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Y THOUGHTS 요즘에도 카팩이 나온다. 무선카팩도 있는데 옛날에 있던 카팩과는 용도가 전혀 다르다. 요즘 카팩은 스마트폰에 연결해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을 차 안 스피커로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차를 갖고 나갈 때면 늘 카세트테이프가 꽂혀 있는 장식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들을 앨범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혼자 나가면 록이나 메탈을,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일렉트로니카나 보사노바를 주로 골랐다."

아날로그란 말은 이제 추억이나 과거 혹은 구식 같은 단어와 동의어가 돼버렸다. 뻔한 감성팔이에 단골 소재가 된 지도 오래다. 한때는 아날로그도 첨단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왠지 거추장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참고로 태양계를 벗어나 여전히 우주를 탐사 중인 보이저 1호와 2호에 들어간 저장장치가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카세트테이프다. 신기하지?

내가 10대였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날로그가 주류였다. 그때 우리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봤고, 문자만 표현되는 흑백 액정의 플립형 휴대전화를 썼으며 전자동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음악은 주로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다. 그때는 LP도 있었고 CD도 있었지만 난 거의 카세트테이프만 샀다. 제일 쌌다. 항상 부족했던 용돈으로는 그런 식으로 주린 귀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감지덕지했다. 카세트테이프로도 앨범의 아트워크와 보너스 트랙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으니 부족할 건 전혀 없었다. 그래도 가끔 잘 사는 친구 집에 가면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전축이 부러웠다.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는 아니었다. LP를 살 수 있는 당위성이 부러웠다. 작달막한 카세트테이프의 속지만 보다 보니 LP에 들어간 커다란 부클릿이 갖고 싶었다. 요즘처럼 스트리밍으로만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아마 이해 못 할 거다.

그때만 해도 교보 핫트랙스나 종로 타워레코드 등 대형 음반매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반을 사러 온 사람, 앨범 재킷을 구경하러 온 사람,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 친구를 만나러 온 사람 등 각자의 이유로 그곳을 오갔다. 난 주로 그곳에서 앨범을 보고 듣고 살 목록을 정리했다. 그러곤 약수동에 있는 만복레코드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단골이니까. 그게 다였다. 그때 음반은 쉽게 구할 수 있으면 만복레코드에서, 구하기 어려우면 상왕십리에 있던 하나방레코드에서, 뭔가 새로운 게 듣고 싶으면 홍대 레코드포럼에서 샀다. 애석하게도 이제는 세 가게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레코드포럼이 올해까지 버텨줬는데 얼마 전 결국 문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그때 정말 열심히 읽던 <핫뮤직>, <GMV>, <이매진> 등 음악·문화지도 이미 한참 전에 폐간됐다. 요즘은 음악이 단순한 소비재로 치부되는 건 아닌가 싶어 왠지 서글픈 마음도 든다.

어쨌든 그때는 음반을 사러 가는 설렘이 있었다. 오늘은 어떤 음악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두근거림에 발걸음까지 빨라졌다. 단골 레코드 가게 사장님에게 하는 인사는 늘 “요즘 괜찮은 거 없어요?”였다. 내 취향을 아는 사장님은 가끔씩 마음에 쏙 드는 앨범들을 골라주기도 하셨다. 그럴때 보면 꼭 음악 사부 같았다. 그런데 그 사장님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번은 사장님이 고3이던 내게 “힘들지?” 하며 가만히 앉혀놓고 얼 클루의 ‘Santiago Sunset’과 아트 가펑클의 ‘Traveling Boy’를 들려줬던 적이 있다. 그냥 멜로디만으로 위로가 될 거라며. 그게 1999년이었다. 그땐 소위 ‘IMF’로 불리던 금융대란 시기라 사장님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선뜻 날 먼저 위로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눈물도 슬쩍 흘렀던 것 같다.

재수를 했던 난 스물한 살에야 운전면허를 땄다. 그러곤 바로 아버지가 몰던 마르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차를 거의 몰지 않으셨기에 운 좋게도 그럴 수 있었다. 마르샤엔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곤 오로지 카세트테이프뿐이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중고교 시절 카세트테이프만 주야장천 사다 모았기 때문이었다. CD는 100장도 안 됐지만 테이프는 수백 장 갖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부모님 댁에 잘 모셔져 있다.

지금이야 듣고 싶은 음악을 편하게 검색해 바로바로 들을 수 있지만 그때는 음반이 있어야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차를 갖고 나갈 때면 늘 카세트테이프가 꽂혀 있는 장식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들을 앨범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혼자 나가면 록이나 메탈을,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일렉트로니카나 보사노바를 주로 골랐다. 늦은 밤 한강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분위기를 잡을 땐 마일스 데이비스가 좋았다. 그의 음악이라면 뭐든 다 녹았다. 다만, 그러기엔 그의 음악이 너무 훌륭해 분위기를 잡는 용도로 소비하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게 있었다. 그걸 잊으려고 난 그리도 그녀들에게 집중했던 걸까?

자동차 콘솔박스에도 늘 갖고 다니던 카세트테이프가 쌓여 있었다. 다만 그곳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나만의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 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놓은 것들이다. 사실 카세트테이프로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는 건 좀 따분하고 귀찮은 일이다. 테이프를 감으며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곡 정도 건너뛰는 건 별것 아니지만 끝자락에 있는 노래까지 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요즘처럼 원하는 음악만 쏙쏙 골라 듣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어뒀던 건 그래서다. 그런데 노래를 건너뛰기 어려워 좋은 점도 있었다. 건너뛰는 게 귀찮아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감상하는 일이 많았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중한 경험이었다. 곡의 배치마저 음악가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단 걸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MP3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중반부터다.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가 세계적으로 대박나면서 너도나도 MP3를 구매했다. 아이팟은 그 다음이었다. 내가 처음 MP3 플레이어를 가졌던 건 군대를 갓 제대했던 2004년이었다. 누나가 선물해줬는데 코원의 U3라는 모델이었다. 작달막한 컬러 액정이 달려 큰 인기를 모았던 걸로 기억한다. MP3가 나오고도 차 안에서는 한참 동안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 아마 2005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차 안에서도 MP3로 음악을 들은 건 2006년부터였다. 카세트테이프 모양에 AUX 케이블이 달려 나온 IN-OUT 커넥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소위 카팩이라고 부르던 그것이다.

당시까지도 자동차 오디오의 주류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였다. CD 플레이어가 보급되긴 했지만 옵션으로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보다 많진 않았다. 물론 AUX 단자 같은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카팩은 한동안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나중엔 자동차 주변에 약하게 빈 채널의 라디오 전파를 쏴 라디오로 MP3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한 무선 카팩도 나왔다. 그땐 같은 채널로 설정한 무선 카팩을 설치한 차가 다가오면 그 차의 오디오 소리가 우리 차의 스피커를 통해서도 나와 당황하곤 했다. 지금 같으면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울 테지만 그땐 그랬다. 불과 10년 전 일인데 엄청 옛날 얘기 같다.

2013년까지 CD 플레이어가 없는 마르샤를 탔다. 그 말은 곧 카팩을 2013년까지 사용했단 얘기다. MP3가 코원 U3에서 애플 아이폰 5로 바뀌었지만 카팩은 그대로였다. 물론 차에서 듣는 음질도 늘 같았다. 카팩이 같으면 음질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차를 바꾼 건 2013년 10월이다. 13년 동안 25만 킬로미터를 달리면서도 별 고장 없이 잘 버텨준 마르샤를 뒤로하고 기아 레이 터보를 선택했다. CD 플레이어는 기본이고 AUX 단자와 USB 포트, 거기에 블루투스까지 지원됐다. 갑자기 몇십 년을 건너뛰고 미래로 넘어온 기분이었다. 심지어 레이에 달린 스피커는 기본형임에도 음질이 꽤 괜찮았다. 정말 대단한 호사를 누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은 나도 차 안에서 블루투스로 벅스뮤직 스트리밍 서비스를 연결해 음악을 듣는다. 듣고 싶은 음악, 생각나는 음악을 그때그때 검색해서 찾아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편할 수 없다. 그래도 종종 카세트테이프 생각이 나지만 플레이어가 없어 아예 들을 수 없다. 이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들어간 차는 없는 것 같다. 라디오만 들어간 차는 있어도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간 차는 보질 못했다. 결국 카세트테이프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인디 음악계에서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발매해 인큐베이팅하고 있지만 솔직히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카세트테이프의 존재조차 희미한 세대들이 문화 소비의 주축으로 옮겨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단 것에 작은 위안을 느낀다. 그게 사라지면 내 추억이 너무 멀게만 느껴질 것 같다. 난 길지 않은 어제를 살아 숨 가쁜 오늘에 다다랐는데 아직 돌아본 적도 없는 내 지나온 시간이 너무 까마득하게만 느껴질 것 같다. 사라지지 마. 카세트테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