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있는 그대로를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가장 좋은 기술은 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아가고, 기술에 신경 쓰지 않아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정보통신 업계에 한창 유행하던 용어 중의 하나가 UX, 즉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이다. UX가 본격적인 화두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디지털 관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분야의 비중이 커지면서다. 그러나 기기와 사용자의 접점인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생각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비슷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앱 화면에서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뒤적일 때, 현금인출기의 터치스크린을 누를 때 등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 모두 UX에 포함된다.

UX가 화두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사용자가 기기 사용을 불편하게 느끼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기와 기능이 사용자와 만나는 부분, 즉 인터페이스(UI)가 복잡하면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불편하고 불쾌하기 마련이다. 불쾌한 UX는 대부분 불편한 UI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불편한 UI는 사용자에 대한 고려보다는 개발 편의와 효율에 초점을 맞추면서 만들어진다. 그동안 특정한 기능의 구현에만 매달리는 개발자와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경영자의 요구가 결합되면서 정작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써야 하는 사용자의 경험은 가볍게 여겨지는 일이 많았다. 여러 기능을 하나의 기기가 대신하는 물건이 많아지면서 특히 UX가  부각됐다. 좀 더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모르지만, 없다면 익숙해지거나 혹은 매번 불쾌함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우리 물건을 쓸까?’라는 고민이 UX라는 큰 주제를 낳은 것이다.

처음 도구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기술과 더불어 UX 개념도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UX는 디지털 기기뿐 아니라 모든 물건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주제다. 자동차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기능과 요소들이 하나의 제품에 모여 있는 자동차 역시 UX가 중요하다. 특히 자동차는 단순한 기기 이상의 사회문화적인 의미와 영향 등 무형의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진 물건이다. 그래서 기능 관점뿐 아니라 폭넓은 관점에서의 UX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 UX 외에도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제품 UX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가장 많은 기능과 요소를 담는 럭셔리 대형 세단이라면 더욱 그렇다.

전통적인 개념의 럭셔리 대형 세단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특별함과 존재감,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보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풍요로움과 품격이다. 좋은 것을 많이 담았다는 사실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용자에게 만족감과 편안함 같은 경험을 안겨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뛰어난 성능과 첨단 기능을 가득 담는 것이 기술의 영역이라면 그 기술을 사용자의 요구와 감성에 맞춰 구현하는 것이 UX의 영역이다. 특정한 기능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기계나 전자장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이상, 기술은 차를 이루는 요소이지 차의 전반적인 개념이나 성격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감성을 채우는 목적이 큰 럭셔리 대형 세단에서는 특히 기술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차를 알릴 때 기술을 내세우는 비중은 클 필요가 없다. 기술 이외에 많은 부분에서 최고를 집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고, 기술 외에도 알려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2012년 가을, 독일 모 자동차 회사의 연구시설을 방문했을 때다. 이듬해 데뷔할 최상급 럭셔리 대형 세단에 쓰일 각종 최신 기술을 미리 살펴보는 자리였다. 물론 대부분 현재 여러 차에 쓰이는 개념과 범위를 확장한 것이어서 기술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술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특정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고,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기능이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기술을 다듬어나가는 과정을 거쳐 제품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형 시뮬레이션 설비를 이용해 가상 세계에서의 경험을 자료화하고 시험용 차에 올려 실제 상황에 가깝게 구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 기술이 녹아든 차를 실제로 접했을 때는 각각의 기술 설명이나 과정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뒷좌석에 앉았을 때 좌석과 공간이 주는 아늑하고 안락한 느낌,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것들의 고급스러운 감각, 운전할 때의 편안한 기분 등 오히려 감성적인 부분이 크게 와 닿았다. 물론 그런 경험은 높은 수준의 기술을 잘 정제해 좋은 감각을 자아내도록 구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뒷좌석 중심의 럭셔리 대형 세단이라면 소비자가 차에 기대하는 것을 충족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있는 그대로를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럭셔리 대형 세단 오너라면 기술과 기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일 만큼 한가하지 않다. 얼리 어댑터 기질이 있는 젊은 오너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을 것이다. 포장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평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동차 회사들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최고급 대형 세단의 개발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올해 초 현대자동차 황정렬 전무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운전자나 동승자가 ‘뭔지 모르지만 편안하네’라고 느끼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고급 대형 세단 개발에서는 바람직한 생각이다. 가장 좋은 기술은 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아가고, 기술에 신경 쓰지 않아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술 자체도 중요하지만, 쓰는 사람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