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땅을 사고 싶다거나, 당장이라도 내려가 살고 싶다는 농담 섞인 진담이 성행 중이다. 그만큼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 로망의 땅으로 떠올랐다. 이곳 제주에 또 하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술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또 다른 제주의 풍경이 그것이다. 제주 예술마을의 원조 격인 저지문화예술인마을과 얼마 전 문을 연 GNG 아트 빌리지. 올레길로부터 불기 시작한 걷기 바람이 머지않아 이곳에도 당도하게 될 것 같다는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 무엇보다 아직은 육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제주의 진정한 쉼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 공간과 지역에 예술을 끌어들이는 일. 파주 헤이리를 비롯해 한남동, 서촌 등 소외된 공간에 예술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새로운 변화로 가는 정식 코스처럼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오지 중의 오지. 제주 예술마을의 시작 역시 그러했다. 한경면 저지리. 제주 여행을 많이 해본 이들에게조차 낯선 이곳. 제주공항에서 1시간여 거리에 위치한 저지리는, 바다 앞 카페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애월읍 인근의 아주 조용한 마을이다. 어찌나 조용한지 숲 속에 들어앉은 마을(집) 같다 할까? 

1, 5 본관과 분관으로 이루어진 제주현대미술관은 김흥수 화백의 특별 전시실과 상설 전시실, 야외 공연장, 야외 조각공원으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2, 3 서예가 현병찬의 작업실 겸 갤러리인 ‘먹글이 있는 집’. 4 붓을 잡은 지가 60년 가까이 됐다는 현병찬 선생은 여전히 하루 5~6시간씩 작업에 매진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이곳 

“이곳 저지리에 예술마을이 조성되고, 처음 이사한 사람이 바로 저예요. 그 당시 엔 나 혼자 사는데 왜 가로등을 켜느냐고 오히려 제가 말릴 정도였어요.”(웃음)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는 서예가 현병찬 선생. 그 역시 퇴직 후 고향인 이곳 제주에 자신의 작업실 겸 서예 갤러리를 열었고, 그곳을 ‘먹글이 있 는 집’이라 이름 붙였다. 

저지리. 그 이름에서부터 벌써 오지의 역사가 읽히는 듯하다. 오름에 닥나무(楮: 닥나무 저)가 많아 저지(楮旨)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현무암질 자갈과 바위로 뒤덮여 경작지보다는 마소의 방목지로 쓰였고, 제주에서도 문명의 혜택을 가장 늦게 받은 지역이다. 제주에서도 깡촌으로 통하는 이곳 저지리 마을에 변화가 일 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무렵이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이곳 북제주에 예술마 을을 조성하기로 한 것. 물론 제주시에서 지원을 했고, 군 소유의 목장이 있던 31 만 m²(약 9만5000평) 규모의 부지가 그 발판이었다. 2003년을 기점으로 제주 는 물론 전국의 예술인들이 속속 입주하면서 마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현병 찬 선생이 이곳의 용감한 첫 입주자가 되었다. 그는 365일 이곳에서 구경 온 손 님들을 맞으며 예술마을 촌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낮에는 손님들 이 찾아오기 때문에 작업이 힘들고, 저녁 먹고 밤 8시가 되면 붓을 잡지요. 5~6 시간 작업 후 새벽 2시에 잠들어 아침 8시면 또 문을 열어요.” 사정이 그렇다 보 니 제주시에 있는 집으로 이동하는 대신, 2층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됐단다. “서 예를 배우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배우기도 전에 비용부터 묻는데, 돈은 따지지 말고 먼저 공부부터 하라고 하죠.” 현재 이곳에서는 토·일·월요 일 반의 서예 클래스가 운영 중인데, 일단 배워보고 할 만하면 그때 돈을 많이 내 면 된다고 선생은 웃는다. 이쯤 되면 생기는 의문 하나. ‘제주시에서 지원금이라 도 받는 거겠지?’ 묻기가 무섭게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사 정을 모르는 이들은 왜 예술가의 공간을 관광객에게 오픈하지 않느냐고, 상주하 지 않는 예술인이 왜 이리 많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곳은 파주 헤이리 와는 완전히 달라요. 물건 파는 곳 하나 없어요. 아주 조용하죠. 헤이리가 상업적 인 목적의 예술마을이라면, 이곳은 말 그대로 예술인을 위한 거주 공간이에요.” 마을 사람과 더불어 사는 예술인의 거주 공간이자 영감의 산실인 이곳. 저지문화 예술인마을이 여느 예술마을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인 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도 선정되었어요.” 그러니 이곳 예술마을을 단순한 경제 논리로 해석해서 는 안 된다고 그는 덧붙인다. 또 그는 자신의 ‘먹글이 있는 집’을 자식에게 대물리 지 않고 기증할 참이라며, 저지리예술마을에 대한 아낌없는 애착을 내비친다. 

6 본관과 분관으로 이루어진 제주현대미술관은 김흥수 화백의 특별 전시실과 상설 전시실, 야외 공연장, 야외 조각공원으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7 감정사 양의숙의 ‘선장헌’ 너머로 제주의 봄이 찾아들었다. 8 여유를 머금은 저지리 마을 풍경.

“2009년 육지 작가를 위주로 한 기획전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때 이곳을 처음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죠.” 저지리의 수 문장처럼 마을 초입에 들어선 노리갤러리. 이곳은 화가 이명복과 그의 아내이자 대표인 김은중이 함께 운영하는 갤러리 겸 카페다. 1층은 갤러리와 카페, 2층은 작 업실로 이루어진 노리갤러리는 독특한 건물 외관뿐 아니라 그것을 감싼 정원이 어찌나 아기자기하고 정갈한지 또 다른 자연 전시장에 초대된 듯하다. “저희 둘 이 모든 걸 다 해요. 자연과 같이 사는 즐거움만큼 노동도 해야 하고.” 정원처럼 잘 가꾼 마을 덕분에 매일 산책을 하면 좋겠다는 말에 이명복 작가는 손사래부터 친 다. 산책은 사치스러운 말이라고. 그저 풀을 뽑고 밖에 나가서 할 일을 할 뿐이니, 유유자적 산책이란 단어는 관광객에게나 어울리는 게 아니겠느냐고. “수요일은 공식적으론 휴관이지만, 혹시 들렀다가 문이 닫혀 실망하는 분이 있을까 싶어 항 상 열어두는 편이에요.” 이곳엔 노리갤러리를 비롯해 갤러리가 총 6개 들어서 있 다. 주말에만 오픈하는 박광진 작가의 ‘진갤러리’를 비롯해 현병찬의 ‘먹글이 있는 집’, 조종숙의 ‘글오름집’, 김경의 ‘종이의 집’, 김현숙의 ‘현갤러리’ 등인데, 이곳들 은 모두 오픈 공간이니 기꺼이 발길을 청해도 좋겠다. 

“간혹 레스토랑, 카페, 체험관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어요. 도시화된, 상업 화된 마을을 기대하는 것인데, 이곳은 말 그대로 예술인들이 사는 마을일 뿐이에 요.” 그는 이곳이 그 흔한 관광지가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예술마을은 자연스러 움이 깨지면 안 돼요. 기존 마을과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제자리에 있어야 하 고….” 어촌은 어촌답게,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답게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본질을 무시한 채 어촌이 카페촌으로 변모하는 제주의 또 다른 변화 에 그는 우려를 표했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그 점에서 마을 사람과의 어울림 을 중시하며 느린 변화를 추구하고 있노라고. “노리갤러리 바로 옆에 들어설 김창 열 미술관이 2016년 개관하면 더욱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을 듯해요.” 마을 중심 에 터를 잡은 제주현대미술관에 이어 내년 오픈을 준비 중인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의 미술관이 문을 열면 진정한 예술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듯하다. 예 술마을의 든든한 터줏대감인 제주현대미술관을 주축으로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 서보 화백, 극사실주의 회화의 대표 주자 고영훈 화백, 조각가 박석원, 감정사 양 의숙, 중국 작가 펑정지에까지. 아티스트 30여 명이 예술마을을 든든히 채우고 있 다. 물론 이들이 항시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영감을 얻는 개인 아틀리에로, 운 좋은 날이면 직접 만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아틀리 에 내부는 비공개지만, 작가의 감성이 담뿍 담긴 아틀리에 공간과 제주의 자연으 로 곱게 단장한 그들의 정원 풍경 속에서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읽히는 듯하다. 

미술관과 아틀리에를 돌아 산책길을 조용히 걷다 보면 대여섯 시간이 훌쩍 흐른 다. 자연 속 시간이 멈춘 곳. 어쩌면 저지리는 ‘예술마을’이라는 거창한 이름 대신 자연이라는 커다란 품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누군가와 발맞추어 걸을 수 있는 ‘시 간 여행자를 위한 마을’이라 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초입에 들어선 노리갤러리. 내부는 물론 야외 정원까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 속 전시장 같다. 

9  역시나 제주답게 마을 곳곳엔 돌 조각이 자리한다. 10  노리갤러리 대표 김은중과 화가 이명복. 11 중국 현대미술 거장 펑정지에의 아틀리에로, 이곳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의 첫 해외 입주 작가다. 

12 예술마을의 터전을 다지는 데 일조한 제주현대미술관의 전시장. 현재 이곳에서는 원수열 작가의 <분출하는 구도>전이 5월 10일까지 열리며, 상설전으로 김흥수 화백 특별전이 마련되어 있다. 13 자연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을 마을 어디에서건 즐길 수 있는 저지리. 한옥과 어우러진 운치 있는 산책길을 따라, 세상의 기계음이라곤 전혀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초록의 산책길이 마을 둘레를 돌아 이어진다. 

14 적동을 재료로 한 장정은 작가의 ‘해파리’. 15 한문섭 작가의 ‘Jeju Island’. 16 고장난길 프로젝트에 참여한 금속공예 작가들.

17 이성식 작가의 ‘길을 걷다’. 작가는 1년에 단 며칠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신비한 김녕의 두럭산과 제주 바다의 물고기를 금속 작업을 통해 물 밖으로 꺼냈다. 18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김녕의 해녀를 원더우먼으로 표현한 남현경 작가의 ‘Wonder HaeNyeo’. 

금속공예와 손잡은 김녕마을 

저저리의 가장 반대편. 구좌읍에 자리한 김녕마을에도 흥미로운 미술 바람이 불어닥쳤다. <GNG 아트 빌리지_고장난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제주 방언으로 ‘고장’은 ‘꽃’을, 난은 ‘핀’을 의미하는데, 즉 고장난길이란 ‘꽃이 핀 길’을 뜻한다. 이곳 역시 저지리와 마찬가지로 제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물며 땅도 척박해 감자와 당근이 아니면 재배하기 힘들 정도.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한 이곳 김녕과 손잡은 고장난길 프로젝트. “김녕은 원래 쇠가 많이 나던 동네로 이번 예술 프로젝트에 금속공예를 접목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주시와 협업해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다시방 프로젝트 김세희 실장.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이 고령이고, 보수성이 강한 특유의 지역 특성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난관도 있었지만, 작품이 마을 본래의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고장난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숙제는 어촌 마을과 금속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소재를 어떻게 잘 융합할 것인지였다. 작가들 역시 기존 마을의 풍경을 해치지 않고 마을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작품에 중점을 뒀다. 마을 주민을 만나 작품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고, 그렇게 1년여 걸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4월, 오랜 시간 끝에 탄생한 작가 17명의 작품이 김녕마을의 담벼락으로, 방파제로, 마을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김녕에 불어오는 대자연의 바람과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구조물 비행기를 통해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이야기한 엄중호 작가의 ‘바람과 바람’, 겨자색을 띠는 제주 이끼의 독특한 특성을 살린 장정은의 ‘해파리’ 등 제주에서 생활하며 보고 느낀 김녕의 숨은 풍경과 이야기들이 작품에 내재해 있다. 이 숨은 이야기를 담은 ‘고장난길’은 김녕마을이 시작되는 올레 20길을 기점으로 성세기 해변까지 총 3km에 걸쳐 펼쳐진다. 마을 곳곳에 숨은 작품을 보며 산책하는 길, 거친 바다 냄새가 느껴지는 해녀 할머니와 느긋하게 배를 깔고 누운 게으른 개 몇 마리도 함께할 것이다. 

산책 후 티타임을 가볍게 즐기고 싶다면 ‘다시방 프로젝트’에 들러볼 것. 이곳은 제주의 버려진 현무암과 재활용품을 이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금속공예 작업실인데, 주말엔 카페로 활용되며 금속을 이용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화려한 볼거리와는 거리가 먼 김녕의 예술마을엔 왁자지껄한 즐거움은 없다. 분명한 것은 곰살맞고 때론 억센 제주 자연의 날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주 자연의 성질을 빼닮은 금속공예와 함께 말이다. <고장난길>은 이번 1차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2차, 3차 프로젝트가 이어질 예정이니, 김녕 예술마을의 다채로운 변화를 기분 좋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