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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流行_Stars&People

한국 영화의 역사, 신상옥

누구든 감독 신상옥을 안다면 그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한국 영화의 역사라 말한다. 자신이 곧 영화라 자처하는 영화 광인의 삶은 2006년에 끝났고, 4월에 10주기가 된다. 그만큼 잊힌 신상옥 감독의 이야기를 영화인들에게 물었다. 막연하고 아픈 일이었다.

2016.04.11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나는 신상옥 감독을 안다. 기억한다. 선글라스에 빗어 넘긴 조금 긴 머리, 실크 스카프와 단정한 재킷. 나는 단박에 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1990년대 <남북의 창>인지 <아침마당>인지 뉴스 자료마다 자주 등장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신상옥, 아니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모습은 아주 또렷하다. 아침마다 아버지가 창을 열고 텔레비전을 틀고 등을 긁어주면 눈곱을 떼면서 봤던 어떤 영화인의 이야기. 20년 전에 박제된 듯이 땅에서 두 발을 약간 띄우고 사는 한창 시절을 보낸 예술가의 현재. 북한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놀라운 이야기. 무엇으로도 더 도드라지기 힘든 그들의 화려한 과거….


하지만 그만큼 막연하다. 2006년 4월 고인이 된 그는 이달 서거 10주년을 맞는다. 그새 지금 한국의 30대만 돼도 그의 이름조차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영화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을 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사람들이라 치자. 하지만 이미지 몇 컷이나 단상에 대해 고민할 때 지인에게 그에 대해 물으면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물어야 하는 인물이 신상옥이었다.


반응은 두 가지다. “누구라고?”“아, 그 사람을 지금 왜 다뤄야 하는 거야?” 혹은 “아이들이 누구였지?” 그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모른다. 그의 자식들을 알 뿐. 보다 객관화된 단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전화를 받아줄까? 혹은 이런 의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것 같은 가족사. 우려는 무엇으로 걷어야 할까.


‘우리는 왜 지금 신상옥을 알아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판단은 보는 이의 몫으로 돌리고 싶다. 담담히 지금 세대에게 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수집했다. 정확히는 모래알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기 중 무작위 채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오로지 영화밖에 몰라서 가족에게는 냉랭한 뒷모습밖에 남지 않은 인물이지만,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 바로 보고 싶었다. 그토록 유명한데 왜 정작 우리 세대에게는 시꺼먼 선글라스를 낀 노부부의 토크쇼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는지. 일련의 프로필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우리 영화사에 너무나 강한 인상과 성과를 남겼기에 추앙하거나 과장할 이유가 없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악야 (1952)
감독의 데뷔작이다. 26세의 젊은 신 감독은 당시 오로지 감독으로서 독립하기 위해 가족의 재산을 털어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스토리는 그렇다. 내일까지 방세를 내지 못하면 쫓겨날 신세에 놓인 소설가 황철이 옛 제자인 양공주 이민자를 만난다, 통금 시간에 걸린 황철은 부득이 그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를 기다리다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옆집으로 이사를 온다. 하룻밤의 이야기로 당시 전후 시대상을 그렸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각색해 만들었다. 내외하는 어른들의 미묘한 감정 대결과 전후 미망인들만 남은 시대를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비춘다. 여성으로서 욕망을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인 전통적 여인상을 요구하던 시대에 전후 급증한 미망인들에게 재혼을 금기시하지 않는 세상의 변화를 보여줬다. 이 작품은 1960년대 성행한 문예 영화의 정점을 이룬 작품으로, 자타 공인 그의 대표작이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상록수 (1961)
<상록수>는 작가 심훈의 소설이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청년들의 농촌계몽운동을 그렸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대량 복사하여 공개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한다. 또 ‘새마을운동’의 모델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이 영화로 정부의 비호를 받는 시기를 보냈으나, 신 감독은 점차 심해지는 검열에 반대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연산군(1961)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조명했다.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소재로 다뤄지고 있지만 당시 신상옥이 연출한 연산군은 역대 가장 화려함을 뽐냈다. 의상과 소품 역시 마음에 차지 않으면 실제 문화재를 가져다 썼다고. 각 캐릭터가 가진 성장과 변화의 이유를 심리적 원인을 찾아 묘사하는 데도 집중했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성춘향(1961)
1961년 <성춘향> 개봉 당시 홍성기 감독의 <춘항전>(김지미 주연)이 나와 화제를 불러 모았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을 신고한 것뿐 아니라 두 감독은 각각 당대 유명 배우이자 아내에게 춘향 역을 맡겨 대결 구도를 보였다. 흥행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앞섰다. 국내 성공 외에도 일본 수출, 아시아영화제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됐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빨간 마후라(1964)
배경은 한국전쟁이다. 남성적이면서도 신사적인 공군의 활약상을 그렸다. 당시 상투적인 반공 의식이나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한 드라마를 구사하기보다는 인물 각각을 부각하는 데 힘썼다. 극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남자들의 우정, 의리,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우회적인 반전 의식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한국영화사상 본격적인 항공 영화의 효시로, 당시 일반 영화에 쓰이는 필름의 4배인 8만 자를 썼다.

 

 

225편을 만든 제작자, 66편을 만든 감독
1952년 스물여섯 살에 영화 <악야>로 데뷔한 신상옥은 일생 동안 제작자 이름으로 225편, 감독 이름으로 66편의 영화를 만들고 제작했다. 2006년 4월 작고하기까지 주요 매체에서 그의 행적을 문화 면보다 정치나 사회 면에서 꾸준히 다루었다. 신상옥은 ‘납북 체험자’다. 그 영화의 헤로인이자 아내인 최은희와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유일하게 두 나라를 넘나들며 영화를 만들고 찍었다. 또 할리우드까지 진출해 흥행한 한국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수많은 수상과 최초의 기록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혹은 그 시대를 잊고 싶은 지금 세상이 굳이 알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작한 옛날 감독이라는 의심은 일단 걷어내도 좋다. 그가 활동한 1960년대 전후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안다면 말이다. 당시에는 국내 영화(방화라 낮춰 부르던 작품)를 일정 작품 수 이상 제작·공급해야 해외 영화를 수입해 개봉할 수 있었다. 수익은 남의 나라 것이 더 나았다. 그래서 영화사는 조금 깊이가 없더라도 다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신상옥도 그런 풍토 속에 선 인물이었고, 실제로 그가 죽기까지 만들어보지 않은 장르가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다작했다. 많았고, 그래서 묻혔다.


그로 인해 ‘미대 출신’ 신상옥이 얼마나 영화의 빛과 색감에 민감했으며 사회상을 반영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신상옥의 섭섭함은 저서 <나는 영화였다>에도 간간이 드러난다.


“(…) ’개발도상국의 영화 예술가들은 30% 정도는 현실 기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왔고… (…)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영화에는 흥미를 넘어선 인간 승리, 정의, 사필귀정 등의 당위적인 진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신필름과 충무로로 나뉜다. 그랬다. 1952년 신상옥 프로덕션으로 시작한 그의 영화사는 1961년 신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전성기를 맞는다. 영화사 ‘신필름’은 지금도 보기 드문 거대 규모였다. 현재 많은 영화 기획사가 10여 명 안팎의 인원으로도 움직이고 있는데, 당시 신필름은 ‘유급 직원’ 200여 명이 1970년 문을 닫을 때까지 10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설립 초기에는 작품이 없어도 월급을 받는 시스템을 갖추고 시도했다. 당시 신필름에 근무했던 제작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신필름 공채는 요즘으로 치면 삼성 공채에 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청년이 아니라 영화를 하며 집 사고 결혼도 하는 모습을 꿈꿀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다.” 비록 월급제는 1년 남짓이었지만 이후 일어난 변화는 그 의미가 크다. 오늘날처럼 프로듀서가 일정한 예산을 마련하고 영화를 기획하고 책임지는 제작 시스템이 자리 잡은 것도 신필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시대에 포박된 영화인  
하지만 1960년대는 박정희 군사 정권 시대다. 상황은 신상옥을 두 가지 시험 앞에 놓았다. 그는 스스로 중립적으로 사회를 봐야 할 시대의 일원임을 자처했다. 영광이 곧 족쇄인 시대. 박정희는 그의 영화 <상록수>를 보고 새마을운동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신상옥은 이후 마치 영화 <상록수>가 정부의 조력 아래 만든 것으로 오해받는 것을 우려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조금씩 정부와 부딪히기 시작했고, 결국 1975년 영화 <장미와 들개> 중 3초 분량의 장면을 검열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영화사의 문을 닫고 만다. 어떤 법적 근거도 없었지만, 어떤 이유로도 그럴 수 있는 1970년대의 상황이었다.


“신 감독은 항상 자신을 영화인이라 말했어요. 감독이라 하지 않았죠.” 당시 조연출로 8년을 그와 함께한 이장호 감독의 증언이다. 그런 신상옥에게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은 그 어떤 것보다 큰 형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회는 납치와 같이 시작됐다. 배우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되고, 그를 구하러 홍콩으로 간 신상옥 역시 납치되고 만 것이다. 김정일은 자신이 좋아하던 배우를 납치하고,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까지 납치했다. 신상옥은 5년의 감옥살이 후 풀려나 1983년 신필름을 북한에 세운다.


공산주의의 상황은 그랬다. 군대가 필요하면 엑스트라가 아니라 정말 원하는 만큼 군인을 모아줬다. 강한 바람이 필요하면 헬기를 띄웠으며, 기차 폭파 신이 필요하다면 정말 기차를 폭파시켰다. 죽지 못해 해야 하는 일이라도 무엇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다시 없는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북한 최초의 국제 영화상 수상, 괴수 영화 제작, 해외 로케까지 더는 멈출 수 없는 행진처럼 스포트라이트가 이어졌다.


“나는 영화를 다시 하기 위해 상갓집에 무엇처럼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결국 활로를 찾아 방황하다가 납북까지 되었고, 나의 영화 인생은 북한을 거쳐 미국으로 이어졌다.”


신상옥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황금기 20년 이상을 날려버렸으며, 동시에 한국에서는 ‘빨간 이름’이 되어 매스컴에서 사라진 인물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가 북한을 탈출해 미국을 거쳐 한국에 돌아 오기까지 한국은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1980년대의 급변 속에 가장 예민해야 할 제작자 신상옥은 영화판을 떠나 있었다. 영화계 인사들은 그의 닫힌 10여 년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그때부터 흥행 감독 신상옥의 타이틀은 조금씩 빛이 바랬다고 말한다.


긴 시간을 돌아온 신상옥은 사회문제에 더 집중했다. KAL기 폭파 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나 김형욱 전 정보부장의 실종 사건을 그린 <증발>(1994)은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관객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옛날에 내가 만들었던 영화만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납북, 탈출 등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나는 변했다. 그런 변화가 사람들에게 매우 낯설었던 모양이다.”


<마유미>는 1980년대생들도 기억할 만한 작품이다. 그는 흥행보다는 영화 자체에 더 순수하게 접근하고자 했다. 한국 정부가 영화 제작을 돕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분단국가 안에서 논쟁을 위한 논쟁의 단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파범과 상관없이 당시 중동에서 근무하던 한국 트럭 운전사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꾸렸다. 일본 도쿄방송의 지원을 받아 TV 방송용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한동안 북한 취재를 금지당했다.   

 

영화밖에 모르는 차가운 아버지
이쯤에서 그가 자신을 스스로 영화라고 부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최은희와 같이 탈출했다. 모두가 그의 행적을 ‘납북’이 아니라 ‘월북’이라 생각했던 오해가 풀렸다. 이로써 보이지 않는 감옥은 끝날 줄 알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 정부가 솔깃한 사업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신상옥은 다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남은 신상옥은 한동안 영화를 참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자식들에게는 어쩌면 유일하게 아버지처럼 보였던 시절이다. 신상옥은 최은희와 한 번 이혼했다. 둘 사이에는 입양한 남매가 있다. 신상옥은 최은희와 멀어진 동안 배우 오수미와의 사이에서 남매를 낳았다. 신상옥에게는 평범한 삶을 택한 자식과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은 자식이 딱 반씩 있다. 배우 신승리가 그의 막내 딸이며, 영화감독 신정균이 그의 큰아들이다. 신정균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절절하지가 않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디론가 떠난 아버지는 늘 뒷모습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일만 했어요. 마룻바닥에 필름 조각이 굴러다녔죠. 아버지를 보려면 영화 현장을 가야 했어요. 거기에선 유명 배우에게 호통치며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의 감독이 있었어요.” 후에 둘은 미국에서 만났다. 세상이 신상옥을 영화로부터 떼어놓자 그는 아버지가 되었다. “한국에 있던 동생들이 와서 어머니와 같이 살았어요. 낚시도 하고 나들이도 가는 평범한 삶이 그제야 있었습니다. 청년이 된 내가 아버지껜 무척 어설펐고, 나 역시 늘 부딪히는 시간이었지만 짧게라도 행복했던 때라고 생각해요.” 곁에 머문 아들이 보기에도 신상옥에겐 온통 영화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남편이기보다는 좋은 영화인이자 파트너였어요.” 하지만 그의 평범한 일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대형 시스템에 항상 의구심과 도전 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신상옥은 사무실을 내고 영화를 제작했다. 1992년 <닌자 키드>는 흥행을 거뒀다. 미국 내 1200개 극장에서 상영됐고, 이후 비디오로는 1999년까지 200만여 개가 팔려나갔다. 흥행성을 알아본 디즈니의 빠른 배급 제안으로 성공한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의 거대함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당시 제작비 300만 달러에 미 박스 오피스 6위 성적은 엄청난 ‘수익률 대박’의 상품이었고, 이후 후속작이 연속 두 편 이상 제작됐다. 그래도 신상옥은 불만스러웠고 더 큰 영화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들떴다. 동시에 제작자로서 자신감도 얻었다. 뜻밖의 키즈 영화지만 이면에는 제작자로서 선택한 그의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원래 마련한 제작비는 일생 바라던 영화 <칭기즈칸>을 준비하던 것이다. 언젠가는 꼭 만들고 말겠다는 그의 다짐은 말년까지 많은 기록에 남아 있다.


납북됐던 시절 얻은 병마는 그즈음부터 신상옥 몸의 어디에선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힘을 낼 때는 침묵했다. 신상옥의 지인들은 단순 노환이 아니라고 말한다. 2006년 삶을 다할 때까지 수년간 낯빛을 바꾼 지병이 있었다. 몸이 삭아가든 죽음의 신호를 보내든 말든 신상옥은 영화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신상옥은 끝까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논리를 의심했다. 그럴 듯하지만 영화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남과 다르고 없던 것을 한다고 해서 각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한국 영화의 세대를 초월한 어떤 어른
이토록 심각한 영화 제작자, 말수가 적은 잘생긴 남자, 가족이나 돈에서 자유로운 이상주의자. 신상옥은 또 어린아이처럼 일상을 보는 관찰자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자판기 누르는 일도 재밌어 하던 분인걸요.” 그를 가장 지척에서 봐온 사람은 정선민 감독이다. “오늘 최 여사(최은희)가 돈을 줬다고, 자판기 음료수 한 번 눌러보자며 웃던 분이에요. 항상 사람들이 모셨으니까 그럴 수도 있죠. 밥 먹자 하시고는 밥값은 안 내요. 흔히 한국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밥값 내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의 생각을 의식하지 못한 거예요. 좋아하는 국수를 한 그릇 아주 빠르게 드시고는 그냥 자리를 일어나 나가버리는 그런 면이 있었죠.” 정 감독은 최은희 교장 선생님 아래 안양예고 영화과를 나온 사람이다. 신필름을 거쳐 광고 감독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1980년대 영화계가 어려워지면서 광고에 진출한 영화인들이 요즘의 기업형 광고사의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축은 신필름 출신들이었다. “고교 시절 봤던 두 분의 모습은… 그냥, 와! 할 수밖에 없어서 뭐라 기억이 나지 않아요.”


후대에, 우리가 드디어 알기 시작한 영화감독들은 그를 이렇게 평한다. 2010년 신상옥을 주제로, 사실은 한국 영화계 감독 세대 간의 소통을 논했던 좌담회를 신상옥기념사업회에서 열었다. 이장호 감독의 주제 아래 봉준호와 장진, 강우석, 이용주가 답했다.


이용주 감독과 장진 감독은 지면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많이 봤다고 말한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다. 미국에서 신상옥 감독이 귀국할 때쯤 그런 유명한 감독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가 납북을 당했고 이런저런 고초를 겪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 중 봉준호 감독의 말이 신상옥 감독에 대한 우리 세대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해준다.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거나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할 때 교육한다는 개념으로 봤죠. 실제로 신 감독님을 뵌 것은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으실 때였어요. 제가 <살인의 추억>으로 수상하게 되어 참석했습니다. 최은희 여사와 무대에 등장한 것을 먼발치에서 뵈었죠. 인상적이었던 것은 몇 분간 기립 박수가 끝나고 다들 앉았는데도 2층에 계신 신성일 선배는 신 감독님이 퇴장할 때까지 서 계시던 모습이에요.”


지금 신상옥 감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확연히 멀어졌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영화 프로듀서조차 그를 아는 사람은 만 55세 이상 영화인 그룹에 국한된다고 언급했다. 이른바 ‘선수들’이라 불리는 최근 한국 영화 감독들이 영향을 받고 선호한 작품은 배창호 감독 시기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신상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을수록 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 할 많은 것이 떠올랐다. 마치 늘 담겨 있던 국을 휘저었을 때 나도 몰랐던 재료들이 둥둥 떠서 큰 소용돌이처럼 보일 때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할지, 혹은 밑바닥 찌꺼기까지 담아야 할지 뭔가 막연하게 고민해야 하는 찰나의 연속이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경외한 미지의 아티스트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할 수 있겠다. 다양한 장르를 했으되 스쳐 지나간 장면은 없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구도의 화면을 항상 잡았고 색을 화려하게 밀어냈다. 지금보다 어쩌면 더 현대적인, 남성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여성이 있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이다. 특히 화면 구도에 대한 실험성은 전편을 보면서 알 법한 시도가 보인다. 정면에서 소실점을 향해 보는 서양식 구도가 흔히 영화라는 틀의 기본으로 알고 있지만 신상옥의 눈은 사선에서 본다. 조금 비켜서 넌지시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완결된 스토리를 갖추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여기에서 인내심이란 흥행을 위해 고저를 함부로 높이지 않고 서정적인 주인공의 고뇌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1960~1970년대 신상옥의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나 시대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영화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 제작자로서 그의 업적 중 하나로 이렇게 말할 정도니까. “좋은 시나리오만이 완벽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잘 쓰는 작가에게 당시 평균 고료의 다섯 배를 줬다. 어떤 작가든 깍듯이 대했고, 충분한 대우를 하니 잘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그의 인간적 면모에 대한 생각과 비판을 듣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다. 많은 지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을 기다려서 다시 봐야 할 신상옥이다. 그의 아내이자 영화 파트너, 배우 최은희는 지금 시간과 노환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만날 수 없었다. 가장 최근 모습 중 당당한 대배우의 풍모는 다른 나라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다. 영국 감독 로스 애덤과 롭 캐넌이 제작한 94분짜리 <연인과 독재자>에서. 김정일의 육성을 들을 수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2016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신상옥의 삶에 꽂힌 영국인이 이들 가족을 2년간 설득해 만든 시간이 각별히 보인다. 또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는 4월 9일 종로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클래식극장에서 ‘신상옥 감독 10주기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 일주일간 회고전도 열 예정이다.


어쩌면 몇 년 뒤에는 신상옥을 둘러싼 사생활에 대한 뉴스가 묻힐지 모르겠다. 오로지 영화에만 바친 그의 삶을, 연인에게 솔직했던 감정과 세상의 눈을 무서워하지 않은 당당함을 빛바래게 한 것은 아닌지. 만약 살아 있다면 자문해봤는지 물어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신상옥은 알아도 감독 신상옥은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신상옥을 모른다.   

 

 

 

ⒸKorean Film Archive, ChunMa Director Sheen Sangok Memorial Foundation

 

 

“언젠가 광화문 국제극장이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최고의 시설에 흥행도 잘되던 극장인데, 신필림에 구매 제안이 왔다. 자체 개봉관도 절실하던 때다. 하지만 그는 그 돈으로 대규모 소품 창고를 지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설 투자가 더 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반 상식이나 윤리, 도덕 등의 잣대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그만 한 영화인은 상당 기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 황기성 영화제작자 (신상옥 감독 저서 <나는 영화였다> 회고 중)  

 

“아버지는 내가 영화 하는 것을 반대했다. 당신만큼 몰두하지 않는다고 보셨을 것이다. 옷이며 색감에도 민감해서 어머니가 입고 나가는 옷까지 일일이 스타일링을 해야 바깥을 나섰던 분이다. 늙어서도 늘 새로운 영화 기술이나 이론에 대한 책을 화장실 변기 앞에까지 두고 사는 사람이니까. 감독이 되고 보니 선배로서 신상옥은 최고의 감독이다. 신상옥 감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감독이냐 제작자냐. 하지만 신상옥 스스로는 명확했다. 어디서든 ‘나 영화인이오’라고 말했다. 영화 <징기즈칸>만 제외하면 원 없이 하고 싶은 영화를 다 한 감독이다.” - 아들 신정균, 영화감독

 

“신 감독은 스타성이 있었어요. 무척 잘생겼고 실크 스카프와 단정한 재킷, 2~3개 풀어둔 단추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었죠. 그런 옷을 입고도 현장에선 보란 듯이 진흙탕으로 몸을 던져서 모두를 압도했습니다. 자나깨나 영화만 생각하는 사람이죠. 그분 성격이 차가운 사람이에요. 따뜻한 사람은 아녜요. 그게 카리스마와 연결됩니다. 곰살맞은 면이 일체 없어요. 정말 부러웠던 건 신상옥 감독은 오로지 영화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랬죠.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자기 중심적인 에고이스트예요. 다른 사람이 그 틈을 파고들 수가 없어요. 철저히 무장된 사람이라 부러웠습니다. 그는 영화를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영화는 그냥 영화라 불렀죠. 산업으로도 보지 않았고요. 그를 보면 지금의 내 인생이 너무 사치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장호 영화감독

 

“그는 정말 훌륭한 영화인이자 감독입니다. 오로지 영화밖에 모르고, 영화로 얻은 수익은 새로운 영화에 다시 투자했습니다. 돌아가시고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겨준 게 없지요. 그의 기념관을 만들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픕니다.” - 아내 최은희, 배우

*배우 최은희의 지난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와 아들 신정균 감독에게 동의를 얻었습니다. 

 

“신상옥 감독님 같은 분은 정말 구름 위에 있는, 영화학교 입시 공부를 할 때나 한국영화 책에 나오시는 분들이니까 피안의 세계에 있는 분들 같았습니다. (신상옥기념사업회 계간지 창간 기념 좌담회에서) - 봉준호 영화감독

CREDIT

EDITOR / 김미한(프리랜서 에디터) / PHOTO / 東方流行 / 東方流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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