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잘 못 마시면서, 예전 생각만 하다가 덜컥 받아들인 것이 사달이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감은 애초에 물 건너간다. R 기자에게 이 잔을 다시 돌리려 애쓰다가 잘 안 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잔을 돌리려고, 요즘은 시들해졌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다. 또 요즘은 시들해졌다고 말하고 보니 어, 시들해졌다는 말이 어찌 그리 쉽게 나왔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술도 잘 못 마시지만, 실은 술에 대해 할 말도 별로 없다. 애주가는 개뿔! 한때는 막걸리 부활의 움직임을 보며“고대사의 복권이요, 근현대사의 초극”이니 하며 떠벌일 여유나마 있었지….

취향을 대중화시켜 유행화에 성공한 일본주나 싱글 몰트니 수제 맥주니 하는 서양 술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이제 막걸리를 넘어 청주, 소주 따위 우리 술의 옛 흔적을 찾아가는 맹렬함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으니(감홍로, 과하주, 교동법주, 담솔, 도소주, 두견주, 두륜탁주, 문배주, 백일주, 백화주, 사철주, 삼해주, 솔송주, 안동소주, 옥로주, 이강고, 이화주, 제주고리술, 죽력고, 청명주, 한산소곡주, 허벅술, 호산춘, 황금보리소주 등등) 어디 감히 10년 전의 소회를 댈까 보냐! 그 다양함에 하나 더 보태야 뭐 그렇고 그러려니, 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야 그렇다 치고, 그렇게 찾아다니며 드시던 어디 어디 우리 술이나 무슨 싱글 몰트, 별별 버본, 뭔뭔 맥주, 뿅뿅 스파클링이 하나같이 심심해지는, 이 시들시들한 권태, 이 시금털털한 느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고 무위도식도 아니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려온 이 몸과 정신들에 감히 시들이 웬 말이냐 말이다! 북쪽 궁의 서편, 가을 저녁에 초대되어 간 우리 술과 안주, 집기에 대한 전시에서 그 멋들어진 술과 술잔과 술병, 안주와 그릇과 집기를 보면서도, 또 그 <맑은 술, 안주 하나>를 몇 순배나 대접받았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이다. 나의 무지함을 다시금 깨닫고, 우리 술과 문화를 정제하려는 노력에 박수를 치면서도, 무언지 모를 이 무감한 시들시들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시들해졌다고 하면서도 엊그제는 또 여지없이 무너진다. 내 좋아하는 이들과 어울렸으니 안 마시고 배길 수야 없었지만, 또한 남쪽까지 가서 남쪽스럽지 않은 허름한 주막에 앉아 시끌벅적 멋 내지 않은 안주의 세련된 맛을 오랜만에 느낀 탓도 크다. 벌교 참꼬막의 피 맛과 서대찜의 담백함과 커다란 총각무의 서걱거림에 무슨 술인들 달콤하지 않으랴마는, 새벽 남쪽의 조용한 거리, 알파벳 첫자를 딴 이름의 클럽 앞에만 무리 지어 서 있는 청년들의 떠들썩함이, 또 나를 시들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심은 좀 쓸쓸한 것이다. 마침 그날은 지구 저 반대편에서 불꽃에 100여 명이 숨죽이고, 북쪽의 빛나는 곳에서는 물꽃이 낭자한 시각이다.“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권일송, 1966년)던 때도 아니니“이 땅은 나를 술맛 안 나게 한다”쯤이나 될 텐가.

백화제방하듯이 피어나는 술과 먹방처럼 넘쳐나는 안주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마음과 아직은 즐길 수 없다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애주가는 개뿔! 꽃이 있어도 없는 것이요, 사랑이 있어도 없는 것이다. 꽃보다 마음! 꽃도 없이 시들시들한 이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고대사는 야바위에 줘버리고 근현대사는 초장에 찍어 먹어버리려는 이 시들시들한 권태의 나날, 이 시금털털한 시절을 어찌할 것인가…. 

about 박상일은 출판사 수류산방에서 책을 만든다. 좋은 작가를 만나면 막걸리 한 동이를 나눈 후 그들의 작업이 담긴 아름다운 책을 디자인한다. 출판계에 반항을 일으킨 그 자체가 예술이 된 책들, 문학동네 시인선, 예술사 구출 총서 ‘예술인 生’ 등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