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휘발유 하이브리드 모델은 숱하게 타봤다. 하지만 디젤 하이브리드는 처음이다. 랜드로버는 휘발유 대신 디젤 엔진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결합한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하이브리드를 선보였다. 랜드로버가 ‘세계 최초의 프리미엄 디젤 하이브리드 SUV’라고 자랑하는 두 녀석은 3.0리터 V6 터보 디젤(SDV6) 엔진에 35킬로와트의 전기모터를 얹는다. 그럼 왜 랜드로버는 휘발유가 아닌 디젤을 하이브리드로 선택했을까? 단순히 생각하면 연료효율을 높이고, 갈수록 엄격해지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제원표를 찬찬히 살피면 조금 이상한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경우 그냥 3.0리터 디젤 모델과 디젤 하이브리드 모델의 복합연비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복합연비는 리터당 겨우 0.3킬로미터 높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킬로미터당 6그램 낮을 뿐이다. 오히려 크게 차이 나는 건 출력과 토크다. 레인지로버 스포츠 하이브리드의 모터 합산 최고출력은 340마력, 최대토크는 71.4kg·m다. 그냥 디젤 모델보다 출력이 48마력, 토크가 10.2kg·m 높다(레인지로버의 V6 디젤 엔진은 SDV6가 아닌 TDV6라 하이브리드 모델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랜드로버가 디젤 하이브리드를 내놓은 진짜 이유는 효율이 아니라 성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작은 엔진으로 더 나은 성능을 끌어내기 위해 전기모터를 결합한 것 아니냐는 거다. 디젤 엔진이 휘발유 엔진보다 토크가 높은 것도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는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모델처럼 적극적으로 전기모터가 개입하지 않는다. 전기 모드로만 달릴 수 있는 거리도 길지 않다. 보도자료에는 전기 모드로만 최고시속 48킬로미터를 낼 수 있으며, 1.6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짧다. EV 모드로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 금세 엔진이 깨어난다. 오토 스타트-스톱 기능이 있어 멈추면 엔진이 자동으로 꺼지는데, 그 시간도 길지 않다. 교차로에선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엔진이 살아난다. 재미있는 건 하이브리드인데 오토 스타트-스톱 기능을 끌 수 있는 버튼이 따로 있다. 이것만 봐도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차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좋은 건 일반적인 휘발유 하이브리드 모델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덜하다는 거다. 시동 버튼을 누르면 조용히 엔진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걸걸거리는 엔진 소리가 실내로 바로 들이친다. 그러다 이내 조용해지지만 곧 엔진 소리가 다시 커진다. 정속으로 달릴 땐 중간 중간 엔진이 계속 꺼졌다 켜지는데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바짝 신경 쓰지 않으면 디젤 모델을 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반 가속은 여느 디젤 모델처럼 굼뜨지만 한 번 탄력이 붙으면 밀어붙이는 힘이 좋다. 좌우로 출렁이며 거구를 힘차게 몰아친다. 저속으로 달릴 때도 적당히 소음과 진동이 살아 있어 휘발유 하이브리드 모델처럼 어색하지 않다. 불쑥 전기 모드로 바뀌어 운전자를 당황하게 하는 일도 드물다.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는 솔직히 지구를 걱정하는 모델은 아니다. 전기모터는 엔진을 아주 조금 쉬게 할 뿐이다. 그런데도 하이브리드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레인지로버의 사치스러움은 그대로 누리면서 환경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다. 얼리어답터가 될 수도 있다. 국내에서 판매 중인 디젤 하이브리드 모델은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그리고 메르세데스 벤츠 E 300 블루텍 하이브리드뿐이다. 글•서인수

SPECIFICATION  기본 가격 1억876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AWD, 5인승, 5도어 SUV 엔진 V6 3.0ℓ DOHC 터보 디젤+모터, 340마력 (시스템), 71.4kg·m(시스템) 변속기 8단 자동 공차중량 2890kg 휠베이스 2922mm 길이×너비×높이 4999×1983×1835mm 0→시속 100km 가속시간 6.9초 복합연비 10.6km/ℓ CO₂ 배출량 190g/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