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 앞 작은 과실나무들 사이에 못 보던 백호 한 마리가 며칠째 서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본 아파트 앞 주차장은 차가 몇 대 없어 한적하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갔다. 꽁무니에 벨로스터라 적혀 있던 그 차는 볼때기 쪽에 커다란 발톱 같은 걸 붙여놨다. 차체가 낮아 과속방지턱이나 제대로 넘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 범퍼 밑이 너덜너덜하다. 펜더 주위에 초록 물감이 튄 그림도 그려져 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깐이다. 이내 조잡함으로 결론이 난다. 뒷유리는 영어 이니셜 스티커들로 어지럽다. 동호회 이름인지, 자동차에 장난쳐놓은 사람 이름인지. 빨강, 노랑, 형형색색의 낙서장이 따로 없다. 서툰 손놀림으로 사력을 다해 건담을 조립하고 색칠하는 미취학 아동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렇게 큰 장난감을 가지고 붙였다 칠했다 노는 사람도 키덜트라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며칠 뒤, 문제의 벨로스터 주인이 차 주위를 맴돌며 통화 중인 모습을 목격했다. 차주는 연신 자신의 차는 야수 같은 성능을 지녔다며 수화기 너머 지인에게 자랑했다. 어젯밤에 뭔가를 땄다며 열변을 토하는데 그게 뭔지는 자세히 못 들었다. 상기된 표정은 어린 시절 남동생이 오락실에서 ‘철권’으로 동네 형을 무찌른 승전보를 전할 때의 그것과 유사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삑’ 소리와 함께 자동차 문이 열리자 나도 모르게 백호 주인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돌렸다. 팔뚝에 볼기를 축 늘어뜨린 불도그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가래를 끓어 올리고는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 날렸다. 차에 오르고 시동을 걸자마자 쏜살 같이 속도를 높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날 이후로 양아치 자동차엔 미성숙 양아치가 타고 있을 거라는 나의 보수적 가치관이 더욱 공고해졌다.

윤별(28세, 간호사)

나는 대학생이다. 면허는 있지만 차는 없다. 그래서 차는 운전보다는 보행 중에 많이 접하는데, 그때마다 꼴불견이라고 생각되는 차가 눈에 띄어 거슬린다. 바로 오래된 차에 튜닝을 휘황찬란하게 하고 선팅도 진하게 한 차다. 검은 선팅 위로 비치는 알록달록한 LED 불빛은 금요일 밤, 환락의 거리(?)를 밝히는 네온 사인 같다. 그런 차를 보면 누구나 튜닝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할 터다. 더군다나 촌스러운 디자인에 아무리 색색으로 덧칠해봤자 안 좋은 차를 더욱 없어 보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튜닝은 바로 엔진 배기음 튜닝이다. 엔진 소리를 부러 더 크게 나도록 개조한 차의 소음은 멀리서 들어도 절로 한숨이 난다. 옆으로 ‘쌩’하고 지나가면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점입가경으로 굉음에 3~4초간 귀가 먹먹해진다. 듣기 싫은 것은 물론이고,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커지는 소음에 ‘혹시 저 차가 나를 못 본 채 치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한번은 새벽에 ‘위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F1 경주차처럼 지나가는 차 때문에 선잠에서 깬 적이 있다. 가뜩이나 불면증으로 늦게 잠을 이루는데 불청 알람(?)에 잠을 깨면 이불을 걷어차고 끓는 열을 식힌다. 몽롱한 정신에 욕지거리를 퍼부어야 다시 잠이 온다. 파자마 차림으로 나가서 차를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답답하면 고속도로에서 달리시든지. 우리나라 모터스포츠 산업이 발전하고 서킷이 늘어야 일반도로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차가 줄어들까?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기간산업 발전을 기원한다. 그대들의 열정은 우리 집 맞은편 도로가 아닌 서킷에서 불사르길.

김유림(25세, 대학생)

대학교 신입생 때 얘기다. 선배들의 넘치는 사랑이 담긴 소주잔을 받는 족족 비워내던 시절이었다. 술자리에서 선배와 나는 얼큰히 취했었다. 평소 자동차를 좋아하던 선배가 내 팔을 낚아채 끌고 가더니 나를 차에 태웠다. 범법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두고 있던 선배여서 뿌리치지 못하고 차에 앉았다. 차를 몰며 교정을 따라 돌던 선배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속페달을 불규칙하게 밟았다 뗐다. 앞뒤로 출렁이는 차가 롤러코스터 같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흥분해 경음기를 누르고 운전대를 이리저리 꺾어댔다. 놀라 기겁하는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 날은 8월 15일.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왕년에는 광복절 오토바이 폭주족이 9시 뉴스를 장식하곤 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오토바이 다섯 대 앞에서 선배는 지그재그로 운전하며 알짱거렸다.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선 오토바이 옆에 차를 바짝 붙여 위협하고 경음기를 짓누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양아치들아!”라고. 양아치가 양아치에게 소리를 질렀다. 잇따른 조롱에 화가 난 라이더들이 증원군을 불렀는지 한 무리의 오토바이가 더 붙었다. 위험을 감지한 선배는 곡예를 멈추고 있는 힘껏 꽁무니를 뺐다. 

기적처럼 나타난 경찰차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망칠 수 없었을 거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마다 비명을 질러댄 나는 술이 완전히 깬 채로 집 앞에 도착 했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후로 다시는 그 선배의 연락에 답하지 않았다. 보복성 급정거, 아슬아슬한 똥침(?) 운전도 너그럽게 웃어넘길 만큼 어릴 적 선배가 한 난폭, 불량 운전의 면역력은 강렬했다. 현란한 LED도, 우렁찬 배기음도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양카’가 아니라 ‘귀요미 차’로 불려야 마땅하다. 내가 만났던 양아치에 비하면 말이다.

이아름(26세,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