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A의 효자, 지프 
지난해 지프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사상 최초로 전 세계 판매량 100만대를 넘은 것이다. 2013년(49만7000대)과 비교해선 39퍼센트나 성장했다. 5년 연속 성장세라는 점도 괄목할 만한 성과다. 나아가 480만대인 피아트 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FCA) 전체 판매에서 5분의 1을 넘는 숫자다.
이런 지프의 성장세에 힘입어 FCA도 마침내 흑자를 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14년 4분기에 세계 모든 지역에서 흑자를 냈다. 2007년 이래로 처음이다. 2014년 FCA는 36억5000만 유로(약 4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는데 대부분은 북미 대륙에서, 그리고 지프와 램(Ram) 브랜드가 기록한 것이었다. 지프와 램은 각각 SUV와 트럭 부문 최강자 중 하나다. 램은 미국 시장에 특화된 픽업 브랜드이므로 그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프는 얘기가 다르다. 지프는 FCA 산하에서 브랜드 이미지가 가장 단단한 브랜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브랜드 인지도도 가장 높다. 아울러 SUV가 대세인 세계 자동차 시장 트렌드를 고려할 때 FCA 소속 브랜드 가운데 가장 미래가 밝은 브랜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FCA는 야심찬 그룹 리빌딩 프로젝트에서 지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지프의 어깨가 무겁다
FCA의 리빌딩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로 이뤄진다. 첫째는 마세라티를 필두로 알파로메오와 다른 브랜드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브랜드 재배치 전략, 둘째는 놀고 있던 이탈리아 공장들을 리모델링한 뒤 지프 레니게이드를 생산해 세계로 수출하는 전 세계적 생산 재배치 전략이다. 이를 위해 FCA는 마세라티 기블리와 르반테 개발 등 이미 엄청난 투자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돈을 퍼부어야 한다. 지난해 FCA의 뉴욕 증시 상장과 함께 지분 10퍼센트의 공개 매각을 통해 페라리를 분리하는 스핀오프 계획을 발표한 것도 자금 조달을 최우선 목표로 두었기 때문이다. 세르조 마르키온네 회장이 투자자들과의 회합에서 “FCA는 2015년에 반드시 세계 모든 판매 지역에서 흑자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5년 계획된 투자액만 95억 유로(약 12조원)다. 대부분이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그리고 지프의 신모델 개발에 투입된다. 마세라티는 르반테와 함께 알피에리 콘셉트의 양산을 결정했고, 알파로메오는 소형에서 중대형에 이르는 풀 라인업을 갖춰간다. 지프 또한 레니게이드를 시작으로 C 세그먼트와 풀사이즈 세그먼트에 새로운 모델을 투입한다. 
이렇듯 FCA의 미래는 브랜드와 돈에 달려 있다. 그리고 FCA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브랜드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프는 수익성과 판매량에서 이미 FCA의 핵심이다. 또 세계적으로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이미지가 단단하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태우고 달리던 윌리스 지프의 모습은 유럽인에게까지 ‘터프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남
겼다. 
자연스럽게 FCA는 유럽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의 1번 타자로 지프를 선택했고 브라질과 중국, 이탈리아에서 지프 모델을 생산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마르키온네 회장은 수익성과 상품성이 가장 우수한 지프의 미국 공장들에 29억 유로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2018년까지 지프 판매량을 190만대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는 2018년 FCA 전체 목표인 700만대의 27퍼센트를 넘는 비중이다. FCA 휘하 브랜드들 가운데 지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프가 잘나간다 해도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다. 속사정이 있다.

잘나가도 속은 타 들어간다
지프 브랜드는 단단한 이미지가 강점이다. 하지만 단단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못하면 ‘딱딱한’ 것, 즉 굳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프 브랜드는 이미 이런 사정을 경험한 바 있다. 바로 크로스오버 시장에의 적응이다.
21세기 세계 자동차 시장을 대표하는 코드 가운데 하나가 SUV일 것이다. 지프는 SUV 대표 브랜드다. 덕분에 지프는 최근 5년간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할 수 있었고 FCA의 큰 기대도 받게 됐다. 하지만 속내는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요즘의 SUV 돌풍은 크로스오버 SUV, 즉 CUV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지프는 이 부문에서 결코 절대 강자가 아니다. 지프의 핵심 모델은 랭글러라는 정통 오프로더이기 때문이다. 체로키는 1980년대에 프레임 구조를 버리고 유니보디 구조를 선택했고 1990년대에는 역시 유니보디 구조의 그랜드체로키가 럭셔리 SUV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지프는 새로운 두 모델에서도 유니보디 구조의 안락함과 경쾌함을 강조하기보다는 ‘트레일 레이티드(Trail rated)’ 같은 엠블럼으로 오프로더 이미지를 최대한 지키려 애썼다. 터프하고 강력한 오프로더 이미지를 희생하면서까지 크로스오버 시장으로 뛰어들 용기와 결단은 부족했던 것이다. 이처럼 시장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한 결과 지프는 세계 SUV 시장에서의 입지가 이전보다 약해졌다. 세계 SUV 시장은 2009년 645만대에서 2014년 1500만대 수준으로 2.4배 성장한 반면 지프는 2008년 49만7000대에서 2014년 102만대로 2배 성장에 그쳤다(출처: FCA 보고서)
이는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2010년 15퍼센트 수준이던 SUV의 수입차 점유율은 2014년 22.3퍼센트까지 급상승했다. 지프 판매량도 2010년 1306대에서 2014년 4675대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수입 SUV 세그먼트 내에서 지프 브랜드의 점유율은 9.5퍼센트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부 구조를 보면 상황은 더 답답하다. 2010년 랭글러가 424대 판매돼 전체 지프 브랜드의 32.5퍼센트를 차지했는데, 2014년에는 신형 체로키가 추가됐는데도 랭글러 판매 비율이 34.5퍼센트(1418대)로 오히려 늘어났다. 크로스오버 SUV가 약진하는 시장과는 정반대로 흘러간 것이다. 그 결과 2014년에는 프리미엄 브랜드이자 SUV의 또 다른 강자인 랜드로버에까지 판매량에서 역전당하는 입장에 놓이고 만다(랜드로버 4675대, 지프 4162대). 수입차 전체 시장으로 눈을 돌려봐도 크로스오버 SUV에 강한 폭스바겐과 BMW, 그리고 랜드로버에 이어 SUV 시장 4위에 머물렀다(출처: KAIDA 신규 등록 자료). 
세계 시장과 한국 수입차 시장의 결과가 보여주듯 지프 브랜드가 랭글러의 오프로더 이미지에 안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FCA 리빌딩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큰 몫을 해야 할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고. 

랭글러 다시 보기
좋든 싫든 랭글러는 지프의 운명이다. 랭글러에는 다른 어떤 차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표현해 ‘대체 불가’의 느낌. 전장을 누비던 윌리스 지프의 생존력과 터프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오늘날 도시의 각박함에 찌든 사람들에겐 바로 이 점이 일탈과 해방의 홀가분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 랭글러는 결코 편한 차가 아니다. 안락함은 아예 포기하시길.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덜덜거리는 진동과 소음에서 구형 엔진의 느낌이 난다. 게다가 변속기는 자동 5단. 가속페달은 무겁고, 풋레스트는 아예 없다. 4WD 시스템도 오프로드에 특화된 로 레인지가 있는 파트타임 방식이다. 앞뒤 차축은 옛날 윌리스 지프와 마찬가지로 차축과 연결된 라이브 액슬 방식으로 비포장에서의 스트로크 확보에 우선을 둔다. 
막상 달려보면 주행성은 그런대로 괜찮다. 포장도로도 비포장처럼 만드는 거칠거칠한 느낌은 어쩔 수 없지만 조종 성능이 생각보다 솔직하고 진득하다. 이유는 낮은 무게중심에 있다. 보디 온 프레임 구조상 무거운 부품들은 모두 아래에 있어서다. 무거운 가속페달과 유순한 엔진 특성은 비포장에서는 좋다. 하지만 포장도로에서는 느긋하게 달리거나, 한 박자 미리 시작하거나, 혹은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제는 ESC 주행안정장치도 적용돼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일단 기름을 많이 먹는다. 체로키보다 두 배 가까이 먹는다. 진동에서 비롯하는 피로감도 크다. 차체 잡소리가 거의 없고 주행 소음도 생각보다 괜찮지만 역시 승용차의 수준은 아니다. 
랭글러는 넓은 시장을 겨냥하는 차가 될 수 없다. 열렬히 지지하는 마니아층은 단단하지만 작다. 그들이 나이를 먹고 은퇴하면 랭글러도 함께 은퇴해야 할지 모른다. 단순히 일탈과 자유의 꿈에 젖어 선택한 사람들에겐 랭글러의 실체가 실망 또는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랭글러에게 지프 브랜드의 미래를 몽땅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지프의 미래, 체로키와 레니게이드
SUV 시장의 또 다른 강자인 랜드로버는 약진하고 있다. 한국에선 지프를 추월했고 세계적으로도 지난해 46만대 이상 팔려 프리미엄 SUV 브랜드로는 대단한 실적을 기록했다. 랜드로버가 지난 5년간 거의 3배에 달하는 급성장을 기록한 데는 타타 그룹의 간섭 없는 지원 정책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이미지의 선택과 집중도 주효했다. 그들은 오프로더 이미지를 ‘여유로움’으로 승화시키고 프리미엄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제품 라인업도 유니보디 구조로 레인지로버의 거주성과 성능을 향상시키는 한편 레인지로버와 디스커버리 두 가지 대표 모델로 라인업을 정리했다(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와 레인지로버 이보크, 디스커버리와 디스커버리 스포츠). 나아가 G4 챌린지 이벤트를 중단하는 등 하드코어 오프로더의 이미지도 점차 뒤로 물렸다. 
이미 FCA도 지프 브랜드의 방향을 새롭게 정했다. 크로스오버 SUV 시장으로의 진격이다. 체로키는 명실상부한 크로스오버 SUV로 탈바꿈시켰고, 향후 SUV 시장의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측되는 B 세그먼트 SUV 시장에는 레니게이드가 투입된다. FCA 그룹은 지난해 5월 발표한 시장예측 자료에서 레니게이드가 투입될 B 세그먼트 SUV가 시장의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상황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쉐보레 트랙스, 르노삼성 QM3, 쌍용 티볼리, 푸조 2008 등 B 세그먼트 SUV가 지난해부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FCA는 2018년 B 세그먼트와 C 세그먼트 SUV 시장의 84퍼센트가 유럽과 중동·아프리카, 아시아 시장에 집중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체로키는 지프 브랜드 변화의 중심에 있다고 봐도 좋다. 체로키는 실제로도 기존 지프 모델들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세련된 디자인은 공격적인 에지가 살아 있고, 실내 분위기도 현대적이고 밝다. 도어트림 등에서 약간 허술한 짜임새가 엿보이긴 하지만 5000만원 초반의 가격대에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을 포함한 주행보조 장치가 완비돼 있는 등 상품성이 뛰어나다. 이 같은 풀타임 4WD 디젤 SUV는 국산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첫 단추는 잘 꿰어진 셈이다. 주행감각도 차분하고 포근하다. 나아가 랭글러를 제외한 기존 지프 모델들과 달리 스포티함도 있다. 특히 댐핑이 단단한 주파수 대응형 쇼크업소버가 스포티한 분위기를 한층 북돋운다. 도로의 이음매나 너울진 곳에서는 필요 이상의 차체 피칭이 일어 약간 과도한 느낌이다. 하지만 수더분하고 편하기만 했던 지프가 적당히 수혈된 이탈리아의 피로 각성했다고 이해하면 불편한 생각보단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게다가 지프 고유의 오프로드 성능은 로 기어와 셀렉터레인 기능 등으로 고스란히 살아 있다. 크로스오버 SUV 세계에서 중요한 변별력이 될 만한 부분이다. 
올해 한국에 출시될 레니게이드는 레고블록 장난감처럼 귀엽고 위트가 살아 있는 디자인을 뽐낸다. 이는 B 세그먼트 SUV의 세계적인 경향을 정확히 읽은 대응이다. 레니게이드는 이에 더해 세그먼트 최고 수준의 오프로드 성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지프만이 내놓을 수 있는 독보적인 색깔의 B 세그먼트 SUV라는 얘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지프 브랜드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 있었다. 

수비하지 말고 공격하라 
지프는 과감해져야 한다. 이전 연재 기사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제품 라인업은 이미지 캐리어(Image Carrier)와 볼륨 제너레이터(Volume Generator)로 정확히 구분돼야 한다. 이미지 캐리어가 볼륨 제너레이터 역할까지 하는 건 겉보기엔 이상적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의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다. 당장은 한 모델만 잘 관리하면 되기 때문에 효율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 모델이 쇠퇴하면 브랜드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미래를 위한 저축 없이 눈앞의 수익만 따라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지프 브랜드의 가까운 과거가 그랬다. 랭글러가 이미지와 볼륨을 동시에 견인했고, 한껏 힘주고 나온 새로운 모델은 새로운 위치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곤란하다. 레니게이드와 체로키는 B 세그먼트와 C 세그먼트 크로스오버 시장을 향한 출사표다. 시의적절하고 옳은 결정인 만큼 이제부터는 과거에 안주하는 수비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지프는 이미 SUV 시장의 맹주가 아니다. 미국 시장에선 강자지만 크로스오버 SUV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국이나 일본에선 미미하고, 프리미엄 SUV의 본토인 유럽에는 아직 생소한 브랜드다. 살길은 과감한 공격뿐이다. 
지프 브랜드만의 움직임으로는 어렵다. FCA는 폭스바겐 그룹만큼 다양한 브랜드를 갖게 됐다. 브랜드 재배치 전략은 이미 시작됐고, 기술 공유의 범위를 넓혀 원가를 낮추는 프로젝트도 한창 진행 중이다. 체로키는 크라이슬러 200, 알파로메오 줄리에타, 닷지 다트와 플랫폼을 공유했다. 레니게이드는 피아트 500X와 기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바꿔 말해 FCA는 앞으로 모델들의 상호 간섭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를 면밀히 고민해야 한다. 지난 1월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장에서 만난 마이크 맨리(지프 담당 CEO 겸 아시아태평양 담당 COO)는 자신 있게 말했다. “모든 자동차가 바퀴 네 개와 엔진 하나를 가졌지만 모든 차가 똑같은 건 아니지 않나. 주요 부품을 공유하더라도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과연 각각의 개성이 어떻게 살아날까? 머잖아 알 수 있을 거다. 
지프는 체로키와 레니게이드를 시작으로 2018년까지 모든 모델을 신형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컴패스가 지키고 있는 C 세그먼트 시장에도 전혀 새로운 모델이 투입될 예정이다.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모델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그 못지않은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이 뒤따라야 한다. 지프의 캐릭터가 살아 있는, 하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지프의 모습이라….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