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끗발 그리고…
혼다코리아는 지난 2004년 5월 한국에 브랜드를 론칭했다. 당시는 혼다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에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우선 5000만~1억원대 제품이 수입차 시장의 56.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대중적인 수입차 시장은 포드 정도를 제외하고는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일본의 대표적 대중 브랜드인 닛산과 토요타도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시장을 휩쓸고 있는 디젤 승용차 시장도 아직 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시장의 기회를 극대화하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혼다코리아는 간단명료한 라인업으로 접근했다. 3000만원대 중형 세단 어코드와 3000만원 전후의 CR-V는 국산차와 수입차 시장 사이를 파고들어 자신만의 시장을 만들어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출한 라인업이었지만 반년 만에 1475대를 판매하며 수입차 시장 점유율 6.32퍼센트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도 같은 라인업으로 2709대 판매로 점유율 8.77퍼센트를 기록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혼다는 앞선 엔지니어링이라는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어코드는 이런 이미지를 십분 활용해 국산차보다 약간 높은 가격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CR-V의 경우 세계적으로 강했던 크로스오버 SUV의 바람을 한국 수입차 시장에 태풍으로 몰고 온 주역이다. 2005년 혼다코리아 판매량(2079대)의 거의 절반인 1288대를 CR-V가 차지했을 정도로 크로스오버 SUV 바람은 거셌다. 그해 혼다 CR-V는 수입차 베스트셀러 2위, 어코드 3.0은 4위에 올랐다. 당시 연간 판매 1000대가 넘는 모델이 다섯 개에 불과했는데 그중 신생 브랜드인 혼다가 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면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전술에 더 집중하는 게 옳다. 혼다는 이 대목에서도 성공했다."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면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전술에 더 집중하는 게 옳다. 혼다는 이 대목에서도 성공했다. 혼다코리아는 2008년 수입차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고 실질적인 주력 모델도 여전히 어코드와 CR-V였다. 하지만 멀리 보는 전략도 있어야 했다. 브랜드 이미지와 포지셔닝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제품 전략은 어떻게 세울지 등의 전략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혼다의 브랜드 전략과 그에 따른 제품 및 마케팅 전략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2008년 수입차 시장 점유율 20퍼센트를 넘으며 1위를 차지했던 브랜드가 이듬해 곧바로 절반 이하인 8퍼센트대로 수직 추락했다면 브랜드 관리에 심각한 문 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2009년 모든 수입차 브랜드가 금융위기에 따른 환율 폭등으로 원가 부담에 허덕일 때 혼다는 거의 유일하게 원가 압박을 가격 인상으로 전가했다. 소비자들은 브랜드 안정성에 대한 불안감, 더 나아가 배신감을 느끼고 등을 돌리게 됐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었다. 모터쇼마다 명성 자자한 로봇 아시모를 전시하는 등 하이테크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하이브리드 모델은 철저하게 토요타에 패배했다. 파일럿이나 크로스투어러 같은 SUV는 유럽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단종됐다. 젊고 스포티한 이미지를 책임진 시빅은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폭스바겐 골프에 완패했다(심지어 유럽형 시빅까지도).
 

아카디아에서 레전드까지
레전드는 의미가 매우 큰 모델이었다. 혼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고성능과 하이테크 이미지를 전달하는 브랜드 이미지 세터인 동시에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하는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출발은 좋았다. 레전드에 대한 분위기는 출시 이전부터 나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레전드에 대한 기대가 이미 시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에 출시된 대우 아카디아 덕분이었다. 대우가 아카디아라는 이름으로 수입한 2세대 레전드는 당시로는 전례가 없는 대형 스포츠세단이었다. 3.0리터 엔진을 프런트 미드십에 세로로 배치한 구조 덕분에 운동성이 뛰어났고, 더블위시본 서스펜션이 우수한 조종성을 뒷받침했다. 여기에 노면에 가까운 시트 포지션과 낮고 넓은 실루엣까지 정통 스포츠세단의 기본에 충실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전드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훨씬 저렴한 현대 뉴 그랜저 운전자가 아카디아를 내려다봐 품격이 떨어진다는 불평을 들어야 했다. 레전드의 콘셉트를 이해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도 진가를 알아보는 마니아층이 꾸준히 존재하는 등 이미지는 꽤 견고했다.

2006년 출시된 4세대 레전드 판매는 순조로웠다. 반년 동안 459대가 팔렸는데 이는 혼다 전체 판매의 약 12퍼센트에 해당했다. 6780만원이라는 가격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결과였다. 혼다에서 레전드 다음으로 비싼 모델은 3940만원의 어코드 3.0으로 가격 격차가 상당했다. 상황은 이듬해부터 나빠졌다. 연말 모델 변경을 앞둔 어코드 재고 모델이 조기에 정리되면서(밀어내면서) 레전드 판매가 크게 줄었다. 어코드의 공백, CR-V의 수입차 판매 1위 달성, 시빅 시리즈의 선전 등으로 혼다 브랜드의 무게중심은 준중형으로 이동했고 레전드는 자연스럽게 기존 라인업과 동떨어져갔다. 1년 내내 보증 연장 등의 프로모션이 제공됐지만 판매 추이는 개선되지 않았다. 2008년 6월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출시되면서 살짝 회복됐던 판매는 연말에 다시 급격하게 위축됐다. 출시 반년 만에 등록세와 취득세를 지원하는 파격 프로모션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없었고, 레전드는 회복 불능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 1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전 모델 가격을 인상한 혼다 브랜드는 추락을 시작했다. 레전드 역시 2011년까지 국내에서 판매됐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전드의 신화가, 아카디아의 전설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위쪽 그래프는 수입차 시장에서 혼다 브랜드의 판매 비중과 혼다 브랜드 내에서 레전드의 판매 비중을 담고 있다. 한때 20퍼센트 이상까지 차지했던 혼다 브랜드 점유율은 최근 2퍼센트 대에 머물고 있다. 레전드 역시 새 모델이 투입된 올해도 브랜드 내에서 영향력이 미미하다. 아래쪽 그래프는 2005년부터 최근까지 혼다 브랜드와 레전드 판매량을 보여준다. 혼다 브랜드 판매는 2008년 정점을 찍은 뒤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고, 레전드는 최근까지도 집계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판매가 미미하다. 

레전드는 혼다의 기함이다
레전드가 출시된 2006년 6월부터의 관련 기사를 한국수입자동차협회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봤다. 출시 직후인 2006년 하반기엔 <포브스> 선정 ‘가장 안전한 차’에 올랐다는 제품 이미지 기사, 레전드 고객을 태국에서 열리는 LPGA 대회로 초청한다는 고객 관리 프로그램 기사 등이 많았다. 기함에 걸맞은 정보와 프로그램이 다뤄진 셈이다. 하지만 2007년 초부터는 세일즈 프로모션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기함인 레전드를 브랜드 이미지 전달용이나 프리미엄 시장 공략용으로 전혀 활용하지 못한 거다. 오히려 과도한 프로모션 관련 기사는 레전드가 판매 부진에 빠졌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2008년엔 혼다 브랜드의 유일한 프리미엄 모델로 고군분투하며 373대가 팔렸다. 같은 기간 독자적 프리미엄 브랜드의 후광을 입은 렉서스 GS와 인피니티 M 모델의 경우 500대 정도 팔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후 급격히 추락했다. 레전드가 혼다 브랜드 그리고 프리미엄 수입차 시장에 정착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결과였다.

4세대 레전드는 지금 기준으로도 대단히 우수한 SH-AWD 시스템으로 무장하고 에어로다이내믹한 디자인을 내세운 스포츠세단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격은 라디에이터 그릴이 커지고 크롬이 많아진 2008년의 페이스리프트 모델부터 옅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출시된 5세대 모델은 보수적인 고급 세단의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 SH-AWD 시스템도 없다. 일본과 미국에서 판매되는 레전드(어큐라 RLX)는 하이브리드 모델에 SH-AWD가 적용되지만 한국엔 하이브리드 버전이 들어오지 않는다. 아쉬움이 크다. 혼다코리아가 하이테크 이미지를 계속 강조하고 싶었다면(이번 서울모터쇼에도 아시모가 방문했듯이) 기술의 혼다를 대변할 수 있는 레전드 하이브리드 모델이 들어왔어야 옳다.

자원순환법 때문에 이전 모델이 단종됐다고 해도 3년 이상 공백기 동안 혼다 브랜드는 무수한 모델이 들어왔다 사라지는 혼돈을 겪었다. 이럴 때일수록 강렬함과 하이테크 이미지를 지닌 제대로 된 기함이 복귀해 시장 분위기를 정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제품은 일반 모델이었고 심지어 론칭 이벤트도 없었다. 기함을 ‘모시는’ 태도라 볼 수 없다. 가격을 이전 모델보다 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레전드는 판매량에 한계가 분명한 모델이다. 한국에서 혼다 브랜드의 힘은 10년 전보다 약하고, 대중 수입차 시장에는 폭스바겐이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디젤 모델이 없으면 전체 판매량에 한계가 있다. 실제로도 레전드는 신차 효과를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매달 20대 미만 판매에 머물러 있다. 어차피 이럴 거였다면 이미지를 이끌어갈 기함으로 확실하게 규정해 도입하는 게 브랜드 전체를 볼 때 훨씬 효과적이었을 거다.

혼다는 하이테크와 고성능을 브랜드 이미지로 삼으려 한다. 브랜드 기함인 레전드가 이를 보여줘야 한다. 3년여 만에 돌아온 신형은 이전보다 보수적인 분위기다. 하지만 LED 헤드램프와 듀얼 서클 헤드램프와 같은 요소에선 예의 하이테크 & 고성능 브랜드 이미지가 읽힌다. 실제로도 한국의 혼다 제품 중 가장 스포티하기도 하고.

도로 위에서 발견한 기회
5세대 레전드는 디자인도 보수적으로 바뀌었고 큼직한 하이테크 아이템도 빠진 채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임무를 띠고 도입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형은 브랜드 이미지용 스포츠 모델이었지만 초기 판매가 좋았던 탓(?)에 본래 용도는 망각하고 판매 촉진에만 열을 올린 케이스였다. 이와 달리 신형은 애초부터 보다 넓은 계층에 다가가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보편적인 시장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변모했고 가격도 이전보다 싸졌다. 이건 꽤 중요한 대목이다. 어코드는 모델 체인지와 함께 커지고 고급스러워지면서 상급 제품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가격과 이미지 모두 레전드와의 격차가 줄었다. 혼다의 중대형 세단 라인업도 고급스러움과 그에 상응하는 질감이라는 통일된 세일즈 포인트를 갖추게 됐다.

신형 레전드의 겉모습은 확실히 보수적이다. 제네시스와 나란히 놓고 보면 선을 단순하게 사용한 게 흡사하다. 유리창 면적은 오히려 제네시스보다 넓다. 실내를 봐도 굵직한 선과 두툼한 시트가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코드의 디자인 언어와 비슷하지만 한결 고급스럽다. 그런데 운전석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다. 혼다 스포츠 모델의 전유물인 콤팩트한 트윈서클 계기반이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어코드보다 작아 한눈에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도 레전드는 혼다코리아 라인업 중 가장 스포티한 모델이다. 이 차의 스포티함은 출력보다는 조종성능 측면에서 도드라진다. 지금 혼다코리아 라인업에서 앞쪽에 더블위시본 서스펜션을 사용하는 모델은 레전드가 유일하다. 혼다는 예전부터 스포츠 모델에 더블위시본 서스펜션을 고집해왔다. 나아가 신형은 P-AWS라 이름 지은 고차원적인 네바퀴 조향 장치를 담고 있다. 4세대의 SH-AWD는 뒷바퀴에 공격적인 스포츠 디퍼렌셜 록을 더하는 등 조향 특성에 집중한 장치였다. 5세대의 P-AWD 역시 민첩하면서도 안정적인 조종성능 확보에 방점이 찍힌다.

구형은 잘 만든 대형 스포츠세단이었다. 하지만 신형 레전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한다. 디자인은 보수적이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움을 힘주어 말하려 한다. SH-AWD 시스템이 달린 하이브리드 버전을 들여왔다면 이상적이었겠지만 지금 모습도 썩 나쁘진 않다. 낮아진 가격과 함께 보다 넓은 계층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는 조용하고 엔진은 매끄럽게 회전한다. 스트레스가 없다. 하지만 차체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차체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턱을 넘은 다음 서스펜션이 쭉 늘어나면서 노면을 움켜쥐는 감각이 일품이다. 고급 댐퍼와 조화를 이룬 더블위시본 서스펜션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다. 승차감은 부드럽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보디 롤은 서스펜션이 허용하지 않는다. 이 또한 보수적 꾸밈새 뒤에 감춰진 스포티한 본성이다. 코너를 돌아나갈 때는 뒷바퀴 스티어링이 개입하면서 인간의 본능과 다른 감각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뒷바퀴는 과격한 코너링에도 안정감을 잃을 기미조차 없다. 민첩함과 안정감이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코너링 특성이다.  

크렐 오디오는 신형 레전드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하이파이 세계에서 크렐은 소스의 소리를 정확하게 찾아내 파워 앰프로 전달하는 능력(Resolution)이 좋은 프리 앰프로 유명하다. 크렐 프리 앰프를 댐핑 특성이 좋은 진공관 파워 앰프와 조합하면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내겐 신형 레전드의 주행 특성이 바로 이 조합처럼 느껴진다. 기본 성능이 정교하고 민첩한 섀시 위에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소재, 그리고 부드러운 승차감을 수준 높게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혼다의 새로운 기함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미지에 흠이 될 만한 어떤 것도 피하는 게 좋다. 최소한 한국에선 레전드의 상처가 혼다 브랜드의 상처로 직결된다."

전설의 부활을 바라는 쓴소리
6000만원 중반 가격대에서 이런 패키징의 완성도 높은 모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정이 겹쳐 신차발표회가 취소됐다는 점은 매우 아쉽지만 혼다코리아는 지금부터라도 레전드에게 기함에 걸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 홍보 기사는 레전드와 혼다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관련된 내용이 좋다. 럭셔리와 스포츠를 높은 수준에서 조화시킨 마스터피스임도 강조해야 한다. 안락하고 중후한 동시에 잘 조율된 스포츠세단의 피를 품고 있어 혼다 브랜드의 혼을 간직한 모델로 보기에도 손색없다. 세일즈 프로모션 기사는 자제하고, 고객에게 제공되는 혜택은 레전드만의 특별 프로그램 같은 간접지원 형태로 개발돼야 한다. 레전드는 브랜드 앰배서더다. 이미지에 흠이 될 만한 어떤 것도 피하는 게 옳다. 최소한 한국에선 레전드의 상처가 혼다 브랜드의 상처로 직결된다. 같은 맥락에서 2009년 잃어버린 혼다 브랜드의 이미지 회복은 레전드의 부활로부터 가능하다. 전설은, 돌아올 수 있을까?  에디터•김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