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가 하얗다. 이렇게 눈이 많은 곳은 처음이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낯설지가 않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 일본 영화에서 여배우가 “오겡키데스카”를 외쳤던 곳과 아주 흡사하다. 그 영화를 일본 나가노에서 찍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낯선 곳이지만 낯설지 않고 처음이지만 왠지 푸근하고 정감 있는 동네다. 여긴 일본 나가노현 메가미 호수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도쿄에서 버스로 5시간 걸렸다. 거리상으로는 150킬로미터인데, 고속도로 제한속도가 시속 80킬로미터였고 나가노에 도착해서는 눈 때문에 거북이걸음이었다. 비행시간까지 더하면 족히 7시간은 걸린 셈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와 약간의 긴장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난 이곳에 람보르기니를 타러 왔으니까. 그것도 꽁꽁 언 호수 위에서. 

프로그램은 아침 8시부터 시작한다. 근처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호수가 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할까 고민했다. 양털이 들어간 방수 워커를 신어야 할지 아니면 드라이빙 슈즈를 신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워커를 신고 드라이빙 슈즈를 들고 갔다. 

호수에 닿으니 여러 대의 우라칸과 아벤타도르가 나열해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는 듯하다. ‘운전 좀 하니?’라는 눈빛이다. 서슬 퍼런 에지를 뒤집어쓴 람보르기니는 보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보는 것만으로 긴장되는, 이게 람보르기니 디자인의 힘

이다. 

슈퍼카를 빙판에 내던지는 쾌감과 700마력을 오로지 미끄러트리는 데 사용하는 무자비한 비효율은 람보르기니 윈터 아카데미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호사다.

행사는 간단한 브리핑으로 시작했다. 바른 자세와 카운터스티어링 요령 등을 아주 짧게 설명하고 “이곳은 국립공원이니 쓰레기는 버리지 마라”는 정중하고 단호한 요청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호수로 올라갔다. 
호수 위에 눈이 엄청나게 쌓여 이게 호수인지도 모르겠다. 인상 좋은 일본인 인스트럭터가 인사를 건넸다. 인스트럭터 한 명이 세 명의 참가자를 담당한다. 참가자 한 명이 인스트럭터와 차를 타면 두 명은 근처 미니밴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창밖으로 람보르기니가 미끄러지는 걸 구경한다. 

처음에는 8자 주행부터 시작한다. <모터 트렌드>에서 흔히 보는 횡중력 테스트가 아니다. 그냥 ‘좌우로 미끄러지기’ 연습이다. 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횡중력은 느끼지 못한다. 이론은 간단하다. 러버콘을 돌면서 속도를 높여 인위적으로 오버스티어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코너 진입속도가 약간만 빨라도 그립을 잃으며 언더스티어가 난다. 그러니 ‘이거 너무 느린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줄여야 한다. 코너를 돌고 난 후에 속도를 높여 뒤를 흘리는데, 우라칸의 V10 자연흡기 엔진이 610마력을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내기 때문에 액셀러레이터 조절을 잘해야 한다. 차가 180도는 물론이고 360도로 휙 돌아버리는 게 순식간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슬라이딩 감각을 익힌다.

8자 주행 다음은 원선회다. 8자는 뒤를 흘리는 연습이고 원선회는 드리프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목적이다. 8자 주행보다 훨씬 더 어렵다. 뒤가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카운터스티어를 하고 가속페달로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데, 우라칸은 그 템포가 너무 빨라 카운터스티어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더욱이 네바퀴굴림 시스템은 차가 옆으로 흐르는 비정상적인 주행을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 수시로 구동력을 쥐락펴락한다. 드리프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뭔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시속 10~15킬로미터가 고작이다. 그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면 노즈를 원하는 방향으로 놓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빙판에서 허비적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였다. 옆에 보기에 딱했던지 인스트럭터가 주행모드(Anima)를 코르사에서 스포츠로 바꿔줬다. 그러자 노즈를 조정하는 게 약간 쉬워졌다. 구동력을 뒷바퀴로 더 많이 보낸 덕분이다. 좀 더 재미있고 짜릿해진 느낌이다. 또 손아귀에 감이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속도를 좀 더 내면 여지없이 언더스티어가 인다. 

옆에 앉은 일본인 인스트럭터에게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어렵지?” “그립 한계점에서 운전하는 건 누구나 힘들지.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중요한 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확히 보고 앞바퀴를 그쪽에 두는 거야. 그러면 훨씬 좋아질 거야.” 별거 아닌 말 같았는데 그 말대로 하니 정말 수월해졌다. 가고자 하는 방향을 눈동자만 보는 게 아니라 고개까지 돌리니 더 잘됐다. 마치 스노보드를 처음 배울 때와 비슷했다. 스노보드는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손을 뻗고 고개를 돌린다.  

8자 주행과 원선회 두 개만 했는데 벌써 점심때가 됐다. 람보르기니를 타고 4시간 동안 돌기만 한 것이다. 뭔가 감이 올 거 같으면서도 어렵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차를 타고 있는 호주, 뉴질랜드, 일본 참가자 중에도 멋들어지게 파워드리프트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에는 제설차가 파놓은 코스를 따라 달린다. ‘달린다’가 아니라 ‘미끄러진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오전보다 더 긴장된다. 너무 미끄러져서 이 비싼 차를 눈무더기에 처박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실제로 호주 참가자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우라칸을 눈무더기에 올렸고 트랙터로 끌려나왔다. 다행히 차에는 손상이 없었다.

8자 주행과 원선회에서 감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코스 주행은 생각보다 훨씬 쉽고 재미있었다. 원선회는 회전반경이 짧아서 드리프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버스티어를 만들어 차 뒤를 주행 방향으로 던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은데, 그렇게 드리프트 상태를 유지하면서 주행 방향보다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 어려웠던 거다. 그런데 코스 주행에서는 회전반경이 훨씬 넓다. 그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정해졌으니 그쪽으로 뒤를 흘리고 카운터스티어를 하면 멋지게 드리프트를 하면서 코너를 돌아나갈 수 있다. 이때 사이드미러로 뒤에 새하얀 눈보라가 이는 게 보인다. 연속 코너에서는 노즈는 그대로 두고 꼬리치듯 뒤를 좌우로 연속으로 흘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때는 짜릿한 성취감이 뒷목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와 꼬리뼈까지 찌릿찌릿하게 이어진다. 너무 좋아서 감탄사를 연발하니 옆에 앉은 인스트럭터도 엄지를 치켜세우며 흥을 돋운다. 혹여나 코너를 놓치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 친절히 알려준다. 

해발 1700미터에 가까운 산골짜기 얼음 호수에서 지상 최고의 슈퍼카를 타는 건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면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슈퍼카를 빙판에 내던지는 쾌감과 700마력을 오로지 미끄러트리는 데 사용하는 무자비한 비효율은 람보르기니 윈터 아카데미아(Lamborghini Winter Accademia)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호사다. 이런 특별한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는 1박 2일에 3500유로(이탈리아 리빙고) 또는 5995달러(미국 아스펜)가 필요하다. 비싼 가격이지만 직접 경험해보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일본 프로그램은 전 세계 기자를 상대로 한 단발성 이벤트로 일반 참가자를 받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이스 드라이빙을 갈 때는 방수가 잘되고 보온성이 좋은 신발이 최고다. 드라이빙 슈즈를 신었다면 발이 꽁꽁 얼어서 제대로 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