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어떤 자동차를 어떻게 만들어야 장사가 잘되는지를 가장 잘 아는 곳이 자동차 회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자동차 시장에는 언제나 사각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자동차 회사가 제품의 기획과 개발, 마케팅 활동을 시장조사 기관이나 컨설팅 회사에 의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이에서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과 개발을 거쳐 나오는 제품들은 많은 사람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다. 차를 좋아하고, 차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차에 관한 이야기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나 같은 평론가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회사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 결과로 나온 제품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고생 끝에 나온 제품들을 보고도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쉬움을 넘어 ‘어, 이래도 되는 건가?’ 또는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걱정이 드는 차 회사들의 행보를 짚어보려고 한다.

# 1 요즘 세계적으로 슈퍼미니급 초소형 크로스오버카가 새로운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다. 유럽 B 세그먼트 해치백을 바탕으로 만든 차들로, 국내에도 이미 쉐보레 트랙스, 르노삼성 QM3, 푸조 2008 같은 차들이 시장을 넓히고 있다. 동남아나 남미에서 먼저 불붙기 시작한 이런 종류 차들의 경쟁은 유럽으로 옮겨가, 지금은 웬만한 대중차 브랜드는 다들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메이저 자동차 업체 중 아직까지 이 시장에 들어서지 않은 곳이 있으니 폭스바겐 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 그들이다. 두 업체 모두 올해 안에 제품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빠른 대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두 업체 모두 제품 성향이 보수적이어서 전통적 주류 차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틈새 차종을 빨리 내놓는다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남들이 다져놓은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좋은 소리 듣기도 어렵다.

# 2 위장막을 씌우지 않은 신형 BMW 7시리즈의 사진이 인터넷에 유출됐다. 실물을 보지 않고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사진으로 확인한 겉모습만 놓고 보면 신모델은 현행 7시리즈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여전히 뒷좌석만큼이나 앞좌석, 특히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비중을 크게 둔 형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BMW가 운전의 즐거움과 스포티한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런 형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정도 차급의 차라면 탑승자의 역학관계에서 뒷좌석이 중심이 되는 것이 맞고, 차체 디자인에서도 보는 사람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현행 7시리즈 디자인은 5시리즈와 같은 맥락이어서 그런 느낌이 옅은데, 신모델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공간을 넓히고, 장비를 늘리고, 안락함을 더하는 것만으로 럭셔리 대형 세단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차급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고, 디자인에서도 권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시장 후발주자인 아우디 A8이 D3에서 D4로 넘어가면서 획기적으로 변화를 주고 긍정적인 인상을 준 것이 그런 점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차라리 E65/E66 7시리즈가 디자인 면에서 뒷좌석의 권위는 더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다. 사족을 더하자면, 큰 BMW일수록 ‘앞트임’한 헤드램프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 3 조금 시간은 지났지만, 큐브를 보면서 요즘 닛산의 프로세스를 걱정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이효리 차’라는 별명을 얻었던 2세대 큐브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 수작이었다. 그런데 3세대 큐브에 대한 닛산의 욕심은 조금 지나쳤다. 2세대 큐브의 바탕이 된 작고 아기자기한 차라는 본질은 희석되고 화려한 포장만 남겨놓은 것이다.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재미없는 차가 되었고, 시장 반응도 미지근했다. 미국에서는 후발주자인 기아 쏘울에 밀렸고, 국내에서는 조용히 판매가 중단됐다. 결국 큐브의 개념은 단종과 함께 명맥이 끊어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기아 쏘울도 왠지 큐브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며 내실을 다졌지만, 1세대 같은 캐주얼한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그나마 미국에서는 괜찮은 실적을 보이고 있기는 한데, 앞으로 이 콘셉트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는 외부인 관점에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4 최근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브랜드 중 하나가 캐딜락이다. 지난 10여 년간 캐딜락의 제품들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GM이 이 브랜드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느낌이다. 처음 CTS로 디자인과 기술의 일대 혁신을 시작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CTS를 뒷받침할 다른 차종들이 영 부실했다.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다 사라진 STS, 세대가 바뀌면서 성격도 완전히 달라진 데다 입지도 애매해진 SRX, 낡은 티를 전혀 벗지 못한 DTS, 생뚱맞은 개념의 XLR이나 ELR을 보면서 캐딜락이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한 브랜드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나마 ATS가 좋은 평을 얻고 있지만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캐딜락의 위상을 되찾으려면 중형급 이상의 차들이 힘을 내야 한다. 에스컬레이드는 그렇다 치고 세단을 비롯한 승용 라인업의 강화가 절실한데, 지금 나오고 있는 XTS는 여러 면에서 여전히 부족하다. 앞으로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의 공세가 더 심해질 텐데 어떻게 대응할지 심히 걱정스럽다.

# 5 자동차에서 브랜드의 개성이 표현되는 요소 중 하나는 디자인이다. 여러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업체라면 당연히 브랜드마다 디자인을 달리해 이미지가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디자인 관리가 가장 큰 고민거리인 곳은 폭스바겐 그룹이다. 그중에서도 핵심 브랜드인 폭스바겐의 디자인은 그룹 전체 디자인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럭셔리와 프리미엄, 대중 브랜드 사이의 입지에 알맞은 브랜드 이미지를 살려야 하는 것은 물론, 폭스바겐의 상징성과 제품군의 특성도 포괄할 수 있는 디자인을 지녀야 하는 것이 과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오고 있는 제품 디자인을 보면 지나치게 보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7세대 골프가 그렇고, 얼마 전 공개된 유럽형 파사트 신형이 그렇다. 한편으로 폭스바겐을 아우디와 비슷한 위상으로 올려놓으면서 아우디는 진보적인 디자인으로, 폭스바겐은 보수적인 디자인으로 차별화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제품에 반영된 디자인을 보면 보수성이 지나쳐 경직된 느낌이 들고, 정해진 공식에 맞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디자인 요소들을 가져다 조합한 인상을 준다. 차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효과는 있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세아트와 슈코다의 입지를 생각하면 프리미엄 브랜드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중성과 보편성을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다. 특히 세아트와 슈코다가 진출하지 않은 지역에서 과연 그런 시도가 제대로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폭스바겐은 페이톤의 교훈을 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