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캅 사올게!” 디트로이트로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다. 오랜만에 가는 디트로이트에 대한 걱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로보캅>이란 영화 속에서 치안을 감당할 수 없는 파산한 시 정부를 대신해 사기업이 등장시킨 것이 로보캅이었다. 지금 디트로이트의 상황도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느껴본 디트로이트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최소한 시내 중심지는 그랬다. 주말 동안의 폭설에도 눈이 치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들은 디트로이트의 아담한 지하철인 피플 무버(People Mover) 노선 안쪽은 안전하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거리는 깔끔하고 슬럼화된 것 같지는 않았다. 크라이슬러 방문기에 디트로이트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크라이슬러를 포함한 미국의 ‘빅3’ 자동차 회사들은 지난 2008년 리먼 쇼크 이후로 엄청난 격변기를 겪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GM은 막대한 공적 자금의 수혈과 구조 조정을 통해 정상화에 들어섰고, 크라이슬러는 피아트에게 합병되어 FCA라는 새로운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포드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경영진의 교체와 구조 조정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미국 빅3의 회복이 지금 디트로이트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FCA US LLC 본사 및 테크놀로지 센터
디트로이트 외곽 오번 힐스(Auburn Hills)에 크라이슬러 본사가 있다. 아니, 이제는 FCA US LLC 본사와 테크놀로지 센터다. 이곳은 건물 그 자체로도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미국의 광활한 땅덩이를 과시하듯 낮은 건물이 엄청나게 넓은 면적을 덮고 있다. 그 중앙에 높은 빌딩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지극히 대륙적인 스타일이다. 그런데 어디가 본사 사무동이고 어디가 테크놀로지 센터인지 구분이 안 된다. “연구실은 어디예요?” “건물 아래 전체요.” 중앙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험용 자동차들이 실내 복도를 다니고 있다. 차들이 실내를 돌아다니며 시험을 하다니, 역시 대륙의 스케일은 다르다. 하긴 이곳 FCA 미국 본사 건물은 면적이 50만 제곱미터다. 펜타곤 다음으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의 건물로, 여의도 면적의 약 1.7배다.

테크놀로지 센터 안에는 시제품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파일럿 공장까지 함께 갖추고 있어서 글자 그대로 ‘지붕 아래서’ 모든 개발과 시험 과정이 끝난다. 이 넓은 곳을 모두 견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풍동 실험실을 대표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물론 풍동 실험실 같은 대규모 실험 설비가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이곳에선 4730킬로와트(6343마력) 전기모터로 시속 260킬로미터까지 실험할 수 있다. 공기저항과 회전 모멘트, 소음까지 한 곳에서 측정할 수 있다는 설명은 특별히 인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은 흥미로웠다. 우리를 맞이한 이곳의 책임자인 그레그 패들러(Greg Fadler) 박사는 “FCA와 GM, 포드는 서로 풍동 실험 결과를 공유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기밀 자료를 경쟁사들 사이에 공유한다는 것일까?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각자가 10대만 실험하면 총 30대의 데이터를 얻게 되니 서로 이득이잖아요.” 대륙과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이들은 생각의 폭도 넓었다. 풍동 실험 설비는 회사의 노하우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실험실 정면만 보여주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FCA는 달랐다. 풍동 실험실의 공기가 흐르는 경로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열린 회사였다.

스털링 하이츠 조립 공장은 레이저 용접 루프 같은 정밀한 조립을 위해 완전히 자동화된 설비를 갖추고 있다. 180도로 회전하는 로티세리(rotisserie) 형태의 캐리어가 차의 모든 이음매를 레이저로 확인하고, 로봇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장 공정이 이뤄진다.

월터 P. 크라이슬러 박물관
크라이슬러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아이아코카(Lee Iacocca) 회장의 크라이슬러 부활 스토리나 다임러와의 실패한 합병 등 힘들고 어두웠던 과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꼭 방문할 가치가 있었다. 크라이슬러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크라이슬러는 초창기부터 제대로 ‘미친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3층 구조로 된 이 박물관에는 여느 박물관처럼 시간의 기억을 담아놓은 공간이 있는가 하면, 지하에는 레이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고성능 엔진인 헤미(Hemi)가 전투기 조종수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엔진을 뒤집어 장착한 데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상식 파괴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 <카>에 나왔던 전설의 레이서 허드슨 호크도 직접 보니 반가웠다. 파워스티어링을 최초로 사용한 브랜드가 크라이슬러라는 것도 이곳에서 알았다. 알고 보니 크라이슬러는 그냥 큰 회사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열정이 넘치며, 혁신에 주저하지 않는 회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털링 하이츠 조립 공장
제트 엔진을 생산하는 군수 공장으로 시작한 스털링 하이츠 조립 공장은 크라이슬러의 굴곡진 역사의 증인이다. 이곳이 자동차 공장이 된 것은 폭스바겐에 매각된 이후다. 하지만 이를 크라이슬러가 다시 인수했고 다양한 크라이슬러와 닷지의 모델들을 생산해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가 위기에 처했던 2009년, 이곳은 2010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폐쇄가 결정됐다. 반전은 피아트와의 합병 과정에서 찾아왔다. FCA 그룹은 이곳을 새로운 중형 세단인 신형 200의 생산 기지로 선정하면서 10억 달러의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던 공장이 오히려 주요 전략 모델의 생산 기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10억 달러는 완전히 새로운 차체 공장과 도장 공장에 투자됐다.

스털링 하이츠 조립 공장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최고의 품질이었다. ‘월드 클래스 매뉴팩처링’이라는 슬로건에 따라 차체 공장의 품질 관리에 병적인 수준으로 신경을 썼다. 200을 만드는 과정에서 용접 라인에 배치된 카메라가 조립 공차를 실시간으로 바로잡고, 이도 부족해 하루에 한 대씩 조립된 차체를 공장 옆의 정밀 측정실에서 정밀 표본(알루미늄으로 깎아서 만든 모형)과 비교해 오차를 한 번 더 줄인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만 사용하는 레이저 용접도 이들의 자부심이다. 도장 공정에서도 완전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하체 실링과 코팅 등 기초적 품질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청정실을 거쳐 도장 공장에 직접 들어가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세계 최고의 품질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과거의 고난과 교차하며 절실하게 다가왔다. 

가슴 뜨거운 사람들

결국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실감 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크라이슬러 방문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크라이슬러 브랜드에 대한 사랑이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서 드러났던 브랜트 로젠부시(Brandt Rosenbusch) 박물관 매니저가 대표적이다. 비전문가인 우리를 위해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던 풍동 실험실의 그레그 패들러 박사, 크라이슬러 200에 담긴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인터뷰 내내 우리와 눈을 맞추던 브랜든 퍼로터 FCA US 수석 디자이너도 그랬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FCA와 지프 브랜드의 미래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던 마이크 맨리(Mike Manley) 지프 브랜드 CEO 겸 아시아태평양 지역 COO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만난 FCA 관련 인사들을 관통하는 단어는 한 가지였다. 바로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