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눈이 참 많이 왔다. 동네 뒷산에만 올라가도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졌다. 한번 쌓인 눈은 봄이 될 때까지 좀처럼 녹지 않았다. 그렇게 온통 새하얗게 변한 뒷산은 동네 꼬마들 놀이터였다. 온 동네 아이들이 ‘고무 다라’와 비료포대를 들고 나와 하루 종일 뒷산에서 눈썰매를 탔다.

요즘 서울엔 눈이 통 보이질 않는다. 특히 올해엔 눈 소식이 적다. 서해안이나 목포엔 폭설이 내렸다고 하는데 서울엔 찔끔찔끔 내리다 만 게 다다. 그래서인지 찬 바람만 쌩쌩 부는 서울 도심이 더 적막하게 느껴진다. 사무실 창밖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고 있는데 문득 눈이 보고 싶어졌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들판이며 산이 그리워졌다. 그래야 겨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만나러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인터넷에 ‘눈꽃 여행’이라고 치니 덕유산이 주르륵 뜬다. 몇 차례 폭설이 내린 덕(?)에 요즘 덕유산은 눈꽃이 절정이다. 특히 정상에 있는 향적봉은 가지마다 새하얗게 피어난 눈꽃으로 얼음 왕국이 따로 없다. 하지만 덕유산은 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없다. 걸어서 올라가거나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까지 올라가는 방법뿐이다.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눈꽃 세상이 어디 있을까 검색한 끝에 만항재를 찾아냈다.

태백과 정선, 영월에 걸쳐 있는 만항재는 국내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고개다. 높이가 무려 1330미터나 된다. 그런데 이 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다. 제설 작업을 금세 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만 아니라면 도로도 늘 말끔하다. 장소를 정했으니 이제 차를 정할 일이 남았다. 눈길에서 여러 번 사고를 경험했던 터라 차를 고르는 일에 신중을 기했다. 아무리 도로가 말끔하다 해도 곳곳에 블랙 아이스가 있을 수 있고, 눈밭을 달려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고심 끝에 고른 차는 아우디 Q5 45 TDI 콰트로. 아우디의 네바퀴굴림 시스템 콰트로라면 눈길에서도 왠지 안심될 것 같았다. 시승차는 2014년 모델이라 엉덩이에 45 TDI 콰트로 대신 3.0 TDI 콰트로라는 배지를 붙였다. 하지만 이것만 빼면 2015년형 모델과 성능도 디자인도 똑같다. 그리고 아우디는 센스 있게 겨울용 타이어를 신겨줬다. 겨울용 타이어를 보니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다. 이 정도라면 눈 덮인 들판을 마구 달려도 괜찮겠지?

중앙고속도로 제천나들목에서 나와 영월 방향 38번 국도를 타고 90킬로미터쯤 달리면 정선군 고한읍에 도착한다. 함백산 산자락에 자리한 고한읍은 만항재로 가는 길목이다. 잘 닦인 포장도로 덕에 10분 남짓이면 만항재에 다다를 수 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만 해도 가지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을 상상했다. 눈 돌리면 온통 새하얀 눈꽃 세상이 반겨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강원도도 서울과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눈다운 눈이 좀처럼 내리질 않았는지 나뭇가지는 헐벗은 그대로다. 함백산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따라 만항재까지 오르는 동안 눈꽃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눈을 못 보는 것 아닐까?’ 걱정이 밀려왔다.

잠시 걱정하는 동안 내비게이션의 안내 목소리가 차 안에 퍼졌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작은 휴게소 앞엔 관광버스 몇 대가 서 있었다. 공터에 차를 대고 주변을 살폈다. 눈이 아주 없진 않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다. ‘여기라고?’ 길 잃은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만항재’라고 써 있는 커다란 돌을 발견했다. 오기 전 자료를 검색하다가 블로그에서 본 그 돌이 분명하다. 그랬다. 이곳이 만항재 꼭대기였다.

“천지가 눈으로 뒤덮인 꼴을 보고 싶으면 함백산에 올라가야지. 만항재는 함백산에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기점이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차를 대고 함백산으로 가는 거라우. 1시간쯤 걸으면 함백산 정상에 오를 수 있어.”
‘만항재 야생화 쉼터’라는 나무 간판이 걸린 작은 휴게소에 들러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등산이라면 자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질색인 내게 겨울 산행이라니….

1시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산행이라고 해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휴게소 오른쪽으로 난 좁은 산길이 눈에 들어왔다. 만항재 길은 눈이 모두 녹아 아스팔트가 훤히 드러났는데 이 길만 유독 눈으로 덮여 있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차 한 대쯤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폭도 넉넉하다.
“이 길로 한번 가볼까요?”

함께 간 포토그래퍼가 차에 올랐다. 난 속도를 줄이고 조심조심 눈길로 들어섰다. 100미터도 채 가지 않았는데 눈앞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길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고, 길옆에 난 나무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하얀 눈 세상이다. 그렇게 1킬로미터쯤 달렸을까? 오른쪽으로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눈이 새하얗게 쌓인 공터는 사람은 물론 짐승 발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Q5로 하얀 눈밭을 천천히 달렸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차 안으로 들이쳤다. Q5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눈길에서도 전혀 허둥대지 않았다. 겨울용 타이어를 신은 덕에 눈밭에서도 거침없이 움직였다. 경사가 크지 않은 오르막길쯤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Q5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눈길에서도 전혀 허둥대지 않았다. 겨울용 타이어를 신은 덕에 눈밭에서도 거침없이 움직였다."

우리가 Q5로 달린 길은 운탄고도의 일부다. 만항재에서 화절령을 거쳐 새비재까지 이어지는 운탄고도는 1960~70년대 석탄을 운반하는 탄차가 다니던 길이다.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탄차가 운행하지 않자 이 길도 방치됐는데, 4~5년 전부터 갱도를 막고 산비탈을 보수해 트레킹 코스로 다시 꾸몄다. 탄차가 다니던 길인 만큼 차도 다닐 수 있긴 하지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건 네바퀴굴림에 겨울용 타이어를 신지 않았다면 섣불리 이 길에 도전하지 말라는 거다. 바퀴 자국만 보고 겁 없이 들어섰다간 중간에 오도 가도 못하고 눈길에 갇힐 수 있다. 만항재 초입에서 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까지 내리막길이라 속도만 줄이면 웬만한 앞바퀴굴림 차도 갈 수 있지만 문제는 나올 때다. 오르막길 고비가 두세 개 있는데 대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만항재에서 제대로 된 눈꽃을 실컷 보려면 함백산 정상을 오르는 게 제일이다. 만항재 쉼터에서 고한 쪽으로 350미터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4킬로미터쯤 걸어가면 함백산에 다다른다. 함백산이 가까울수록 가지마다 새하얗게 핀 눈꽃을 볼 수 있다. 3월까지 눈도 제법 쌓여 있다. 만항재 쉼터에서 고한 쪽으로 1킬로미터쯤 내려오면 만항 야생화 마을이 나타난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 야생화가 관광객을 반기는 이 마을은 겨울엔 온통 눈으로 뒤덮인다. 재미있는 표정의 장승이 서 있는 만항 야생화 공원에도 야생화 대신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래서 운치 있는 겨울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만항할매닭집은 이 동네, 아니 정선에서도 이름난 맛집이다. 닭볶음탕과 백숙을 전문으로 하는데 토종닭에 쑥갓과 양파, 양배추 등을 넣고 얼큰하게 끓여내는 볶음탕은 국물이 자작하게 있어 밥을 넣고 비벼먹기에도 그만이다. 국물이 뜨끈한 백숙은 먹고 나면 입안은 물론 온몸이 후끈거린다. 만항 야생화 마을에서 5킬로미터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정암사가 보인다.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645년에 창건했다는 이 절에는 석가모니의 진골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적멸보궁과 보물 410호로 지정된 높이 9미터의 7층 모전석탑 수마노탑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스님들이 불경을 외는 소리가 청명한 겨울 공기 속으로 퍼진다. 흰 눈으로 뒤덮인 겨울 왕국을 보고 싶다면 눈이 펑펑 내린 다음 날 만항재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만항재길 초입부터 꼭대기까지 사방이 온통 새하얀 눈의 나라를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단, 겨울용 타이어는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