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VROLET IMPALA

들으며 달리며 치유하며
사실 요즘 좀 아프다.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이라 가슴이 좀 더 저민다. 튼실한 육체는 기억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차라리 몸이 아파 정신이라도 혼미하면 좋을 텐데. 이놈의 몸은 별로 아파본 적이 없다.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작정 떠나보기로 했다. 쉐보레 임팔라가 동행을 해주었다.

임팔라는 내 누추한 마음을 넓은 공간으로 포근히 받아줬다. 여린 마음이 아플까 봐 소음도 잘 막아주고 진동과 충격도 잘 걸러줬다. 여유라곤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임팔라가 끌어주는 길 위로 작은 한숨을 돌렸다. 창문을 살짝 여니 공기는 얄밉도록 상쾌했다. 가을이었다. 그래. 멈춰 있던 건 나뿐이었다.

가을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음악 가을길 드라이브라면 좋은 오디오가 없어도 좋다. 신선힌 바람과 따뜻한 햇살만 있어도 마음은 이내 상쾌해진다.

휴식 같은 음악이 필요했다. 임팔라가 선사한 적막을 뭐로든 채워야 했다. 블루투스로 스마트폰을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해먼드오르간으로 연주하는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귓가에 다가왔다.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이었다. 마음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영사기에서 필름 돌아가듯 펼쳐졌다. 해먼드오르간 소리를 들으면 늘 이랬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롱한 소리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바로 이어지는 음악에 가슴이 한 번 더 무너졌다. 쳇 베이커였다. 쳇 베이커는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이 있다. 그의 트럼펫보단 목소리가 더 그렇다. ‘Angel Eyes’였다. 사실 난 쳇 베이커보단 스팅의 ‘Angel Eyes’를 더 좋아한다. 스팅의 목소리보다 그 음악이 나왔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때문이다.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벤과 세라의 사랑은 여전히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특히 죽기 위해 술을 마시는 벤에게 휴대용 술통을 선물하는 세라의 마음은 아직도 가끔 가슴속에 떠오른다.

너무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음악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루브 아마다의 ‘At The River’가 이어졌다. 창밖의 풍경도 도시를 완전히 벗어난 듯 나무와 산과 강으로 이어졌다. 벌써 울긋불긋하다. 난 이제야 가을에 다다랐지만 시간은 늘 흐르고 있었나 보다. 가을이 오면 난 가끔 오대산 월정사에 갔다. 전나무 숲길과 단풍 때문이다. 갑자기 그리로 가고 싶어졌다.

마음을 부추기는지 스피커에선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나왔다. 전부터 ‘Wonderwall’만 들으면 괜히 달리고 싶어졌다. 임팔라의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2.4리터 모델인데도 뻗어나가는 느낌이 좋다. 후련하진 않지만 신선한 가을바람을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다. 급한 마음에 강원도 산길에서 임팔라를 자꾸 보채며 몰았는데 안정감이 정말 좋다. 코너 돌아나가는 느낌도 깔끔하다. 사소한 움직임을 잘 억제한다. 꽤 몰아붙였는데도 한계에 다가가지 못했다. 차체 강성과 서스펜션 세팅이 발군이었다.

임팔라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가을을 타니 마음이 조금은 치유된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밤길엔 농후한 덕심으로 A.O.A의 ‘단발머리’까지 들었으니까. 가을엔 가을을 타는 게 약인가 보다. 글/고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