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사고가 있었다. 노르트슐라이페에서 열리는 VLN 내구 레이싱 도중이었다. 닛산 GT-R이 고속 코너에서 그립을 잃었다. 다운포스보다 양력이 더 많이 발생하면서 차체가 떠올랐고, 그대로 관중석을 덮쳤다. 이 사고로 관객 1명이 죽고 4명이 다쳤다.  뉘르부르크링 서킷 운영회와 독일 모터스포츠 연맹(DSMB)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 성명을 발표했다. 노르트슐라이페 네 구간에 대해 속도제한을 발표했다. 세 곳은 시속 200킬로미터, 그리고 최고속도가 나오는 4킬로미터 구간을 시속 250킬로미터로 제한했다. 이는 모든 모터스포츠를 비롯해서 서킷을 임대하는 모든 행위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뉘르부르크링에서 랩타임 측정은 불가하게 된 것이다.

뉘르부르크링 랩타임은 고성능 스포츠카 성능의 기준이자 척도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조건의 서킷에서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능과 내구성을 입증하는 셈이니까. 그래서 여러 브랜드가 벼리고 벼린 그들의 자동차를 뉘르부르크링에 투입해 0.1초라도 줄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런데 뉘르부르크링의 랩타임 경쟁 금지가 가장 황당한 브랜드는 쾨닉세그였다. 최신 제품 원:1으로 뉘르부르크링 정복을 노리던 그들의 꿈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일장춘몽으로 끝나게 됐다. 그러자 쾨닉세그는 원:1을 끌고 독일이 아닌 벨기에 스파 프랑코샹으로 갔다.

스파 프랑코샹은 F1을 비롯해 스파 24시, 스파 1000킬로미터 등의 내구레이스가 열리는 서킷이다. 서킷이 만들어진 1921년에는 총 길이가 14킬로미터였으나 F1이 서킷 길이를 7킬로미터 이내에서만 경주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면서 7.004킬로미터가 됐다. 그래도 현재 F1이 열리는 서킷 중에서 가장 길다. 코너 수는 총 19개로 길이를 생각하면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대부분이 긴 직선구간에서 만나는 헤어핀이나 시케인이어서 브레이크 부담이 큰 서킷이다. 더불어 뉘르부르크링처럼 고저차가 심하다. 그래서 스파 프랑코샹 랩타임도 스포츠카 성능 척도 중 하나로 꼽힌다.

원:1은 스파 프랑코샹에서 래디컬을 제외한 일반 도로용 양산차 중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했다. 노르트슐라이페의 제왕 포르쉐 918보다 무려 8초나 빨랐다. 7킬로미터 서킷에서 8초나 빨랐으니 21킬로미터 서킷에서는 얼마가 차이 날지 대충 가늠이 된다. 자동차 세팅과 서킷의 이 역학적인 관계가 큰 변수이기는 하다. 실제로 스파 프랑코샹에서는 맥라렌 P1이 포르쉐 918보다 빨랐는데 미국 라구나세카에서는 918이 빨랐다. 뉘르부르크링에서 918보다 빨랐던 쉐보레 콜벳 ZR1은 스파 프랑코샹과 라구나세카에서 뒤졌다.

포르쉐는 918을 앞세워 노르트슐라이페, 라구나세카, 윌로 스프링스 등 세계의 유명한 서킷을 돌며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말하자면 도장 깨기를 연상케 한다. 쾨닉세그는 상징성이 큰 노르트슐라이페로 가장 먼저 가 918의 기록을 멋지게 깨부수려 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파 프랑코샹으로 갔고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올해 8월에는 닛산의 영토였던 굿우드 힐클라임에도 깃발을 꽂았다.

포르쉐 918 스파이더와 쾨닉세그 원:1의 영토 확장과 도장 깨기는 계속되고 있다. 두 차가 맞붙은 곳은 현재 스파 프랑코샹밖에 없고 원:1이 판정승을 거뒀다. 포르쉐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뉘르부르크링은 올해 말이면 속도제한이 풀린다. 쾨닉세그는 가장 먼저 뉘르부르크링으로 달려갈 것이 분명하다. 포르쉐가 왕좌를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뉘르부르크링의 역사가 바뀌게 될까? 궁금해 미칠 것 같다.

포르쉐 918 스파이더가 뉘르부르크링에 도전장을 던진 건 지난 2013년 9월이었다. 래디컬 SR8LM을 제외하고 대량 양산차 최초로 7분의 벽을 깨면서 제왕에 등극했다. 그리고 2년 동안 918은 뉘르의 제왕이었다.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슈퍼벨로체가 애를 쓰면서 7분의 벽을 깼지만, 918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쾨닉세그 원:1과 몬차에서 유일하게 2분의 벽을 깬 페라리 라페라리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다.

뉘르부르크링과 스파 프랑코샹, 가장 긴 서킷 두 곳의 최고속 타이틀을 지닌 래디컬 SR8LM은 르망 프로토타입의 보디를 지녔다. 스즈키의 하야부사 엔진(4기통 1340cc) 두 개를 V형으로 붙여 미드십에 얹고 450마력을 낸다. 바이크 엔진을 얹어 엔진 회전수가 아주 높은 게 특징. 덕분에 가속이 아주 빠르다. 다만 배기량이 작아 최고속도는 시속 290킬로미터로 비교적 낮다.

라구나 세카에서도 포르쉐 918이다. 그런데 라구나 세카의 진짜 제왕은 918이 아니라 <모터 트렌드>의 테스트 드라이버 랜디 포브스트다. 1~15위 중에서 5위와 14위를 빼고 모든 차를 랜디 포브스트가 운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록은 <모터 트렌드> 테스트 드라이브에서 계측됐다. 재미있는 것은 스파 프랑코샹에서는 맥라렌 P1이 918보다 빨랐는데 라구나 세카에서는 그 반대로 나왔다.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열리는 힐클라임 경주도 슈퍼카들이 종종 출연한다. 올해는 쾨닉세그 원:1이 출전해 50초의 벽을 허물었다. 굿우드 힐클라임은 길이 좁고 코너가 많아 평균속도가 낮다. 때문에 가속이 빠른 차가 유리하다. 재미있는 것은 4위를 차지한 맥라렌 P1의 드라이버가 맥라렌 F1 팀의 드라이버 젠슨 버튼이라는 것. 굿우드 페스티벌에 구경 왔다 재미 삼아 달린 것이 등수에 들었다나 뭐라나. 1위를 차지한 원:1의 드라이버 로버트 세르완스키는 스파 프랑코샹에서도 운전한 쾨닉세그의 수석 테스트 드라이버다.

윌로 스프링스도 7위를 제외하면 모두 랜디 포브스트가 세운 기록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킷은 모두 포브스트가 주름잡고 있다. 윌로 스프링스에서 918은 독보적으로 빠르다. 2~6위가 모두 1분 25초대인데, 918만 1분 23초대로 달렸다. 미국 <모터 트렌드>는 어서 원:1이나 라페라리를 끌고 윌로 스프링스로 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