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버리고, 쓰고 또 버리고
이번 서울모터쇼에서 닛산은 풀 모델 체인지된 3세대 무라노를 공개했다. 타케히코 키쿠치 한국닛산 대표는 이 차를 ‘닛산 SUV의 플래그십’이라 지칭했다. 신형은 고급스럽고 매력적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다양한 디자인 시도로 우왕좌왕하던 닛산의 디자인 언어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내 마음속에선 문득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모델은 몇 년이나 팔까? 혹시 또 한 번 다른 모델이 밀려나는 거 아냐?’ 2008년 두 개의 SUV 모델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던 한국닛산은 공교롭게도 최근 몇 년 동안 SUV 라인업에 심한 변화를 주었다.

닛산은 로그와 무라노로 2008년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이듬해엔 균형이 잘 잡힌 제품 라인업을 구축했다. 매출과 판매량을 꾀할 수 있는 중형세단 시장에 알티마를 투입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닛산 스포츠카의 대표주자 GT-R과 370Z를 이미지 모델로 포진한 것이다. 포르쉐를 위협하는 GT-R과 전설적인 페어레이디의 후손인 370Z는 ‘기술의 닛산’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적격이었다. 나아가 고성능 이미지로 볼륨 모델의 판매와 수익성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매우 이상적이고 정확한 포트폴리오 구성이었다. 고성능 가솔린 엔진의 이미지는 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디젤 엔진의 부재를 가리기에 그만이었다. 단순한 대중차가 아니라는 차별화된 이미지도 효과적인 포석이었다. 엔화 강세로 일본 브랜드가 위축되는 당시 분위기에서도 정면돌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09~11년까지 닛산은 알티마의 선전과 두 SUV의 선방으로 수입차 시장에서 3퍼센트대 점유율을 보이며 엔고를 이긴 성공적인 일본차 브랜드로 우뚝 섰다.

하지만 엔고 여파가 가시고 다른 일본 브랜드들이 하강세를 멈추거나 반등을 꾀하던 2012년, 닛산의 점유율은 1퍼센트대로 추락했다. ‘효리차’라는 애칭으로 유명세를 탄 큐브가 2011년 8월 출시 이후 5개월 만에 2200대 이상 팔릴 만큼 성공했던 터라 닛산의 하향세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닛산 브랜드는 큐브 덕분에 3800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큐브 출시와 함께 기존 모델 판매가 급감한 건 일시적 쏠림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2년엔 큐브를 포함한 모든 모델의 판매가 급격하게 위축됐다. 원인은 단 하나밖에 없다. 딜러 네트워크에 취약점이 드러난 거다. 작게는 팔리는 모델에만 집중하는 근시안적 경영, 크게는 신모델의 상승 효과를 사업 규모 확대로 연결할 수 있는 브랜드의 비전 제시와 준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특히 닛산은 이 기간에 최대 딜러를 잃는 등 매우 큰 규모의 흔들림이 있었다. 어쨌든 큐브 출시 이후 닛산은 알티마와 큐브 이외의 모델은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지경이 됐다. 개국공신 로그와 무라노는 2010년 784대나 팔렸지만 2012년 겨우 111대밖에 판매되지 않았고, 2010년 판매량이 150대에 달했던 이미지 메이커 GT-R과 370Z의 2012년 판매 합계는 고작 24대에 그치며 완전히 지워졌다. 2012년의 패닉 이후 닛산은 거의 매년 신모델을 내놓고 기존 모델을 단종하기를 반복했다. 2013년 쥬크 출시와 함께 로그-무라노는 실질적으로 단종됐다. 패스파인더에 캐시카이까지 더해진 2014년엔 큐브의 단종이 있었다. 매년 주력 모델이 변동됐던 셈이다. 한때 닛산의 희망이었던 큐브의 단종은 특히 심각하다. 2000만원 초반 가격의 큐브는 국산차 고객을 닛산뿐 아니라 수입차 시장 전체로 유인하는 ‘입구 모델’이었다. 약 5000명의 고객 중 상당수가 생애 최초 수입차로 이 차를 구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닛산과 수입차 브랜드에 대한 배신감 또는 불안감을 심어주는 부정적 교육 효과도 피할 수 없다.

쥬크는 겉모습부터 실내 분위기, 터보 파워트레인의 성질까지 통통 튀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닛산 브랜드의 ‘재미’를 보여주기에 그만인 모델. 하지만 이 차 출시 이후 로그와 무라노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진 건 큰 문제다.

그뿐만 아니다. 편안하면서도 스포티한 캐릭터의 로그와 무라노가 단종되면서 선보인 쥬크는 완전히 젊은 차다. 패스파인더는 반대로 대단히 보수적이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모델이다. 제품만 바뀐 게 아니라 SUV 라인업의 캐릭터까지 완전히 달라진 거다. 이전에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꽤 잘 달리는 매력에 로그나 무라노를 구입했던 초기 고객들에게 지금의 닛산 SUV들은 상당히 낯설다. 초기 고객들은 브랜드 인지도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으로 브랜드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만큼 브랜드 충성도가 높다. 닛산은 소중한 고객 상당수를 잃어버렸다.

왜 닛산은 모델을 자주 교체하는 걸까? 물론 신형 로그가 르노삼성에서 생산하는 ‘국산차’로 바뀌고, 큐브가 더 이상 미국에서 판매되지 않는 등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세일즈는 신모델을 먹고 산다’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이뤄진 일로 보여지기도 한다. 중장기적인 제품 전략을 바탕으로 한 신모델 투입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같은 세그먼트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로그와 캐시카이 사이의 10개월 공백을 이해할 수 없다. 서울모터쇼에서 키쿠치 사장이 말한 대로 신형 무라노가 이번 회계연도 내에 다시 도입된다면 패스파인더가 그간 해온 역할도 무의미해진다. 기존 무라노는 파는 것도, 팔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1년 이상 방치됐다. 그런 채로 영업 현장에선 고객에게 무라노가 단종됐으니 패스파인더를 사게끔 유도해왔다. 한국닛산은 일선 영업사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것이다. 고객들은 배신당한 기분을 느낄 테고. 모두 차치하더라도 패스파인더와 신형 무라노의 위치와 역할을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숙제다. 단순히 7인승과 5인승이라고 구분하기엔 두 모델의 가격적 위치가 매우 가깝다. 나아가 현재 닛산의 판매량 수준에선 비슷한 가격대의 두 모델이 공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신모델 투입에 의존하는 건 앞서 말했듯 신모델만 팔리고 기존 모델은 잊히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조짐은 이미 신모델 사이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2013년부터 판매된 쥬크는 르노삼성 QM3와 쉐보레 트랙스가 일으킨 B 세그먼트 크로스오버 붐에 힘입어 지난해 994대 팔렸다. 한 달에 83대꼴이다. 하지만 올해 1분기 판매량은 144대로 한 달에 50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캐시카이로의 쏠림이다. 캐시카이의 올해 1분기 판매량은 654대로 월평균 220대 수준이다.

지나치게 잦은 모델 교체는 매우 해롭다. 모델 수명이 불안정하면 중고차 가격 하락으로 직결되고, 이미 구매한 기존 고객들은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다. 새로 구매하려던 가망 고객이 구매를 주저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영업사원들은 고객과의 상담에 애로가 많고, 딜러는 사업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는다. 서비스 부품의 재고 증가라는 문제도 있다. 전반적인 비효율이다.

스포츠 모델이 사라졌다
세계적인 명성과 전통을 지닌 GT-R과 370Z는 스포츠카 장르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차들은 한국닛산 초기인 2009~10년 무수한 뉴스와 화젯거리를 만들어냈다. GT-R이 20대 이상, 370Z가 100대 이상 팔리는 등 의미 있는 판매 실적까지 기록했다. 하지만 2011년 큐브 출시 이후 이어진 빈번한 모델 교체, 독일 브랜드들의 새로운 경쟁 모델 출시 같은 여파로 안팎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당연히 기삿거리의 양도 줄어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난해 판매량은 두 차를 합쳐도 10대를 넘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다.

이들은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존재하는 모델이다. 끊임없이 홍보에 노출돼야 한다. 길거리에서 보이는 한 대 한 대가 간판이자, 고객 한 명 한 명이 브랜드 홍보사절이다. 그러기 위해선 전술이 필요하다. 소중한 고객의 브랜드 충성심을 높이고 기삿거리를 양산할 수 있는 스포츠 드라이빙 이벤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정반대다. 심지어 한국닛산엔 현재 두 모델 모두 시승차가 없고, 370Z는 재고 부족이라는 이유로 올해 3개월 동안 단 한 대도 출고되지 않았다. 370Z의 모습은 이번 서울모터쇼에서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모델 수명이 다 돼서 그렇다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GT-R은 세계에서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이 가장 빠른 스포츠카이며 포르쉐 911 터보조차 경계하는 존재다. 매년 스페셜 에디션을 만들어내는 등 닛산 본사에서도 소중한 홍보대사의 생명력 연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따라만 해도 일단은 성공이다. 370Z 역시 여전히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스포츠카 중 하나다. 니스모 에디션 등 스페셜 모델도 만들어지고 있다. 죽게 내버려둘 이유가 없단 의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술의 닛산’을 증명해 보여줄 홍보대사가 이미 죽고 없다. 다른 브랜드들은 갖지 못해 안달인 소중한 존재들인데 말이다. 안타깝지만 닛산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제품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유럽을 휩쓸고 한국에 상륙한 캐시카이는 도심형 크로스오버 세그먼트의 빈틈을 잘 파고들었다. 성능과 쓰임새, 옵션 등을 아우른 상품성도 뛰어난 수준. 판매량을 책임지는 볼륨 모델로 닛산 포트폴리오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진흙 속에서 찾은 진주, 패스파인더
패스파인더의 존재 이유를 잘 몰랐다. 홍보나 마케팅도 매우 조용했고 지금까지 차를 타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디자인의 7인승 ‘피플 무버’라는 구성 때문에라도 재미없고 그저 그런 차일 거라 지레짐작하기 쉬웠다. 그래서 이번에 반드시 시승차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닛산은 이미 매각이 결정된 시승차를 <모터 트렌드>를 위해 이틀이나 내주는 위험을 감수했다.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기술의 닛산이라는 이미지는 전기차 리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 차는 애써 전기차임을 어필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 자동차처럼 편안하고 일반적인 기준에서도 매우 우수한 점이 많다. 현실감 있고 자연스러운 전기차라는 점은 역설적으로 닛산 기술의 저력을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해 한국닛산은 위험을 감수하길 잘했고, 나는 패스파인더를 만난 게 감사했다. 패스파인더는 최고급 세단을 포함해 최근 몇 년간 타본 차 중 주행질감이 가장 뛰어났다. 노면의 거친 감촉이나 차체 진동이 실내로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글자 그대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도로나 타이어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차체에서 공진을 일으키는 일 없이 완벽하게 흡수되고 차단됐다. 넓은 실내는 외부의 불쾌함을 완벽하게 차단했고 요철에도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가격대를 뛰어넘는 최고급 리무진의 질감이었다. 닛산의 기함이라 불러도 손색없었다. 실용성도 뛰어나다. 바닥 높이는 낮은 편이라 오프로드에 적합하지 않지만 대신 타고 내리기 쉽다. 인피니티 JX35(지금의 QX60)의 그것과 같은 EX 플렉스 2열 시트의 도움도 크다. 140밀리미터나 슬라이딩되고 레버 하나로 손쉽게 접혀 3열 시트를 제대로 쓸 수 있게 한다.

치장보다 내실이 뛰어난 패스파인더는 닛산 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완성도를 증명한다. 무덤덤한 외모가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지만 어떻게 경험하게 하느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기함급 품질에는 6기통 VQ 엔진의 낮은 연비도 감수할 가치가 있다. 디젤 엔진으론 패스파인더의 미끄러지듯 달리는 거주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별하지 않아 더 특별한 리프
리프는 전기차가 아니다. 아주 잘 만들어진 해치백 승용차인데 원동기가 전기모터일 뿐이다. 다른 많은 브랜드처럼 미래의 전기차를 위한 쇼케이스나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오늘 당장 사용해도 흠잡을 곳 없는 우수한 제품이란 얘기다. 리프는 BMW i3와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i3처럼 첨단 복합소재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개발된 차체구조를 쓰지도 않는다. 친환경적인 인테리어 소재를 사용했다고 광고하는 일도 없다. 계기반의 몇 가지 특이한 정보창이나 조종간처럼 생긴 변속 레버를 제외하고는 일반 승용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실내 소재도 요즘 승용차들과 큰 차이 없다. 마치 i3 발표회에 가서는 “잘 봤어요. 신기하네요” 한 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리프를 타고 갈 것만 같은 현실감과 자연스러움이 이 차의 무기다. 실제 주행품질도 일반 승용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i3는 구름저항을 최소화한 얇은 타이어를 신은 채 제한된 접지력과 에너지 회생력을 높이려고 회생제동 기능을 일부러 강하게 설정했다. 반면 리프는 머릿속에 담아두고 운전해야 할 특이사항이 없다. 잘 달리고 잘 돌고 잘 멈추는 기본기에 충실하며, 승차감이나 정숙성 등 거주성에서도 전기차만을 위한 특별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일반적인 기준으로 매우 우수한 자동차다.

패스파인더는 닛산 모델 라인업의 숨은 보석이다. 7인승 피플 무버에서 최고급 리무진의 주행질감을 경험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일상적으로 쓰기 편한 구성에 공간 활용도도 뛰어난 편. 그럼에도 거리에서 이 차를 만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알티마 3.5를 버리지 마세요
알티마 3.5는 2010년만 해도 1755대 팔리며 닛산 전체 판매량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졌다. 그런데 지난해엔 겨우 70대 판매에 그쳤다. 이는 2200여 대 팔린 알티마 2.5의 30분의 1도 되지 않는 양이다. 불경기인 경제상황과 다운사이징 트렌드에 밀려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축의 속도와 정도가 너무 심하다. 물론 신형 알티마의 X트로닉 변속기 성능이 향상되면서 2.5 모델의 상품성(개선된 성능, 탁월한 연료경제성)이 성큼 올라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스포츠카들이 한국닛산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던 것처럼 최근 닛산 라인업이 작고 경제적이며 저렴한 모델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에 휩쓸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브랜드가 큰 규모의 대중적 시장으로 이동하는 건 매출과 시장점유율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그건 브랜드 이미지가 적절하게 지켜지고 관리됐을 때 일이다. 고성능 또는 프리미엄 같은 상위 모델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는 하위 모델도 그 후광을 입어 현재 가격이 경쟁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반면 그렇지 못한 브랜드는 할인 판매 등 세일즈 프로모션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이는 수익성 악화와 브랜드 충성도 저하로 이어진다. 브랜드 마케팅과 이미지 모델은 그래서 필요하다.

알티마 2.5의 현재 품질과 완성도라면 이미 과거에 베스트셀러였던 적 있는 알티마 3.5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3.5 모델 시승을 원했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만 남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차별성의 부족이다. 2.5와 3.5 모델의 가격 차이가 크지 않듯 두 모델 사이의 장비 차이는 엔진과 패들시프트뿐이다. 이미 풀 옵션 체제인 2.5에 비해 3.5는 외관과 인테리어와 장비에서 전혀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결국 특별한 고성능 세단을 원하는 소수의 고객을 제외하고는 전혀 매력이 없는 셈이다. 두 번째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완성도다. 알티마 2.5는 파워트레인과 섀시의 조화가 대단히 뛰어나다. 천천히 달릴 때나 빠르게 달릴 때나 안정성과 주행감각이 한결같아 안락하면서도 즐겁게 운전할 수 있는 차다. 그런데 3.5 모델은 이 균형이 약간 어그러져 있다. 닛산의 보물인 VQ 엔진이 선사하는 고성능은 좋지만 엔진 무게 때문에 차체 앞부분이 무거워진 데다 강한 출력이 일으키는 토크스티어까지 더해져 주행안정성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아가 무거운 엔진에 맞춰 단단하게 조인 서스펜션은 2.5 모델에서 감탄을 자아냈던 탄탄하면서도 안락한 승차감을 다소 앗아갔다.
 

닛산은 GT-R과 370Z라는 스포츠카 카테고리의 위대한 유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이미지 캐리어로 되살리기 힘들다면 알티마 3.5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지금 제품의 구성을 새롭게 손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외관에서 뚜렷하게 차별화를 시키고 스포츠세단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이상 지금 상태의 알티마 3.5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안락함을 원하는 고객은 아예 3.5 모델에 관심조차 두지 않게끔 하고, 퍼포먼스 드라이브를 원하는 고객만을 겨냥해 차를 세팅하면 지금의 약점은 오히려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고 만족도까지 향상될 수 있을 거다. 어쨌든 알티마 3.5의 부활은 닛산 브랜드의 가치 하락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 중 하나다. 물론 나는 스포츠카 라인업의 부활을 강력히 바라지만…, 솔직히 쉽지 않아 보인다.

희망은 있다
한국닛산과 딜러 가족들은 자신이 팔고 있는 제품들이 얼마나 우수한지 잊어버린 듯하다. 최근 반복되는 리콜, 신형 제품의 더딘 출시 등으로 의기소침해졌을 수도 있다. 또한 한국닛산은 그룹 구조상으로도 르노 본사와 한국의 르노삼성과 관계가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로그가 단종된 것 역시 닛산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흔들릴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술의 닛산이라는 표현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번에 시승해본 모델들, 특히 가장 보수적일 것 같은 중대형 SUV 패스파인더와 구동 시스템에만 집중하다 기본기는 놓치기 십상인 전기차 시장의 리프를 경험해보면서 그 탄탄한 기본기에 감탄했다. 이전에 시승한 다른 닛산 모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진부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적인 면이 있었던 디자인이 알티마와 올 뉴 무라노를 통해 새로운 언어로 정리된 것 역시 닛산의 상품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닛산 가족들은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자기 브랜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남의 주머니에서도 돈을 꺼낼 수 없다. 심지어 시승차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닛산의 매체용 시승차에는 환풍구마다 양키 캔들 방향제가 꽂혀 있다.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기네 차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 신경 쓰이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지나친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자기 제품에 대한 자신감 결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지 솔직히 걱정된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닛산 차는 절대로 다른 브랜드 차보다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다. 유기용제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도 떳떳하게 돌아다니는 브랜드도 수두룩하다.

자동차 브랜드의 모델 라인업은 현재의 베스트셀러, 미래 전략형 모델, 브랜드 이미지 관리용 모델 세 가지 카테고리로 정확하게 계획되고 관리돼야 한다. 닛산 모델 라인업을 보면 알티마가 현재를 잘 지켜주고 있고 캐시카이라는 판매량 1만대를 위한 두 번째 베스트셀러가 추가된 상태다. 반면 장기적 포석이나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위한 모델은 나름의 스토리가 전달되지 않은 채 비효율적으로 방치돼 있다. 고객은 정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브랜드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판매에선 긍정적인 신호가 보인다. 지난해 44퍼센트 성장한 4411대를 판매했고 수입차 시장 점유율도 2퍼센트대를 회복했다. 질적으로도 좋다. 이전엔 신모델 판매만 늘고 기존 모델의 판매가 급격히 위축되는 쏠림 현상이 극심했다. 하지만 가장 최근 출시된 캐시카이는 가장 가까운 세그먼트의 쥬크 판매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패스파인더나 알티마 판매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 이는 딜러 네트워크의 역량이 강화됐다는 신호인 동시에 고객이 자신이 원하는 모델을 닛산 브랜드 안에서 미리 조사하고 결정할 만큼 브랜드 인지도나 이미지가 안정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모터쇼에서 키쿠치 한국닛산 사장은 올해 판매목표가 5500대이며 쇼룸을 16개에서 22개로, 서비스 네트워크는 13곳에서 19곳으로 확장해 질적 성장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그 계획에 반대다. 지나치게 안정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더욱 공격적이어야 한다. 닛산은 그래도 되는 브랜드고 그럴 만한 제품들을 가지고 있다. 급선무는 라인업과 딜러 관리의 안정감 회복이다. 그래야 고객들도 안심하고 닛산 전시장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