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할 필요는 없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격변기는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고, 우리나라는 미래 자동차 산업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매해 450만대 이상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800만대 생산을 기록한 세계 5위의 현대차 그룹이 있다. 현대차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다. 지난 몇 해 동안 10퍼센트 대의 영업 이익률을 보였으며, 환율과 일본 메이커의 공세에 주춤한 2015년 1분기에도 7.6퍼센트의 수익률을 보일 정도로 탄탄한 회사다. 그런데 요즘 현대차 주가가 급락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22만원대였던 주가가 올해 들어 16만~17만원대로 떨어지더니 6월에는 13만원대까지 추락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말 세계 시가총액 순위에서 337위였던 현대차는 지난 6월 3일 500위 밖으로 사라졌다. 반면 일본의 토요타(21위→18위)와 혼다(190위→165위), 닛산(270위→226위) 등은 약진했다.

물론 이 결과는 일본의 엔저 공세에 의한 단기적인 것일 수 있다. 유로화가 안정되면 수출 시장이 회복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환율이라는 요소에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 이렇게 휘청거린다면 그건 지난 두 번의 금융 위기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되기에 입맛이 쓰다. 그 대가는 결국 국민들이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우리나라 경제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표되는 비교 우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원가나 환율이 급등하거나 값이 싼 제품이 등장해 비교 우위가 사라지는 순간마다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기술과 효율화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지만 원천기술은 항상 부족하다는 게 중장기적인 문제로 진단되곤 했다. 주변 상황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우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분명 지난 10년 동안 가장 성공적으로 성장한 자동차 회사다. 하지만 성장 배경에는 중국과 인도, 러시아 등 제3세계 시장에 재빨리 생산 공장을 세우고 성장세를 주도한 민첩한 판단과 함께 철판부터 자동차까지 모든 공정을 수직 계열화한 이른바 경영 합리화가 있었다. 현대차는 계열사인 현대파워텍에서 자동변속기까지 자체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자동차 회사다. 그렇다면 왜 현대차의 주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걸까? 애널리스트들은 내부 거래로 효율화를 꾀하고 재원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 성장하고 수익을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격변기는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고, 우리나라는 자동차 산업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바로 자동차의 원천기술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자동차 설계나 제어에 대한 원천기술이 강점은 아니었다. 엔진 제어는 보쉬, 섀시 제어는 콘티넨털, 구동장치는 마그나, 변속기와 조향 장치는 ZF처럼 원천기술을 보유한 대표적인 부품업체가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물론 현대차 계열사인 현대모비스가 매출로는 세계 5대 부품업체이기는 하지만 매출의 많은 부분이 국내외 현대차 계열사에서 나오므로 현대차를 위한 부품업체라고 할 수 있다(이 또한 수직 계열화의 효율성이기는 하다).

우리나라가 절대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전기차와 함께 오고 있다. LG화학과 삼성 SDI는 세계 유수의 배터리 및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제작사다. 이미 LG화학은 전 세계 20여 개 자동차 회사와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삼성 SDI도 BMW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와 공급 계약을 맺고 있다. 이들이 ‘우리는 LG화학(또는 삼성 SDI)에서 배터리를 공급받고 있습니다’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있다는 게 우리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준다. 전기차는 자동차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공정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 그 핵심은 ‘전문기업’과 ‘모듈’에 있다. 배터리나 모터, 인포테인먼트 같은 모듈을 전문기업에서 제공받고, 자동차 회사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조립하는 ‘체계 통합’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이 거대 자동차 회사가 부품이나 모듈 공급자를 좌지우지하는 수직적인 관계였다면 이제는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 전문성을 인정하는 수평적인 관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자동차 회사는 지금처럼 거대한 공장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정확한 시각에 도착한 모듈을 통합해 조립하기만 하면 된다. 자동차 산업에 전혀 기반이 없더라도 모듈을 공급받고 이를 통합할 소규모 인력과 설비만 있으면 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건 이미 테슬라가 보여줬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려는 이때 다행히도 두 가지를 갖고 있다.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와 세계 최고의 배터리 제작사다.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재편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우선 LG와 삼성은 자동차의 전기-전자 관련 전문기업으로 더욱 성장하고 전문화돼야 한다. 이미 자동차 부품 관련 사업에서 둘의 경쟁은 시작됐다. 혹자는 이들이 직접 전기차를 만들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부인했다고는 하지만 굳이 이 시점에 부인할 필요는 없다. 이와 동시에 현대차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스스로 하겠다는 부담감을 벗어야 한다. 앞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이 많아질 자동차 생산에서 대규모 조립공장을 갖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것이고, 스스로 제작하는 부품은 전문기업을 이기기 어려워질 것이다.

전문적인 부품 기업의 육성과 자동차 제작사의 유연성, 체계 통합 능력이 수평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뛰어난 제조기술과 효율성이 이와 결합해 미래의 패러다임을 주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누가 이런 재편을 주도할 것인가?’다. 그건 바로 정부다. 정부는 업계에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기업이 투자하고 개발하기에 어려운 원천기술의 개발과 연구를 담당해야 한다. 지난 5월 세계 전기차 학술회의(EVS28)에서는 미국 에너지부의 차세대 배터리 기술개발 담당 매니저가 기조연설을 했다. 미국은 정부가 앞장서 미래형 배터리의 소재를 개발하는 등 개별 기업이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선행 연구를 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우리나라의 소중한 원천기술과 기업이 국제 자본에 의해 팔려나갈 수도 있다. 국경이 의미가 없는 신자유주의 자본경제 체제에서는 더 이상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는 건 제5공화국에서처럼 정부가 강제하는 산업합리화가 아니다. 정부가 사전 연구와 원천기술 개발을 주도해 개별 기업에게 미래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재벌 사이의 과도한 경쟁과 눈치 보기로 기회를 놓치거나 반대로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현재의 먹거리를 나눠먹는 합종연횡으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가 우리나라를 비껴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앞서 나가거나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종속적인 관계로 추락할 것이다. 이미 시간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