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볍다 벌칸의 탄생은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원-77의 차체를 대폭 수정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벌칸에는 애스턴마틴의 차세대 스포츠카에 사용할 디자인 요소가 곳곳에 스며 있다. 차체 패널은 탈거할 수 있다. 애스턴마틴은 벌칸을 트랙에서 몰아붙일 고객들에게 좀 더 공기역학적인 디자인의 패널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다. 지붕은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승인을 받은 롤케이지가 지탱한다. A필러 역시 필요에 따라 제거 가능하다. 2 비범하다 벌칸은 원-77보다 10센티미터 낮고 20센티미터 넓다. 즉 높이는 겨우 1미터 12센티미터에 불과하고 너비는 자그마치 2미터 20센티미터나 된다는 얘기다. 테일램프는 게임 그란투리스모 6를 위해 만든 콘셉트카 DP-100에 적용된 기술을 현실로 끄집어내 완성했다. 거대한 리어스포일러는 밴티지 GT3 경주차에 버금가는 다운포스를 만들어낸다. 벌칸은 딱 24대만 만들어질 예정이다. 가격은 세금을 제외하고도 200만 달러가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3 새로운 시작 앤디 팔머는 마침내 애스턴마틴의 CEO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애스턴마틴을 특별한 사연이 가득한 브랜드로 만들려 한다. 그는 이제야 1단 기어를 넣은 상태다.

1 빠르다 벌칸에는 애스턴마틴 레이싱팀이 특별히 개발한 7리터짜리 V12 엔진이 들어간다. 최고출력은 500과 600, 700, 800마력으로 조절 가능하다. 애스턴마틴은 구매 고객이 V12 밴티지부터 GT4, GT3를 트랙에서 몰아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벌칸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운전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다. 아울러 이를 통해 드러난 실력을 바탕으로 벌칸의 엔진 출력을 각각에 맞춰 조절해줄 계획이다. 변속기는 밴티지 GTE 경주차에 들어갔던 6단 시퀀셜 수동변속기다. 2 우렁차다 벌칸은 결코 얌전하지 않다. 애스턴마틴의 디자인 책임자 마렉 라이히만은 자신했다. “벌칸은 맹수의 포효와 벼락같은 굉음은 물론 불꽃까지 내뿜는 야수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V12 자연흡기 엔진과 여기에 꽉 맞물린 평기어, 굵직한 배기구는 괜히 달린 게 아니다. 벌칸은 애초에 공도용 인증 따윈 생각지도 않고 만들었다. 오롯이 트랙 주행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당연히 소음 규제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애스턴마틴 공장은 예전에 영국 공군 기지가 있었던 RAF 게이든에 세워졌다. 냉전이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 이곳은 핵무기 선제공격이 가능한 비행중대 V-포스(V-Force)로 명성이 자자했다. V-포스란 이름은 비커스 밸리언트(Vickers Valiant), 핸들리 페이지 빅터(Handley Page Victor), 아브로 벌칸(Avro Vulcan)이란 이름을 가진 세 대의 주력 핵폭격기가 모두 이곳에 배치되며 붙여졌다. 그중 삼각 날개를 가진 벌칸은 1965년에 제작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썬더볼>의 첫 장면에 등장했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아울러 이 영화는 애스턴마틴 DB5가 본드카로 출연한 두 번째 시리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애스턴마틴은 본드카의 대명사로 우뚝 섰다.

벌칸과 애스턴마틴은 이번에 두 번째 인연을 맺게 됐다. 애스턴마틴 사상 가장 우렁차고 제일 빠르며 최고로 범상치 않은 스포츠카의 이름으로 벌칸이 선택된 것이다. 아! 애스턴마틴의 새로운 CEO로 영입된 앤디 팔머도 이 동네 출신이다. 그는 RAF 게이든의 남서부 끝자락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너무 끼워 맞춘 걸로 보이나? 케빈 베이컨의 6단계 게임도 있으니 이해 바란다.

애스턴마틴 군단 일당백의 애스턴마틴 구성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명성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팔머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근처에 있는 자동차 부품 제조공장의 견습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학업은 야간에 이어갔다. 그는 생산공학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영국의 자동차 회사인 오스틴 로버에서 일을 시작했다. 닛산에 합류한 건 1991년이었다. 성실히 일한 덕에 제품 기획 총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승승장구해 인피니티 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팔머는 닛산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었다. 지난해 닛산을 떠나기로 했던 그의 결정은 그래서 갑작스럽고 놀라웠다. 다만 그가 던진 한마디에 속내를 짐작할 뿐이었다. “(닛산에선) 정상에 설 수 없을 게 명백했죠.” 즉 곤 회장이 조만간 자리를 떠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단 얘기다. 아울러 스스로 짜놓은 인생 계획의 일정에도 이미 들어맞지 않았다.

“스스로 목표를 세웠어요. 35세엔 팀장급, 45세엔 최고책임자 정도는 돼야지 했죠.” 팔머가 애스턴마틴이 발행하는 잡지 <AM>을 통해 밝힌 말이다. 그는 당시 부모에게 21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가죽 서류가방 얘기도 함께 들려줬다. 가방의 값어치 때문이 아니었다. 속에 들어 있던 메모 때문이었다. “최고경영자가 돼 이사회에 보고할 서류를 넣고 다니면 좋겠구나. 부디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길 바라”라고 써 있었단다. 팔머는 그 가방을 무려 30년이나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해 애스턴마틴의 CEO로서 임원들과 처음 만나던 날에야 그 가방을 꺼내들었다. 비록 당초 계획보다 6년 정도 미뤄지긴 했지만 그는 결국 꿈을 이뤘다.

“(규모 면에서) 끝자리 영(0)이 몇 개 줄어들긴 했지만 기본은 모두 같습니다.” 팔머가 닛산에서 애스턴마틴으로 옮기며 한 말이다. “새로운 차를 개발하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듭니다. (닛산에 있을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외부 투자자들에게 애스턴마틴의 존재 가치를 확신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7년 포드의 품에서 벗어나기 전까지의 20년은 애스턴마틴에게 어두운 시기였다. 목표마저 상실한 채 조타수 없이 흘러갔다. 이후 애스턴마틴의 주주는 유럽과 쿠웨이트를 기반으로 하는 투자사들과 다임러 AG로 개편됐다.

끝까지 달린다 측 면 지지대가 불쑥 튀어나온 시트, 위아래가 싹둑 잘린 운전대, 다기능 TFT 스크린까지 벌칸의 실내는 오로지 달리는 것만 염두에 두고 디자인됐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애스턴마틴 소속 경주선수 대런 터너까지 실내 디자인에 참여했다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그는 벌칸 구입 고객을 직접 지도할 예정이기도 하다.

팔머는 다임러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지난해 애스턴마틴은 다임러 AG 산하 메르세데스-AMG에게 엔진과 전장 기술 등을 공급받기로 하고 5퍼센트의 무의결권 주식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자동차 설계에서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를 공급받는 건 재정적인 지원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는 다행히 다임러 AG의 디터 제체 회장과 긴밀한 사이다. 르노 닛산과 다임러의 소형차 플랫폼 및 파워트레인 공동 개발을 진행하며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팔머는 지난해 떠돌던 다임러의 애스턴마틴 인수설에 대해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애스턴마틴은 큰 회사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큰 회사가 애스턴마틴을 인수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그걸 원할 리도 없고요.” 팔머는 큰 회사의 시스템은 애스턴마틴처럼 빠르고 유연한 조직 문화와도 맞지 않는다며 의지를 분명히 했다.

울리히 베츠는 애스턴마틴이 포드 산하에 있을 당시 CEO로 구원 등판했다. 그리고 102년 역사 동안 수차례 파산했던 브랜드를 심폐 소생해낸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기획한 VH 플랫폼은 애스턴마틴의 모든 모델에 적용돼왔다. 이로써 수익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플랫폼은 이제 10년도 넘은 구식이 돼버렸다. 모든 모델이 너무 비슷해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수익을 창출했지만 이젠 바뀔 때가 됐다.

애스턴마틴은 이미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차세대 모델에 적용할 계획이다. 물론 핵심 가치인 아름다움은 유지될 예정이다. 팔머는 말한다. “우리가 만드는 차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차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섹시한 차란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순수 스포츠카와 GT, 세단 등 각각의 특징을 살려 차별화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팔머의 목표는 2020년 중반까지 1만 대 생산하는 거다. 현재 판매량의 딱 두 배다. 그리고 페라리의 연간 판매량을 초월하는 숫자다. 이를 위해선 애스턴마틴 라인업 확대가 필수다. 팔머 역시 “판매할 모델 수를 늘려갈 겁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했다. 다만 여성 운전자에게도 매력적인 애스턴마틴이 되도록 하겠단 정도는 털어놨다.

아울러 미드십 스포츠카에 대한 욕심도 있다. 지금까지 애스턴마틴은 앞에 엔진이 놓인 구조만 고집했는데 팔머는 애스턴마틴의 고집을 기어코 꺾을 생각이다. “안 하겠다고 선 긋진 않겠어요. 애스턴마틴에겐 페라리 F12를 상대할 만한 초고성능 슈퍼카가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요.”

애스턴마틴은 곧 선제 공습을 개시할 예정이다. 진격할 모델은 바로 벌칸이다. 제원이 화려하다. 가격은 200만 달러 이상, 최고속도는 시속 360킬로미터가 넘는다. 오로지 트랙에만 초점을 두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딱 24명에게만 허락하는 한정판 비밀 병기다. 공습경보는 이미 발령됐다. 조심하시게. 페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