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FICATION  기본 가격 862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RWD, 5인승, 4도어 세단 엔진 V8 5.0ℓ DOHC, 425마력, 52.0kg·m 변속기 8단 자동 공차중량 2105kg 휠베이스 3045mm 길이×너비×높이 5095×1900×1490mm 복합연비 7.6km/ℓ CO₂ 배출량 238g/km

플래그십 세단은 여타 모델보다 더 중요한 의미와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해당 브랜드의 최고급 기술이 담겨야 하고 차를 만드는 철학이 느껴져야 하며 고객을 생각하는 진중한 자세를 대변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면에서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과하되 부족하지 않은 공간과 힘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기아의 플래그십 K9은 이제껏 V6 3.8리터 엔진에 만족해야만 했다. 현대차 그룹의 플래그십인 에쿠스만이 가질 수 있는 V8은 서자(?) 기아차에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플래그십임에도 V8 엔진은 품을 수 없었다.

그런데 V8이 K9에 들어갔다. 끝물에 접어든 2세대 에쿠스가 같은 섀시를 사용하는 서자에게 엔진을 물려준 것이다. 사실 K9은 괜찮은 제품력이 낮은 인지도에 묻혀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이에 현대·기아는 K9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로 했다. 그래서 에쿠스의 심장을 K9에 이식했다. 그대로 가져다 쓴 게 아니다. 흡배기 계통을 손질하면서 출력이 9마력 오른 425마력이 됐다. 이제 K9은 명실상부 현대·기아차 그룹에서 가장 크고 출력이 높은 엔진을 얹게 됐다. 진짜 플래그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름 뒤에 ‘퀀텀(Quantum)이라는 그럴듯한 로고도 새겼다. 기아 K시리즈 중 유일한 서브네임이다. 사실 ‘기아의 작명법이 K9의 발목을 잡았다’는 의견도 있다. ‘서민을 위한 차 K3부터 모두 K를 쓰니 K9의 품위와 품격이 낮게 평가된다’는 것이다.

K9 퀀텀은 여유로웠다. 실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넓다.’ 큰 것이 주는 충족감과 여유가 있다. 특히 엔진이 그렇다. 힘을 짜내지 않고 풀어낸다. 터보 엔진처럼 천박하게 꽝꽝 터트리지 않고 듬뿍듬뿍 담아준다. V8 엔진을 얹으면서 차의 무게가 2톤을 넘겼는데 그 무게가 버겁지 않다. 오히려 늘어난 무게 덕분에 든든한 승차감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다. 누군가 ‘스포츠 주행을 하기 위해서는 엔진 출력에 비해 너무 무거운(2105킬로그램)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차는 휠베이스가 3미터가 넘는 대형 세단이다. 스포츠 주행을 위해 만든 차가 아니라 부드럽고 편하고 안락하면서 품위와 품격을 갖추고 타는 세단이다. V8 엔진도 출력을 빠르고 정확하게 뽑아내지 않는다. 5000rpm이 돼야 52.0kg·m의 최대토크가 나온다. 초반에 높은 토크를 뽑아내 플랫하게 이어가는 작은 엔진들과는 세팅이 전혀 다르다. 꾸준하게 힘의 중량이 커지는 엔진이다.

여기까지는 플래그십이면 마땅히 지녀야 할 여유로운 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럼 반대 입장에서 K9을 바라보자. ‘K9에 V8 5.0리터 타우 엔진이 필요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K9은 425마력을 오롯이 뽑아내면서 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우선은 섀시가 엔진을 충분히 포용하는 느낌이 없다. 고속으로 오르면 불안한 느낌은 아닌데, 고급스럽던 승차감이 약간 달라진다. 충격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억지로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 탄탄한 주행질감 대신 부드럽고 편안한 주행을 위한 섀시와 서스펜션 세팅일 수 있고 그냥 섀시 자체의 비틀림 강성이 떨어져서일 수 있다. 그런데 벤츠, BMW, 아우디도 플래그십에 V12 엔진이 꼭 필요해서 넣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V6 휘발유와 디젤도 충분한 힘이다. 그럼에도 12기통 대형 엔진을 얹는 것은 여유의 폭을 더 넓히고 플래그십으로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다.

K9 퀀텀 소비자들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승용차 엔진 중에서 가장 크고 출력이 높은 차를 타게 된다. 더불어 ‘퀀텀’이라는 서브네임으로 일반 K9과 차별화도 이룰 수 있다. 어쩌면 차체 뒤에 붙은 ‘V8 5.0’ 로고가 견장이나 완장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거면 된 거다. 소비자에게 자부심과 차별화를 심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K9 퀀텀은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