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등장한 페라리 512 BB LM은 512 BB(1976년형)의 레이스 버전이다. 당시 페라리는 F1 레이스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GT나 르망 레이스에는 주로 개인소유 팀이 레이스카를 만들어 참가했다. 하지만 512 BB LM은 다루기 까다로운 차였다. 차는 빨랐지만 페라리 공장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서인지 내구성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1978년 르망 레이스에서도 경주에 참가한 512 BB LM 4대가 모두 리타이어했을 정도다.

자존심이 상한 딜러들과 VIP 고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페라리가 레이스카 개발에 직접 나설 것을 요구했다. 당시 엔초 페라리는 1975년부터 3년간 F1에서 우승하며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에 승낙했다. 그렇게 1979년에 512 BB LM 시리즈 II가 탄생했다. 시리즈 II는 디자인이 양산형과 완전히 달랐다. 피닌파리나의 풍동 실험실에서 다듬은 공기역학 보디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다운포스를 높이기 위해 앞 노즈는 길게 뺐고, 낮은 루프라인을 긴 테일까지 이었다. 리어 스포일러는 페라리 312T2 F1 경주차에서 가져와 달았다. 당시 개정된 규정 안에서 보디 사이즈는 최대한으로 키웠다. 오버펜더로 앞 254밀리미터, 뒤 330밀리미터 폭이 넓어졌다. 차 길이는 410밀리미터나 늘어났다. 512 BB의 상징과도 같았던 팝업식 헤드램프도 삭제됐다. 그런데도 무게는 560킬로그램이나 줄어 1200킬로그램에 달했다.

수평대향 12기통 엔진도 성능이 향상됐다. 카뷰레터 방식 연료분사 장치를 루카스 퓨얼 인젝션 시스템으로 바꿨다. 경량화 콘로드, 오버랩 구간이 넓은 캠축으로 시리즈 I 보다 20마력 올라간 480마력을 발휘했다. 특히 출력보다 중간 영역의 토크 상승에 중점을 두고 세팅했다. 시리즈 II는 당시로선 고성능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온갖 기술이 동원됐다. 그런 노력 덕분에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직선 구간(뮬산 스트리트)에서 시속 328킬로미터를 기록했다. 긴 리어 오버행과 리어 스포일러가 고속 안정성에도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변속기 트러블이 발목을 잡았다. 양산형보다 120마력 높아진 출력이 강화한 변속기까지 갉아먹었다. 변속기 위치도 문제였다. 휠베이스를 줄이기 위해 변속기를 밑에 두고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을 올린 것이 무리수였다. 수평대향 엔진의 장점인 낮은 무게중심의 효과를 전혀 누릴 수 없어서 핸들링에 크게 손해를 봤다.

포르쉐 팀의 압박도 거셌다(전설로 불리는 포르쉐 935 경주차의 전성기가 딱 그 시절이었다). 페라리가 480마력을 만들었던 그때 포르쉐는 700마력이 넘는 엔진 출력을 자랑했다. 당연히 역전 드라마는 없었다. 1979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포르쉐 935는 종합순위 1위부터 4위를 휩쓸었다. 512 BB LM 시리즈 II는 고작 12위에 그쳤다.

이후에도 512 BB LM은 1983년까지 꾸준히 개량되어 다양한 레이스에 참가했다. 그러나 딱히 주목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면에서는 최고였다. 오직 25대만 만들어진 데다 엔초 페라리와 피닌파리나가 직접 만든 경주차라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경제 호황이었던 1980년대 말까지 이 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판매 가격 7만5000달러(약 8500만원)였던 차가 10년 후인 1989년에는 100만 달러(11억3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역사 속 전설로 기억되기보다 희귀한 쇼카의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금도 512 BB LM 시리즈 II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페라리 클럽 행사에 출연하는 단골손님이자, 미국 페라리 히스토릭 챌린지 레이스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본무대에서는 비록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차는 명차라고 불릴 만하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페라리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을 얹은 경주차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글•박진수(미디어 기획자) 촬영 협조•레프리카(www.replica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