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바퀴굴림차 한 대가 아무도 없는 산속을 조용히 걷는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비경이라도 나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해가 지자 차에서 한 남자가 나와 작은 텐트를 치고 현실에 지친 몸을 구겨 넣는다. 지구의 불빛은 완전히 꺼졌고 텐트 안엔 남자의 숨소리만, 텐트 밖에선 산의 숨소리만 들린다. 남자는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누리며 잠을 청한다. 아침이 되자 남자는 세상과 함께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무의식 속에 누적돼 있던 캐시 파일들이 말끔히 지워졌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집으로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네 바퀴 여행자’ 이철의 여행법이다.

이철 씨는 자연을 탐닉하는 여행자다. 취미로 운영하는 블로그 닉네임도 해산(海山)이다. 직장에서는 슈트를 입고 있지만 언제든 자연으로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여행의 든든한 네 발이 되어주는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D3에는 당장 재난이 닥쳐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장비들이 가득하다. 수많은 SUV와 연애를 해봤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이처럼 딱 맞는 차가 없다. 그에게 차는 단순히 출퇴근하고 주말에 가족과 여가를 즐기는 이동수단이 아니다. 만만치 않은 현실에 녹초가 될 때마다 잠시나마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해주는 탈출 비행선이다. 그래서 4WD가 아니면 안 됐다. 그의 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4WD SUV다.

그가 SUV에 눈을 뜬 건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가서다. 당시 친구 아버지는 장교였는데 가끔 운전병 아저씨가 운전하는 지프 CJ5에 함께 타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지프는 이철 씨에게 SUV의 짜릿한 첫 경험을 안겨주었다. 풋풋했던 유년 시절이 지나고 운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첫사랑은 록스타 R2였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법. 록스타 R2는 실린더 헤드가 워낙 약한 차였다. 첫사랑의 시련을 딛고 두 번째로 만난 차는 구형 코란도였다. “루프와 도어를 뜯어내고 뼈대만 남겼어요. 그렇게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전국을 누볐지요.”

이철 씨는 어느 날 어릴 적 경험했던 지프가 문득 생각났다. 지프의 끝을 보고 싶어 1986년형 CJ7을 사서 본인 스타일로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공부한 기계공학 지식과 자작 자동차 동아리 경험이 빛을 발했다. 콘셉트는 ‘온고지신’이었다. 옛것을 살려 지금의 시대와 본인의 색깔에 맞게 해석하고 재창조했다. 섀시만 남기고 모두 들어냈다. 갤로퍼 2의 2.5리터 엔진을 얹고 변속기와 서스펜션도 새로 손봤다. 결혼 후 첫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그 차를 타고 아내와 많은 추억을 쌓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차와 작별을 했다. “미련은 없습니다. 끝을 봤으니까요.”

지프 CJ7 이철 에디션을 보낸 뒤 그는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D2·D3·D4 그리고 닛산 패스파인더까지 섭렵했다. 지금은 D3와 패스파인더만 갖고 있다. 그가 D2를 회상하며 말했다. “디스커버리 D2는 만듦새가 무식하게 튼튼합니다. 랭글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이 뛰어나죠. 단점이 하나 있다면 고장이 잘 난다는 거였어요.”

이철 씨는 요즘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네 바퀴 여행을 즐기고 있다. 네 사람은 네 바퀴 위에서 툭툭 대화를 던지며 계획 없는 여행을 즐긴다. 모험 속에도 삶의 즐거움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에겐 소원이 하나 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부산에서 포르투갈까지 달려보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도 통일이다.

1 이철 팀장은 현재 닛산 패스파인더 전문 세일즈맨이다. 2 지프 CJ 이철 에디션. 지금은 청담동의 어느 사진작가가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