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기
  • 페이스북
  • 인스타그램

東方流行_Stars&People

정기용 그리고 서울

도시는 한 생애의 미세한 층위만큼 조금씩 두꺼워진다. 건축가 정기용은 건강하고 섬세한 건축과 투철한 교감의 언어로 자신의 전 인생을 서울에 각인시켰다. 그의 자취를 따라 서울을 거닐면 이 도시의 비밀스러운 진실을 만날 수 있을까? 그 길이 풍성할 수 있도록 건축가 조성룡과 동행했다.

2016.03.02

 

2009년, 명륜당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정기용을 사진가 김재경이 담았다.

 

 

 

 

1 사계가 깃드는 명륜당 앞마당은 명륜동에 살았던 정기용이 즐겨 찾던 곳이다. 같은 자리에, 그의 벗이자 건축가 조성룡이 앉았다. 2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학문 정신의 전당, 명륜당

 

 

명륜동 그리고 명륜당
건 축가 정기용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13년 동안 명륜동에서 살았다. 평생 스물두 번 이사를 다닌 그에게 명륜동은 인생의 마지막 거주지가 되었다. 명륜동을 참 좋아하던 그였다. 햇살이 잘 드는 다가구주택 5층의 작은 집은 따스한 안위가 되어주었지만, 그가 각별히 애착한 건 명륜동을 둘러싼 풍경이었다. 작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오후의 낙산, 커튼 너머로 펼쳐지는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도시 풍경을 자신과 ‘함께 사는 것’으로 여기며 사랑스러워했고, 북악산에서 뻗어 나온 낮은 뒷산, 종묘와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이 맞닿는 와룡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전경, 성벽 길을 오르며 오래된 서울의 한 귀퉁이를 바라보는 것을 ‘명륜동에 사는 사람의 특권’이라 여겼다. 주변 공간을 자신의 고유한 리듬과 연결하는 삶. 따라서 정기용에게 동네는 거주의 또 다른 영역이 된다. 그는 <서울 이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주변의 공간들을 내 자신의 고유한 리듬으로 네트워킹하면서 사는 데 익숙해졌고, 그것이 나의 삶의 방식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명륜동 일대는 나의 거주 방식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데 적절한 동네인 듯싶다. 나는 집 안에 있을 때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거주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따라서 내가 현재 주소지로 두고 있는 집에 있어서 안팎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내가 의지로 이동하고 머무는 곳이 나의 집이고 나의 삶이다.”


정기용은 새벽이든 낮이든 산책 삼아 성균관 명륜당을 자주 찾았다. 집에서 10분을 걸어서 만난 명륜당 앞마당은 그의 사계절 벗이었으며, 호젓한 정원이었다. 하나의 집을 ‘동네나라지구우주’로까지 확장해서 반추했던 그에게 명륜당은 명륜동 집으로부터 연결된 관념적인 사적 공간이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만물과 교감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난생처음이라 더욱 긴장된 걸음으로 성균관 명륜당에 도착했다. 문득 명륜당이 명륜동에 참으로 근사한 동네 이름을 선사했음을 떠올린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숨을 고르고 마주한 명륜당의 모든 풍경은 시공간을 초월한 낯선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500년 묵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의 신화 같은 위용, 그 곁으로 흩어져 있는 몇 그루의 단풍나무를 명륜당 양쪽 동재와 서재의 나직하고 정갈한 건물이 감싸 안고 있었다. 햇살은 나뭇잎들을 찬란하게 반사하며 쏟아져 내려왔다. 이 찰나의 아름다움과 상관없이 분주하게 걸음만 재촉하는 학생들 사이로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건축가 조성룡이 나타났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명륜당 마당을 매일 가로질러 다닌다 했다. “1년에 단 한 번 잎이 반쯤은 나무에 걸려 있고 절반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 그때의 풍경이 가장 멋져요.” 그는 한 시절을 가장 가깝게 지낸 동료이자 벗인 정기용을 추억하는 자리에 기꺼이 동행해주기로 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마당을 거닐던 조성룡은 정기용이 걸터앉곤 했던 납작한 바위에 은행나무를 마주하고 앉았다. 멀찍이 있던 포토그래퍼는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정기용은 도시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유일한 방식은 길을 잃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건축물 하나를 세우기보단 이 시대의 어지러운 도시 풍경을 염려했던 사람, 서울의 관대한 산과 강, 역사의 흔적에서 가까운 미래의 서울을 모색했던 정기용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그래서 난 오늘 건축가 조성룡과 함께 정기용의 발길과 시선이 자주 닿았던 서울의 이곳저곳을 걸어볼 참이다. 걷고 거닐다가 막다른 골목 어딘가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만 같은 아침이다.

 

 

 

 

 

3 낭만에 대한 열망으로 이름 지어진 마로니에 공원 4 피아노를 연주하는 젊은 글렌 굴드와 정기용의 모습이 겹쳐진 스크랩 5 정기용이 생전 즐겨 찾던 일식집, 도도야. 건축가의 소식과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한 한 쪽 벽면이 인상적이다. 

 

 

동숭동의 시절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어느새 동숭동을 걷고 있다. 조성룡과 정기용은 2005년부터 이곳 동숭동에 사무실을 얻어 함께 지냈다. “이종호 선생이 먼저 동숭동에 와 있었는데, 혼자 있기 쓸쓸하다고 정기용 선생하고 나를 자꾸 불렀어요. 마침 정기용 선생하고는 학교도 같이 나가고, 수업도 같이 하면서 늘 함께 움직이던 터라 아예 사무실을 양재동에서 동숭동으로 옮겨버렸죠.” 그렇게 기용건축과 조성룡도시건축은 마로니에공원 뒤편 동숭동 1-140번지 사무실에서 도시 건축 집단 ubac(urbanistic architecture)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다. 그 무렵 동숭동은 승효상, 민현식, 이종호, 김석철, 김영준 등 여러 건축가가 둥지를 틀고 있던, 그야말로 ‘동숭동의 시절’이었다.


조성룡은 우리를 ‘도도야’라는 근처 식당으로 안내했다. “정기용 선생하고 매일 오던 집이에요. 집에서 먹는 밥 같아 좋아했어요. 승효상, 민현식 선생도 자주 오는 건축가들의 동네 밥집인 셈이죠.” 솥밥과 우동을 주 메뉴로 하는 정갈한 밥집, 창을 넘어오는 햇살의 온기가 등을 데웠다. 한쪽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신문 스크랩에 눈이 갔다. 일간지에 실린 건축가들의 소식과 인터뷰가 콜라주처럼 벽을 채우고 있었다. 정기용의 유작이 된 김해 기적의 도서관 완공 소식이 담긴 3년 전의 빛바랜 신문, 선유도공원 전시관 레노베이션을 이야기하는 몇 개월 전 조성룡의 인터뷰를 훑어보다가 벽 가장자리에 붙은 두 장의 작은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피아노와 일체가 되려는 듯 등을 구부려 연주하는 젊은 글렌 굴드의 흑백사진과 정기용의 작은 얼굴이 겹쳐져 있었다. “정 선생은 늘 글렌 굴드만 들었어요. 글렌 굴드 외에는 얘기를 하질 않았지. 파리에 있을 때 누군가가 들려준 글렌 굴드를 처음 접하고 그때부터 그에게 매료된 모양이에요.” 5년 전 이른 봄, 그의 빈소에서도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흐르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 집의 별미라는 장어정식을 기다리며 조성룡의 이야기에 귀를 모았다. “정기용 선생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게 1972년도예요. 1968년에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났잖아요.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 가치에도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학교도 전면적인 세대 교체가 이뤄져요. 보수적인 교수들이 물러나고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이 부임하면서 모든 교육체계가 바뀌었을 무렵 프랑스로 간 게 정 선생 인생에선 아주 중요해요.” 유학 시절, 앙리 르페브르, 아나톨 콥, 미셀 마페솔리, 가스통 바슐라르 등 1970년대 프랑스 지성들의 사상을 흡수한 정기용은 귀국 후 목격한 서울을 향해 삶이 문화가 되는 도시, 시간성과 역사 의식을 존중하는 태도의 가치를 열띤 소리로 이야기해왔다. 그의 건축 사상에는 ‘삶이 있고 도시가 있고 건축이 있다’, ‘일상성이야말로 건축이 사람들과 관계 맺는 특질이며 특권이다’ 같은 문장이 서두 어딘가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정기용 선생이 프랑스에서 배워 온 것들을 우리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을 때였고, 건축을 하는 우리조차 그런 자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 현실에 계속 부딪히면서 오히려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식사를 마칠 즈음, 조성룡과 인사를 나누러 온 주인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직도 정기용 선생님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요. <말하는 건축가>를 보던 날도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못 일어나고 앉아 있었어요.” 주인의 정감 어린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서니, 오전의 차갑고 뾰족했던 공기는 어느새 섬세한 낮의 기운으로 바뀌어 있었다.


느슨해진 몸은 자연스레 마로니에공원을 가로질렀다. 이곳이 왜 마로니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여전히 모르는 채로. 과거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인텔리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의 낭만에 대한 열망이 파리의 마로니에를 이곳에 이식했음을,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사라져버린 대학천의 다리를 미라보(Mirabeau)라 불렀다는 오래된 사실을 조성룡은 이제야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후 서울대 문리대가 자리했던 시절의 애틋한 시간을 지나 이젠 대학이 없는 대학로의 중심이 된 마로니에공원은 어쩐지 전보다 한결 넓고 단정해진 듯 보였다. “마로니에공원 계획이 이종호 선생의 마지막 작업이었죠. 기존의 산만하던 풍경을 잘 조정했어요. 대중이 사용하는 오픈 퍼블릭 스페이스가 잘 정리되어야만 도시가 활기차고 의미 있어져요. 여긴 공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방금 지나온 것처럼 도시의 통로이기도 하거든요.” 2014년, 차가웠던 어느 날 갑작스레 고인이 된 이종호 역시 정기용, 조성룡과 함께 건축의 자장 안에서 많은 시간을 어울렸던 건축가다. 우리 건축에 있어 더욱 절실했던 교육 문제와 건축가의 윤리를 성찰하고, 도시의 행정과 제도에 관한 끝 모를 고민을 나누었던 그들. “정기용을 부르는 많은 이름이란 이 시대가 요구하고 싶은 건축가의 초상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했던 이종호와 이종호를 “우리 도시의 겉모습뿐 아니라 그 속에 깊이 내재하는 현실성을 읽으려 노력하는 건축가”로 보았던 정기용. 두 벗이 없는 동숭동을 걷는 조성룡의 표정은 여러 가지의 심정이 겹쳐 있는 듯했다. 

 

 

 

1, 2 2010년 소격동 사무실 앞마당에서 사이좋게 포즈를 취한 정기용, 조성룡 선생.  그리고 같은 자리에 홀로 선 2015년의 조성룡 3 베니스의 골목길을 누비며 건축 산책을 즐기던 정기용과 조성룡

 

 

소격동, 건축가의 사무실
정기용과 조성룡은 동숭동에서 3년을 보내고 궁궐 너머 소격동으로 건너왔다. 소격동이 한결 고요하던 시절, 골목 안쪽의 2층짜리 남향집을 사무실로 함께 썼다. 크고 작은 관목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당과 볕이 잘 드는 넓은 창을 가진 건물은 이제 모든 이의 발길을 반기는 커피숍이 되었다. 두 건축가는 2층의 절반을 각자의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나무 계단을 올랐다. “이쪽이 내가 쓰던 공간이에요. 책상이 여기 있었지. 정기용 선생이 저쪽을 썼는데, 창밖으로 인왕산이 보인다고 먼저 찜해버리더라고.(웃음)” 투병 중임에도 일민미술관에서의 회고전 <감응: 정기용 건축>과 여러 권의 작품집을 여념 없이 준비하던 공간, 영화 <말하는 건축가> 속 정기용의 말년 모습도 이곳이 배경이다.


뜨거운 커피가 필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햇살이 가장 좋은 테라스에 모여 앉았다. “정기용 선생은 어느 자리에서나 핵심을 꿰뚫는 능력이 뛰어나요. 개념을 빨리 찾아내는 데 천부적이죠. 그건 지식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훈련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강의를 할 때도 늘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가면서 하는데 나중에 보면 그 전체적인 구도가 기가 막히게 근사해요.” 두 번의 전시에서 만난 그의 수많은 도면과 스케치, 메모에는 건축물에 대한 구상의 흔적뿐 아니라 땅의 의미, 주변과의 관계, 기억과 제스처, 자연을 담으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동숭동 낙산 자락에 지은 무애빌딩의 개념 스케치를 보면 그의 건축적 사유가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 읽을 수 있다. “동숭동이라는 동네가 갖는 냄새와 구조를 재현한다길, 절벽(낙산과 관련해서) 느낌을 존재시킨다낙산의 뿌리/경사면이 동네 건물들에 미친 영향. 우리들의 해석북측을 매일 보는 사람은 동성고등학교 청소년들이다. 이들의 가슴속에 ‘꿈’을 준다.” 건축가의 스케치란 무수히 흩어져 혼재해 있는 기억의 새로운 조합이라던 그의 말처럼, 즉흥적으로 쓰고 그린 듯한 작은 스케치 속에는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삶의 가치가 숨 쉬고 있었다.


 “항상 부르짖었던 게 평등한 사회,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였어요. 이에 대한 신념이 아주 강했을 뿐 아니라 그걸 알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건 죄악이라고, 어떤 식으로든 행동해야 한다고 늘 외쳤죠. 우리한테는 모자란 면모였어요. 좀 더 살아서 지금쯤 힘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망해요.” 조성룡의 ‘허망하다’는 표현의 무게처럼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정기용의 생은 언제나 치열했다. 마땅히 가장 정기용다웠던 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을 함께한 도정일은 돈 10원 생기지 않는 일도 자신이 해야 한다면 늘 달려와주었던 정기용의 태도를  ‘우리 시대에 대단히 희귀한 인격’이라고 말한다. “‘집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창이란 무엇인가? 빛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계속해서 할 수가 있어요. 거기서 지속되는 답이 있고, 새롭게 발견되는 답이 있거든요. 건축은 지속적으로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해요. 역사와 시대에 대해서도 늘 공부해야 하고요.” 상상력과 성찰을 포함한 인문학적 사유를 건축의 밑바탕에 두었던 건축가 정기용이 삶의 끄트머리에서 우리에게 남긴 당부다.

 

 

 

1 사진가 안하진이 2010년에 촬영한 소격동 사무실의 정기용 선생 2 선유도 공원. 정기용이 생전 “해방 이후 만들어진 공간 계획 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탄을 보낸 곳 3 고인이 남기고 간 김민기의 앨범 4 2011년 3월, 고인이 된 정기용 선생과 그가 즐겨 들었던 글렌 굴드 음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강을 건넌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듯 다리 하나를 너머 선유도공원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겸재 정선의 화폭 속, 신비로웠던 섬 선유도는 근대화 이후 정수장 시설로 쓰이다 2002년 건축가 조성룡에 의해 국내 최초의 생태 공원으로 재생되었다. 건축과 주변과의 관계, 주위의 풍경으로 인해 건축이 다시금 드러나기를 고민해온 조성룡은 당시 정수장 시설과 건물의 형태를 살리며 철거를 최소화 했다. 콘크리트 수조에 묻은 오랜 물때의 흔적, 기둥 끝의 잘려나간 철근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로 숨어 있다 사라지는 이 모든 자연의 풍경은 선유도공원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적 공간으로 만든다.


선유도공원을 해방 이후 만들어진 공간 계획 중 최고의 걸작이라 했던 정기용은 그 누구보다 이곳을 좋아하며 자주 찾았다. 누적된 역사와 시간이 공간에 깃들기를 늘 희망하던 그였기에 옛 기능의 흔적을 품은 콘크리트와 구절초, 백련, 연꽃, 물옥잠, 꽃창포, 미나리, 부들 등의 식물이 어우러진 이곳의 풍경을 경탄했다. ‘선유도 공원: 잊혀진 땅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선유도공원의 면면을 깊이 있게 경험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선유도공원은 콘크리트의 물성에 내재하는 내구성과 구조적인 장점, 거기에다 물을 담았던 기억과 흔적을 시간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화학적, 물리적인 반응들을 최대로 재활용하여 그 자신만이 아니라 생명의 풀들을 키워내는 그릇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는 오늘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상의 풍경을 애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건축가를 떠올리며, 누구도 다 걸어볼 수 없는 서울의 미로를 걸었다. 그리고 그 길목의 순간순간에서 그가 우려했던 성찰 없는 도시의 모습과 그럼에도 늘 지혜로우며 관대한 자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쉼 없이 생성되고 있는 서울의 단면을 보았다. 그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이 도시의 작은 속삭임에 늘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담은 두툼한 책에 적은 궁극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나 간결하고 깊다. “나의 집은 나의 집이면서 동시에 서울이다. 나의 부엌 속에 서울이, 서울 속에 나의 집이, 산과 강과 이웃이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이 지속하는 풍경의 올바른 미학이고 윤리다.” 마침내 늦은 해가 서서히 드러눕고 있는 회색빛 강을 바라본다. “나의 삶은 물 같은 거예요. 물 흐르듯이. 연애도 그렇고 건축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정기용에게 각인된 도시, 서울은 너무 많은 기억을,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를 만든 정기용

대학교 3학년 수업 때 처음 본 정기용 선생님의 모습은 그전까지 가졌던 교수님들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모든 수업에서 실무적인 내용을 다루고 직접 경험한 현장 작업 과정과 통계, 이론을 전해주었다. 권위의식 없이 격식을 파괴한 행동과 말씀에 감명받은 나는 함께 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기용건축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고난이었다. 늘 바른 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아 건축계에 동화되지 못한 채로 지냈고, 돈이 되는 일에 투신하지 않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다. 늦은 밤, 온갖 책과 자료가 수북이 쌓인 책상 끝에 앉아 노란 백열등 아래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지우고 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늘 진한 무채색 상의와 하얀 셔츠를 입고 긴 외투 위에 머플러를 두른 그 모습도. 선생님은 사람이 세상에 튀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담담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옷차림과 외모를 일일이 지적하셨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김병옥, 기용건축 소장

 

 

건축가로 기억되고자 했던 건축가

건축가 정기용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나에게 그는 많은 질문과 숙제를 남겨준 분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전문직 종사자로서 직업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윤리적 선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때로 눈 한 번 질끈 감아버린다면 큰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윤리를 되뇌는 것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건축가 정기용에게 한국 사회에서 건축가로서 지켜내고 싶은 직업적 윤리는 늘 중요한 주제였다. 정기용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건축으로 봉사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직업으로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지 않기를 바랐다. 눈앞에 닥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고 자신의 직업을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로 끌어올린 사람. 한국 사회에서 유독 드물었던 부류의 건축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가 바로 건축가 정기용이다.
-정재은, 영화감독 <고양이를 부탁해>, <말하는 건축가> 등

 

 

감응의 건축가 정기용, 나의 아버지

차 안이든, 식당에서든, 여행을 다니면서 혹은 집에서 쉴 때, 아버지와 지냈던 짧은 시간과 대화를 떠올리면 그것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의’였던 것 같다. 대체로 불어로, 스케치를 해가면서 많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한국의 역사와 종교, 자연과 건축, 도시와 건축, 흙 건축, 또는 게슈탈트 이론, 그레마스의 기호학 사각형, 들뢰즈의 리좀, 차이와 반복, 프리고진과 스탕제의 ‘새로운 연합’, 루소의 ‘에밀’, 나무들 이름, 그리고 비판적 지역주의, 전일적 접근, 협치….
아버지 머릿속에서 이 다채로운 단편들이 서로 포개어지고, 상호 침투하고, 자유롭게 서로를 생성시키면서 건축가가 ‘사회적 조절자’라는 비전과 윤리와 이상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감정(Emotion)’ 이라고 하셨다. 아마 이 모든 면들이 이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닐까? 아버지가 나에게 가끔 상기했던, 어린 시절 산과 강과 집을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이 아닐까? 이것이 아마 그가 후에 ‘감응’ 이란 개념으로 만든 것일 것이다.
-정구노, 건축가

 

풍류가로서의 정기용, 해장국집에서의 추억

어느 늦여름 해날, 벗 한돌과 범뫼에서 내려와 늘처럼 식탁이 3개뿐인 삼청동 해장국집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왠지 저쪽 자리 손님이 주는 시선을 느꼈다. 정기용 선생이었다. 이야기에 팔려 그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혼자 앉아 해장국을 시켜놓고 내 단골집 내 자리 빼앗긴 마음으로 ‘어? 이것들 봐라. 나도 몰라보고’ 하며 괘씸한 듯 노려보고 있었을 게다. 그는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집을 오갔던 것. 합석해서 맛난 해장국을 같이 먹으며 얘기했다. 이 보물 같은 해장국집과 집주인 할아버지를 서로 예찬하고 이를 놀이 삼아 기리기 위해 한돌에게 노래를 만들어 연말에 음악회를 열자 했다. 그리고 둘이 청와대 앞길을 지나 삼청동, 감사원, 성대 후문, 서울 성곽 아랫길을 지나 그의 집까지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해가 가고 다음 해 말, 드디어 노래가 완성되어 홍대 앞 지하 요기가에서 해장국집 주인을 모신 가운데 ‘해장국집을 위한 한돌음악회’를 열었다. 사람들이 꽤 모였는데(해장국집 할아버지는 정장을 하고 오셨다), 가장 흥분하고 들떠 있던 사람은 정 선생이었다. 해장국집에 대한 영상을 직접 만들고 상영하고 애정 어린 인사말을 길게 하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안상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세상의 이면을 보라던 건축가의 당부

사진가로 살다 보면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중 가장 반가운 사람은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이일 것이다. 그날의 정기용 선생님도 그랬다. 처음 그의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오시던 모습이 선하다. 사진가인 내가 어떻게 하면 편할까 주시하며 웃어주시던 선생님. “안 선생,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까? 이건 어때?” 모자도 써보고 도면도 보이시며 사진가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해주고 계셨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날의 사진에서 시작되었다. 하루는 삼청동의 자장면이 맛있다는 곳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며칠 뒤 남아프리카로 간다는 말씀을 건네자 선생님은 음식점 냅킨에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려주셨다. “소나무가 왜 구부러져 자랐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소나무는 돌을 깨고 자라거든. 수많은 날의 해와 달빛을 받고 바람과 비, 눈도 맞았지. 그것을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 담아내야 해! 단순히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보이는 것만 찍지 말고, 남아프리카에 가서 그런 것들을 담아봐요.” 난 아직도 그 냅킨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안하진, 사진가

 

CREDIT

EDITOR / 박선영 / PHOTO / Ahn Hajin, Kim Jaek / 東方流行

Twitter facebook kakao Talk LINE
  • · (주)가야미디어  
  • · 등록번호:인터넷뉴스사업자 서울, 자00454  
  • · 등록일: 2014년 3월 10일  
  • · 제호: 아이매거진코리아닷컴  
  • · 발행인: 김영철  
  • · 편집인: 백재은  
  • · 주소: 서울시 강남구 삼성로 81길 6 06195  
  • · 연락처: 02-317-4800  
  • · 발행일: 2013년 8월 1일  
  •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재은  
  • · 사업자등록번호120-81-28164  
  • · 부가통신사업 신고 제 2-01-14-0017 호 통신판매신고 제 2009-서울강남-01075호  

Copyright kayamedia Corp.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