과 시간성에 매료돼 그것에 매달리길 수십 년. 당연히 그의 컬렉션엔 아프리카의 흔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은 고스란히 작업의 영감으로 이어졌다. 

 

 

 

치유 불가능한 수집병 
“이건 병이에요. 병원에서조차 치료가 불가능한.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피카소, 미로, 샤걀도 그랬어요.“
자신의 수집병은 그 강도로 치자면, 중증환자에 속한다며 그는 웃는다. 덧붙여 컬렉션을 하려면 결혼을 잘해야 한다고 뼈 있는 농을 친다. 그도 그럴 것이 컬렉션에 관해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였고, 아내의 이해가 없었다면 컬렉션이든, 결혼생활이든 둘 중 하나는 이미 파토가 났을 일이다.

 

 

 


2003 Dream of Africa, Glazed Ceramic 아프리카에서의 영감을 담은 ‘아프리카의 꿈’ 역작. 그는 흙이라는 매체의 전통적인 표현을 뛰어넘어 조각, 설치, 나아가 건축에 도예를 접목했다.
 



“나는 컬렉션에 관해선 지지 않아(웃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그는 컬렉션에 병적으로 집요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집착한 아름다움이란 대체 뭘까. 단순히 구조적인 미감일까? 그에겐 물건의 크기, 연대, 투자의 가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단 하나.
“느낌! 물건을 볼 때 마음이 동하면 그만이죠.”

 

 

 


2014 Surface ’n Beyond , Glazed Ceramic, 200×800cm 신상호는 도예의 한계인 크기를 넘어, 그만의 조각을, 그림을 완성했다. 

 

 

 

그는 늘 여행을 즐겼지만 특히 런던 노팅힐에 위치한 포토벨로가를 편애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골동 시장이 열리는 이곳은 그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포토벨로 마켓이 열리는 날이 가까워지면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일반 손님들이 포토벨로를 드나들기 시작하는 시각은 오전 9시. 하지만 상인들은 새벽 5시부터 나와 그들끼리 거래를 시작한다. 그래서 정말 귀한 물건은 새벽 6시 이후에는 보기 힘들거나 오전 9시 이후에는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고. 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그는 늘 상인들보다 일찍 그곳으로 출근 했다. 새벽의 포토벨로를 서성이는 이 동양 남자에 대한 소문은 어느 순간 상인들에게까지 퍼졌고 좋은 물건을 먼저 챙겨주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팔지 않겠다는 상인을 어르고 때론 싸움까지 불사했다. 물론 컬렉터의 수업료처럼 여겨지는 사기도 여러 번 당했다. 그 비싼 수업료 덕택인지, 그가 런던에 가면 ‘미스터 신’이 포토벨로에 뜰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 그는 웃는다. 

 


 


돔 형태의 거대한 작업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신상호. 그는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혼자 작업실을 찾는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그는 늘 상식 너머의 새로운 것을 열망했다. 그리고 그 곁엔 늘 흙이 있었고 불이 있었다. 50년을 흙과 함께 산 신상호는 아직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컬렉션에 주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처음엔 우리나라 것에 집중했지만 경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고. 굳이 꼽자면 아프리카 컬렉션이 많은 편이죠. 그 물건이 가진 시간, 배경. 그걸 발견하는 게 작가인 거죠. 그러니 수집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성을 수집하는 거예요.”
아프리카 미술의 원초적인 에너지와 시간성에 매료돼 그것에 매달리길 수십 년. 당연히 그의 컬렉션엔 아프리카의 흔적이 지배적이다. 어떤 목침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아프리카 남성들의 애장품인 목침부터 짐승이나 사람과 싸울 때를 대비해 지니고 다녔다는 곤봉, 방패, 상아 트럼펫, 에티오피아 화폐 등. 그의 심각한 수집병을 말해주는 희귀한 물건이 가득하다. 그는 그것들에서 시대를 읽고 그 안에 담긴 영광과 상처를 보았다. 그것은 곧 작업의 영감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에게 컬렉션은 물건에 집착하는 소유가 아닌, 영감을 찾아 헤매는 또 다른 작업의 연장선인 것이다.

 

 

 

 


2012 Don Quixote, Glazed Ceramic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손에 넣기까지 잠도 오지 않았다는 신상호. 그의 무모한 열정은 돈키호테를 닮았다. 

 

 

 

 


2008 Fired Painting, language, Glazed Ceramic, 500×450cm 신상호는 ‘구운 그림’이라는 독자적인 도자 그림을 탄생시켰다.

 

 

 

흙에 웃고, 무너지고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혼자 이 작업실에 와요. 이른 아침, 아무도 없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지요. 생각이라는 게 서툴게, 갑자기 찾아와요.”
‘상식’이라는 선을 따라가는 일상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는 그 상식 너머의 새로운 것을 늘 열망했다. 그리고 그 곁엔 늘 흙이 있었고 불이 있었다.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50년을 흙과 함께 살았던 신상호.

 

 

 


그의 컬렉션이 전시된 전시장 안으로 가을 햇살이 풍요롭게 내려앉았다.

 

 

 

“전통 도예로 8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엄청 돈을 벌었어요. 그때 지금의 경제적인 토대가 구축된 셈이죠.”
그런데 그는 그 무렵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질렀다. ‘접시, 항아리 말고 다른 걸 만들 순 없을까?’ 인간문화재 선정 심사를 앞둔 시기였고, 일본의 한 학교에서 오기만 하면 박사 학위를 주겠다는, 소위 눈에 보이는 성공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 중요한 순간에 그는 ‘전통’을 버렸다. 그런 그가 세상에 내놓은 것은 흙을 주물러 만든 ‘물고기(Fish, 1987)’. 세간의 논란과 입방아에 오르내린 것은 당연지사다. 

 

 

 


거대한 공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작업실엔 그와 40년을 함께한 우직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당시의 나는 ‘우리 문화, 전통이 최고다’라는 생각에 젖어 살았어요. 그런데 외국에 교류차 다니면서 깨달았죠. 남의 문화도 최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것이 최고라는 민족주의 교육에 대한 회의와 함께, 우리 문화가 최고라 여겼던 그의 신념도 저 멀리 세상과 만나면서 무너져내렸다.
“도예의 한계로 지목되는 크기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또한 자유롭게 그리고 싶었어요.”
인물과 동물의 두상을 형상화한 ‘Head’ 연작, 아프리카에서의 영감을 담은 ‘아프리카의 꿈’ 연작 등 그는 흙이라는 매체의 전통적인 표현을 뛰어넘어 설치, 나아가 건축에 도예를 접목했다. 그즈음, ‘구운 그림(Fired Painting)’이라는 그만의 독자적인 도자 그림도 탄생했다. 구은 그림은 흙으로 만든 도판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몇 차례 구워내는 방식. 이 까다로운 공정을 뚫고 탄생한 구운 그림은 깊이 있는 색상과 특유의 질감으로 유화의 그것과는 다른 낯선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흙을 가지고 못하는 게 없어요. 건물에 구운 그림을 붙여 건물을 화폭처럼 물들이고….”
그 어떤 곳이든 그에겐 흥미로운 화폭이 되었고, 이제 그의 흙은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중이다.
“다음 달엔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에요. 돌아와선 다음 전시를 구상할 참인데, 아마도 밀리터리, 군인들이 쓰던 도구를 가지고 뭔가를 작업할 것 같아요.”

 

 

 


그는 병원에서도 치료 불가능한, 수집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수집병은 그 강도로 치면, 중증환자에 속한다며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었다. 그는 아직도 일요일 아침이면 그의 애마인 트럭을 몰고 청계천 시장 그 어딘가를 누빈다

 

 


이번 작업의 주재료는 쇠. 물론 개중엔 쇠와 흙이 만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전쟁’ 하면 슬프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정도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어쩌면 전쟁은 사람들의 삶과 같이 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나쁘다, 좋다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변치 않는 평등한 이치 하나는 ‘삶은 전쟁이라는 것’.
“그런데 그 전쟁에서 벗어난 순간 맥 빠진 사람이 되고 말아요. 전쟁터에 발붙이고 치열하게 그 속에 같이 섞여가야….”
그는 뜰 한구석에 놓인 거대한 군함을 이끌고 종횡무진 사람들 사이를 누빌 것이다. 총성 없는 전쟁 틈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젖은 몸과 마음을 늘 그렇듯 다독이며.   
“지금 생각해보면 정년 5년을 남기고 학교를 그만둔 게 제일 잘한 일 같아요. 물론 옛날처럼 원주민을 찾아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던 열정은 이제 없죠(웃음).”
그는 조금이라도 더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작업을 하고 싶었고 과감하게 이른 퇴직을 택했다.
“홍대 미술대학 학장 시절,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 혼자 있을 때 노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런데 그게 오래 걸려요. 나는 5년이 걸렸어요. 물론 높은 데서 내려올수록 더 오래 걸리겠지요. 내가 누구라는 게 의미 없어요!”

 

 

 


빨강, 주황, 노랑 등 그의 작업실과 집엔 유독 컬러가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들이 결코 ‘과잉’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사한 햇살과 자연을 머금은 그의 집과 스튜디오는 여느 한국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그의 작업처럼 말이다. 창문 너머의 자연과 그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조각공원에 온 듯한 풍경을 드리운다.

 

 

 

퇴직 후 어느덧 10년. 그는 요즘도 혼자 애마(?)인 트럭을 몰고 일요일 새벽이면 풍물과 폐품이 혼재된 청계천을, 또 어떤 날엔 그 어느 거리를 누빈다. 그러다가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의 애마에 그것을 싣고 신나게 페달을 밟는다. 40년, 그의 땀과 열정으로 다져진 뜰과 스튜디오엔 가을빛의 풍요가 아름답게 물들었다. 
 

‘아름다움만이 진짜라는 걸 증명한다’는 그의 지론처럼.

 

CREDIT

EDITOR / 설미현 / PHOTO / 박우진 /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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