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ES 떼르 데르메스 오 뜨레 프레슈 오 드 투왈렛 125ml, 15만7000원. FREDERRIC MALLE 비가라드 꽁상뜨레 100ml, 24만5000원. BVLGARI 오파퓨메 오떼 블루 75ml, 12만3000원. DIOR 오 소바쥬 코롱 100ml, 12만8000원. JO MALONE LONDON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100ml, 16만9000원.

후텁지근한 여름 회의실 안. 독한 남자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한여름에도 마초이길 포기 못하는 걸까? 짙은 우디와 가죽 냄새가 좁은 회의실 공기를 텁텁하게 만든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는 또 어떻고. 풍성한 꽃 향으로 여성미를 발산 중인 그녀 옆에 선 사람들은 이미 질식 직전이다. 

그렇다면 무더운 7, 8월엔 어떤 향수를 뿌리는 게 나을까? 관능적인 향보다는 성별 구분이 애매모호한 향이 제격이다. 여기에 시원한 땅과 물의 향, 또는 고요한 차(茶) 향을 곁들이면 푹푹 찌는 날씨도 쾌적하게 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불가리의 신제품인 ‘오파퓨메 오 떼 블루’를 뿌렸다. 우롱차를 마실 때의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향수는 마치 오파퓨메 오 떼 베르(녹차 향)에 불가리 옴므를 섞은 듯한 느낌. 약간의 쌉쌀함과 고소함, 그리고 잔향에서는 파우더리한 바다 내음도 나는 것 같다. 아닉구딸의 ‘릴 오 떼’도 빼놓을 수 없겠다. 여성·남성용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향은 동일하고 보틀만 다른 것이 흥미로운데, 그만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는 중성의 향이다. 시트러스 느낌을 쏙 뺀 귤 향에 쌉싸래한 녹차 향을 곁들여 새콤하지도, 달콤하지도 않고 서늘하다. 또 남녀노소 누가 뿌리든 향이 나대지 않고, 살며시 본인 이미지에 녹아든다(내 맘대로 꼽은 올해의 베스트 향으로 낙점!). 다음은 깨끗한 물을 닮은 코롱. 샤넬 레 엑스클루시브 라인의 ‘오 드 코롱’은 ‘그 많고 많은 샤넬의 향수 중에 여태 왜 이걸 몰랐지?’ 했을 정도로 신선하다. 톡 쏘는 레몬 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러운 살냄새로 변한다. 햇볕에 잘 건조된 코튼 같기도 한 이 향은 가격이 비싼 만큼 고급스럽고 단아하다. 만약 남자가 이 향을 뿌렸다면 “오, 이 남자 뭐지?” 하며 한 번 더 돌아볼 듯. 

조 말론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역시 계속 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릴 정도로 기분 좋은 향. 마치 꿀을 물에 희석해놓은 듯 달달한 밍밍함, 잔향에서는 소금기를 머금은 신선한 바다의 공기를 맡을 수 있다. 신기한 건, 체취와 섞였을 때 비린 느낌 없이 오히려 아기 냄새처럼 순수하다는 거(내 맘대로 이름 붙이자면 ‘어른용 베이비 향수’ 정도?). 바비 브라운의 ‘배스’는 이름처럼 목욕 후에 날 법한 개운한(?) 향이다. 달짝지근하면서 섹시한 샴푸 향은 이성에게 어필하기 좋은 향인 한편, 물 향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좀 강할 수도 있겠다. 마지막은 의외일 수 있는데, 디올의 클래식한 남성 향수 ‘오 소바쥬’의 코롱 버전이다. 달달하지 않은 시트러스 향으로, 처음엔 레몬과 남자 스킨 향이 나서 독한가 싶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레몬 비누처럼 청초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잘 다린 셔츠 같은 향.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선물할 테다)! 

CHANEL 오 드 코롱 200ml, 39만원. ANNICK GOUTAL 릴 오 떼 오 드 투왈렛 100ml, 20만2000원.  BOBBI BROWN 배스 오 드 투왈렛 50ml, 8만원대. FRESH 라이프 오 드 퍼퓸 100ml, 15만5000원대 

자연에 가까운 향도 여름에 뿌리기 좋다. 프레쉬의 ‘라이프’는 싱그러운 자몽 향으로 시작해 정원에서 불어오는 은은한 바람 냄새가 남는다. 향이 옅어서 다른 향수와 레이어링 시 베이스로 사용할까 한다. 또 프레데릭 말의 ‘비가라드 꽁상뜨레’는 붕 뜨지 않은 진중한 오렌지 향으로, 섬세한 취향을 지닌 남자가 떠올랐다. 씁쓸한 오렌지 껍질과 녹색의 이파리 향에서 어떤 칼 같은 면이 느껴진달까? 마지막 주자는 에르메스의 ‘떼르 데르메스 오 뜨레 프레슈’. 베스트셀러인 떼르 데르메스가 대지의 포근함이라면 이건 차가운 흙의 내음이다. 스타일리시한 남자나 남자 옷을 즐겨 입는 여자 모두한테 세련되게 어울릴 듯(페로몬 향수처럼 묘한 섹시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건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