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건은 판매에 따른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기업은 차의 라인업 구성이나 옵션 범위를 철저하게 수익 측면에서 고려한다. 물론 수익을 내려면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마케팅 전략이든 변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특정 제품의 상품성만으로는 언제나 성공을 보장받기 어렵다. 미끼 상품(Loss Leader)을 이용한 마케팅이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미끼 상품’이란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경제나 마케팅 관점에서 미끼 상품(혹은 유인 전략)은 시장의 적당한 수요와 공급을 만들어내는 균형점의 역할을 한다.

명품 시계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시계 매장에 A, B, C 세 가지 가격대의 제품이 있다. 각각 1000만원, 300만원, 240만원이라 가정하자. 여기서 가장 비싼 A 모델은 1년에 단 10개도 안 팔리는 제품이다. 하지만 기업은 이런 제품을 꾸준히 만든다. 이런 고가의 제품이 곧 주력 상품(B)의 경쟁력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300만원대 제품을 본 것과 1000만원 제품에서 시작해 300만원대 제품으로 이어진 것은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C 제품도 이런 성격이 담겨 있다. 주력 상품(B)과 가격 면으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능은 훨씬 부족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B 제품의 구매로 연결된다. 기업 입장에서 A와 C는 잘 팔리면 좋고, 안 팔려도 그만이다. 즉 상품 자체의 수익 증대보다는 유인된 소비자의 또 다른 소비를 확보하는 전략을 내포한다.

자동차 업계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 입문형 모델에 관심을 두고 수입차 전시장에 들어갔다가 1000만원 높은 중급 모델을 계약하는 경우다. 수입차의 문턱 낮춰주는 입문형 모델도 국산차를 고려하는 소비자 입장에선 미끼 상품이 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특정 모델 안에서도 약간씩 다른 트림과 옵션이 존재한다. 역시 마케팅의 유인책이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는 복잡한 구조와 다양한 변수 속에 서로서로 미끼 상품이 된다. A 브랜드 제품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해서 비교를 통해 B나 C 브랜드의 제품을 선택하는 일이 허다하다. 물론 처음부터 미끼가 되려고 태어난 제품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미끼 상품 없이는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 잘 짜인 판에 잘 만든 미끼 상품이 있어야 주변까지 배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잘 만든 미끼 상품이란 어떤 것일까? 또 그들은 어떤 전략을 가질까?

01  mercedes-benz C 200 Av

C 클래스가 최고의 미끼 상품이라는 건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도전의 완충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소형 라인업의 리더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회사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제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소형, 중형, 대형 세단을 중심으로 사이마다 형태가 약간씩 다른 제품을 끼워 넣는다. 마치 책 사이에 책갈피를 계속해서 끼워 넣는 식이다. 하지만 어떤 구조에서든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곧 책은 접히지 않을 만큼 포화 상태에 도달한다. 그래서 메르세데스 벤츠는 꾸준히 새로운 공간을 추가하는 데 주력했다. 중심 모델인 C, E, S 주변이 아니라 아래로(혹은 위로) 영역을 개척했다. 이렇게 확장한 결과가 A와 B, CLA, GLA다. 이들은 일반 소비자가 인식하는 전통적인 벤츠와 거리가 있다. 생애 첫 번째 차를 메르세데스 벤츠로 꿈꾸게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그룹은 기존 메르세데스의 프리미엄 이미지와 약간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두 그룹을 유연하게 연결할 고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C 클래스의 역할이다.

C 클래스가 최고의 미끼 상품이라는 것도 브랜드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C 클래스는 이제 작은 차, 껑충한 차, 날렵한 차, 좋은 차로 나뉜 메르세데스 벤츠 소형 라인업의 리더이자 최고의 백업 플랜이다. 실제로도 비슷한 사례가 주변에 있었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한 여성의 이야기다(실존 인물이다). 그녀는 작은 차를 좋아한다. 해치백 정도 사이즈로, 꼭 찍어서 폭스바겐 골프였다. 그녀는 자동차 구입을 앞두고 C 클래스나 3시리즈 같은 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즈음 시장에 A 클래스가 등장했다. 새로운 감각의 벤츠가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장이라도 계약서에 서명할 기세였다. 그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시간이 한참 흘러서였다. 그때 그녀는 C 200 아방가르드 AMG 패키지를 타고 있었다. 처음 생각한 A 180 CDI 나이트에서 약 1700만원이나 비쌌지만, 더 고급스럽고 쓰임새가 좋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그녀가 C 클래스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작은 차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구석구석 충분히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골프에서 시작해 C 200 AMG 패키지를 선택하게 된 것은 A 클래스라는 미끼 상품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꽤 큰 가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C 클래스로 대상을 바꾼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엔트리 해치백과 격이 다른 C 클래스만의 감각적인 패키지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C 200 아방가르드 AMG 패키지를 타보고 작은 차를 좋아하는 그녀가 왜 마음이 흔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하나부터 열까지 고급스럽다. C 200 아방가르드(AV) 모델과 단 400여 만원 차이가 날 뿐인데 외모는 다른 차 같고, 실내는 한층 세련됐다. 공격적인 스타일의 범퍼와 사이드 스커트, 18인치 AMG 휠이 시선을 끈다. AMG 패키지는 개별 주문이기에 시트 색상도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 무엇보다 운전 감각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다. 184마력(30.6kg·m)을 발휘하는 2.0리터 가솔린은 움직임이 막힘없이 뻗어갔다. 신경질적으로 출력을 쥐어짜지 않아도 매우 넉넉하다. 스티어링은 나긋나긋한 부분과 정교한 부분이 분명히 나뉜다. 크기를 키운 휠이 승차감을 약간 떨어뜨리지만, 멋진 외모를 얻었으니 불만은 없다. 이 차는 운전자에게 ‘좋은 차’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준다.   

중심 라인업에도 C 클래스는 200, 220 블루텍, 250 블루텍 4매틱 등 단순한 라인업 구성을 유지한다. 7개 엔진을 얹고 19개 모델로 구분되는 E 클래스나 5개 엔진, 12개 모델로 구성된 S와 다르다. 아마도 ‘선택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다. 선택의 역설이란 선택권이 많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고 ‘가장 합리적인 쪽’이 아니라 ‘가장 손해 보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는 현상이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처음에 관심 두었던 모델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30여 개 제품을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 가게 전략처럼 소비자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은 미끼 상품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C 클래스가 적절한 유인책 역할인 동시에 스스로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 훌륭한 상품이라는 증거도 여기에 있다. 글•김태영

02  BMW 428i convertible

3시리즈가 승용 볼륨 모델로 넉넉한 영역을 커버한다면 4시리즈는 스포츠·고급 모델로 3시리즈 제품군의 이미지를 끌고 나가야 한다.

3시리즈 제품군의 플래그십
BMW는 1950년대에 유수의 고급차와 스포츠카를 개발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종전 후 BMW가 맛본 첫 성공은 1962년 선보인 소형 스포츠세단 ‘뉴 클래스’ 1500이었다. 1500의 뒤를 이은 3시리즈는 더 큰 성공을 거뒀고 BMW는 1970년대부터 차근차근 상급 시장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2000년대부터는 3, 5, 7의 단순한 승용 라인업도 세분화됐다. 1과 6시리즈가 더해졌고, X 시리즈라는 이름 아래 SUV 제품군도 탄탄히 다져졌으며, 전통적 세그먼트로 분류되지 않는 틈새 모델도 꾸준히 추가됐다. 결국 BMW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BMW 브랜드의 중심은 여전히 3시리즈다. 1500의 정신을 물려받은 3시리즈는 BMW 브랜드의 색깔을 정의하는 이미지 플래그십인 동시에 사람들을 BMW라는 브랜드로 유인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깔스러운 미끼다. BMW는 여기에 교묘한 가격 책정과 상품 구성으로 양념을 친다. 제품 라인업이 다양하고 틈새 모델도 많다 보니 양념을 치기도 쉽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저렴하게 3시리즈를 타고 싶은데…. 부담 없는 320d ED(4650만원)를 추천합니다! 제대로 된 3시리즈를 원한다고요? 320d 럭셔리(5540만원)면 적당하겠네요! SUV 대신 탈 만한 전천후 3시리즈는 없나요? 320d x드라이브 투어링(5880만원)이 있습니다! 왜건은 싫은데…. 그럴 줄 알고 320d GT(6110만원)를 준비해뒀지요! 320d GT는 볼품없어 보여서…. 그럼 200만원 정도 추가하면 520d(6370만원)를 탈 수 있어요! BMW 제품 라인업의 물고 물리는 관계는 이대로 최상위 7시리즈까지 이어진다. 1에서 7까지 빈틈없이 늘어선 BMW 포트폴리오는 제품 전체가 미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다단계 미끼 전략의 출발점은 당연히 3시리즈다.

그런데 BMW는 최근 승용 모델은 홀수, 스포츠 모델은 짝수 이름을 쓰는 걸로 명명체계를 손질했다. 3시리즈도 3시리즈와 4시리즈로 양분됐다. 그 탓에 우리가 오랫동안 M3로 불러왔던 차는 이제 M4라는 낯선 이름으로 통한다. 그래도 새 명명체계는 생각보다 빨리 자리 잡았다. 3시리즈는 세단, 4시리즈는 쿠페와 컨버터블이라 구분되니까. 중요한 건 역할 분담이다. 존재하지 않던 숫자까지 끼워 넣으면서 구분해둔 마당에 3시리즈와 4시리즈가 같은 시장에서 충돌하면 곤란하다. 3시리즈라는 브랜드가 갖는 상징성까지 고려하면 둘의 역할은 더욱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3시리즈가 승용 볼륨 모델로 넉넉한 영역을 커버한다면 4시리즈는 스포츠·고급 모델로 3시리즈 제품군의 이미지를 끌고 나가야 한다. 3시리즈가 BMW 브랜드의 플래그십이라면 4시리즈는 3시리즈 제품군의 플래그십이다. 플래그십이라면 그에 걸맞은 기량도 갖춰야 한다. 엔지니어링, 주행성능, 스타일, 편의사양 등 모든 면에서. 시승차는 국내에 출시된 3·4시리즈 제품군 중 가장 값비싼(7320만원) 428i. 게다가 컨버터블이다. 오픈카는 승용차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 실내외는 M 스포츠 패키지로 단장했다. 오호라, 고성능 M 모델의 이미지까지.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다.

핸들링 역량은 대대로 이어져온 명성 그대로다. 꺾었더니 면도날처럼 돌아가더라. 코너를 돌아나가는 성질은 차체 앞뒤에 실리는 무게의 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브레이크와 스로틀, 스티어링으로 차의 스티어 특성을 만지작거리며 타는 재미가 크다. 지붕 수납 때문에 길어진 꽁무니가 차의 균형감각을 흐트러뜨렸을 거란 짐작도 부질없다. 회전은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하다.

F30 플랫폼에서 빚어진 3시리즈 제품군은 대체로 가볍게 들썩거린다는 기분이 없지 않다. 이 차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들썩거리기보단 사뿐사뿐 노면에 내려앉는 쪽에 가깝다. 한결 정돈돼 있고, 그래서 짐짓 불편할 수 있는 흔들림도 기분 좋은 감각으로 다가온다. 고속이나 범프가 심한 노면에선 지나치게 활기차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동급 세그먼트에서 이 차만큼 가뿐하고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차는 떠오르지 않는다.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꿔도 흔들림만 한껏 억제할 뿐 필요 이상으로 무게를 잡는 일이 없다. 가볍지만 허둥대지 않는 자연스러운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428i는 3시리즈 제품군의 대장 노릇을 할 자질이 충분하다.

245마력, 35.7kg·m의 파워는 신형 2.0리터 4기통이 낼 수 있는 최고성능이다. 구형 328i가 쓰던 자연흡기 방식의 3.0리터 직렬 6기통보다도 낫다. 힘뿐만 아니다. 배기량은 작지만 4500rpm이 넘어갈 즈음부터의 엔진 사운드도 이전 6기통보다 더 후련하고 괄괄한 느낌이다. 회전 질감도 가볍다. 한계까지 다그쳐도 힘겹게 꾸역꾸역 오르는 기색이 없다. 1200rpm부터 평평하게 이어지는 토크밴드는 운전을 손쉽게 만든다. 하지만 힘차게 가속할 때마다 어딘가 모를 결핍을 느낀다. ‘배기량이 깡패’라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428i 컨버터블은 최선을 다했다. 지난해 267대가 팔렸다. 미미한 수치지만 의미까지 미미하진 않다. 4시리즈라는 이름을 달고 팔리는 모든 제품 중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가장 많이 팔린 건 디젤 엔진으로 가치를 더한 420d 쿠페였다(411대). 실용성과 스타일을 짬뽕한 420d 그란쿠페(240대)도, 패키징에 큰 차이가 없는 328i 세단(70대)도 이 차 판매를 넘지 못했다. 3시리즈와 4시리즈를 아우르는 제품군의 이미지 리더로 시장의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다.

“성공리에 임무 완수!”라는 얘기는 아니다. 428i 컨버터블은 제품 자체로 매력 있지만 그 재능은 F30 플랫폼 라인업의 일면을 맛뵈는 수준에 그친다. 쥐락펴락하며 가지고 놀기엔 그만이지만 3시리즈라는 스포츠 세단의 명성을 오롯이 경험하기엔 갈증이 인다. 306마력 직렬 6기통 N55 엔진의 435i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335i 세단 없이 435i뿐이라면 더욱 완벽하겠다. M3와 M4가 있지 않느냐고? BMW M은 다른 세상의 더욱더 특별한 차로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이다. 435i 추가가 곤란한 상황이라면 인디비주얼 옵션 등으로 428i를 더욱 특별하게 패키징하는 방법도 있다. 판매가 많지 않은 328i를 라인업에서 정리하는 것도 방법이겠고. 글•김형준

3  porsche cayman s diese

마칸과 카이엔은 서로가 전략적인 시너지 효과를 준다. 마칸의 최종 견적서를 받아보는 순간 카이엔 S 디젤이 합리적인 자동차로 보이기 시작한다.

덩치 큰 드림카
포르쉐는 언제나 나의 로망이었다. 중학생 땐 959 RC 카에 푹 빠져 살았다. 대학생 땐 잡지에서 993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996 나왔을 때 크게 실망한 난 잠시 가슴앓이를 쉬었다. 그러나 이번 991은 싸늘히 식은 심장에 다시 한 번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 하지만 여전히, 포르쉐는 현실과 먼 꿈이라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SUV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싶다. 가족과 함께 탈 수 있으니 아내 꼬드기기도 좋다. 디젤이니 연료비 걱정도 없을 것 같다. 요즘 내가 눈여겨보는 포르쉐는 마칸 S 디젤이다. 덩치가 아담해 가끔은 아내에게도 운전대를 맡길 수 있을 듯하다. 디자인도 전형적인 포르쉐다. 무엇보다 기본 가격이 8240만원부터 시작이다.

리스 이용해 법인 명의로 사면 차값을 비용으로 털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을 듯했다. 주말 오후, 웹 서핑 하던 난 포르쉐 코리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나만의 포르쉐 만들기.’ 이 메뉴를 클릭하자 팝업창이 하나 떴다. 타이틀은 포르쉐 카 컨피규레이터. 밑엔 각 모델의 옆모습 사진이 떠 있다. 신이 나서 마칸을 클릭했다. 왜 더 일찍 해보지 않았을까 자책하면서.

마칸 라인업이 펼쳐졌다. 난 주저할 것 없이 마칸 S 디젤을 찍었다. 이번엔 더 큰 창이 뜬다. 왼편엔 마칸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오른편엔 옵션 메뉴가 가지런히 표시되었다. 마칸 사진 밑엔 차량 기본 가격 8240만원, 그 밑줄엔 추가 옵션 가격 0원, 맨 아랫줄엔 차량 가격 합계 8240만원이라고 쓰여 있다. 계약서를 앞에 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옵션 리스트의 시작은 실내 색상과 소재. 부분 가죽 씌운 시트와 가죽 스티어링휠이 기본이다. 실내 컬러는 블랙과 베이지, 그레이를 고를 수 있다. 그런데 도어 손잡이와 시트 전체에 가죽을 씌우려면 220만원이 든다. 시트와 도어 손잡이만 빨간 가죽으로 악센트 주려면 440만원이 든다. 조건이 붙는다. 210만원짜리 14단계 전동 시트를 골라야 한다.

여기까지 옵션 가격은 650만원.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경차 한 대 값도 안 되니 좀 더 골라보기로 했다. 외장으로 넘어갔다. 스포츠 디자인 패키지를 고르면 범퍼 모양이 바뀐다. 기본형의 동그란 안개등이 얇은 직사각형으로 바뀐다. 흡기구도 좀 더 큼직하다. 보다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당연히 선택. 타고 내리기 좋게 러닝 보드도 붙였다.

헤드램프는 바이제논에 포르쉐 다이내믹 라이트 시스템, 블랙 베젤을 엮은 옵션으로 꾸몄다. 자동 감광식 조광 내외부 미러도 넣었다. 단돈 60만원이다. 옵션을 고를 때마다 마칸 사진은 점점 더 멋지게 바뀌어간다. 포르쉐 열쇠도 못 만져본 주제에 문득 깡통 마칸을 어떻게 타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 가격 합계를 애써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이드미러 지지대를 V자 모양으로 바꾸는 데 70만원. 이건 고민 끝에 다시 뺐다. 꽁무니에 마칸 글씨 안 붙이는 옵션도 골랐다. 왠지 더 폼나 보일 듯해서다. 게다가 이 옵션은 공짜다! 뭔가 혜택 받은 느낌에 왠지 뿌듯하다. 지붕엔 이것저것 부착할 수 있는 루프 레일을 달았다. 이로써 80만원 추가. 드디어 외장 옵션 고르기가 끝났다. 변속기는 포르쉐 더블 클러치(PDK)가 기본. 아무렴 SUV인데 차고 조절 기능은 필수.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와 묶어서 380만원이다. 이건 좀 세다 싶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했으니 멈출 수 없다! 토크 벡터링 플러스도 욕심난다. 나의 모자란 실력을 감쪽같이 감춰주겠지. 그 대가는 220만원. 레이싱 스쿨 비용이라고 생각하자. 대시보드에 초시계 달린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SUV로 타협했는데 이거라도 챙겨야지. 160만원. 손목시계 산 셈 치자. 이제 본격적으로 내장 옵션이 시작된다. 막힌 길 거북이걸음 할 때 두 발에 자유를 줄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200만원이다. 고른다. 차선 변경과 이탈, 보조 시스템은 과감히 패스. 그 결과 197만원이나 절약했다. 조용히 쾌재를 부른다.

맙소사, 앞뒤 좌석 열선과 앞좌석 통풍 옵션이 이제야 나온다. 기본엔 그것도 없구나. 꾹 눌러 골랐다. 200만원. 이번엔 스티어링휠 히팅이 날 유혹한다. 질 좋은 가죽 장갑 사도 이 돈은 줘야 하니 선택. 40만원. 이번엔 3존 온도조절 장치. 국산 고급차에도 있는 기능이다. 잠시 고민하다 고른다. 60만원. 뒷좌석 사이드 에어백? 당연 있어야지. 60만원. 소화기가 30만원? 장난해? 그 돈이면 마트 가서 일주일치 장 보고 휴대용 소화기 네 개 사서 좌석마다 놓겠다. 분노의 패스. 포르쉐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은 것 같아 스스로가 뿌듯해진다. 자동차 키 도색 40만원?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지. 실내 가죽 옵션은 전부 익스클루시브로 구분되어 있다. 왠지 시간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지나친다. 장인의 한 땀 한 땀 공정으로 완성해서 그런지 가격이 그야말로 ‘후덜덜’하다. 가령 옵션 가운데 가죽 에어벤트가 있다. 송풍구의 얄따란 핀 하나하나에 가죽을 씌워주는 옵션이다. 이게 220만원이다. 이제 이런 생각마저 든다. ‘아예 디테일링 숍을 하나 차려?’

인테리어 우드와 카본 섹션을 미련 없이 지나치다 알칸타라에 시선이 멈췄다. 천장 씌우는 데 190만원. 이건 괜찮을 것 같다. 마지막 섹션은 오디오 및 커뮤니케이션. 내비게이션(50만원), 하이패스(고맙습니다, 10만원!), 후방카메라(50만원), 블루투스 핸즈프리(60만원)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오랜 고민 끝에 680만원짜리 부메스터 오디오를 골랐다. 초점 흐려 외면했던 가격 합계를 봤다. 0이 하나 빠진 줄 알았다. 가격은 무려 1억1890만원. 옵션 가격만 3650만원이었다. 불과 3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혹시나 싶어 카이엔으로 들어가봤다. 경유 마시는 카이엔의 끝판왕인 S 디젤 가격이 1억1490만원. 이렇게 합리적일 수가! 그로부터 한 달 뒤, 난 카이엔 S 디젤의 열쇠를 손에 쥐었다. 이것이 두 포르쉐 SUV로 표현한 완벽한 유인 전략이자 시나리오였다. 글•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04  land

레인지로버 스포트는 랜드로버 브랜드의 전략을 여실히 보여준다. 틈새를 줄이는 일 말이다. 영리한 브랜드일수록 더 촘촘하게 미끼를 놓는다.

라인업의 빈틈을 줄여간다
랜드로버가 레인지로버를 럭셔리 브랜드로 만들고 디스커버리를 새로운 브랜드로 구성하면서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곧 새 모델인 디스커버리 스포트가 나올 예정이지만, 레인지로버 브랜드에 세 가지 모델을 고수한다. 반면 디스커버리 브랜드는 라인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아직은 브랜드 구분 없이 랜드로버가의 모델을 한데 묶어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았을 때 입지가 흥미로운 모델이 레인지로버 스포트다. 값과 크기 면에서는 라인업 막내 모델인 프리랜더나 이보크와는 선을 뚜렷하게 긋고 있지만, 아래로는 디스커버리, 위로는 레인지로버와 함께 놓고 비교하기 좋아서다. 일단 랜드로버 브랜드에 관심 있고 발을 들여놓고 싶은 사람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모델을 사려고 한다면 디스커버리와 레인지로버, 그리고 레인지로버 스포트라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된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타사의 온로드 지향 SUV의 대안 역할도 한다. 특히 BMW X5와 X6, 메르세데스 벤츠 M 클래스처럼 포장도로에서 승용차 같은 주행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다양한 주행조건과 험로에도 대응할 수 있다. 뛰어난 지형반응 네바퀴굴림 시스템(터레인 리스폰스)이라는 덤 아닌 덤을 지니고 있다. 험로 극복을 위한 기술과 이미지는 곧 다른 브랜드에 쏠리는 시선을 랜드로버로 돌리는 계기를 만든다. 랜드로버에게는 그런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레인지로버 스포트는 오프로더라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차는 온로드에 비중을 두고 만든 모델이다. 물론 터레인 리스폰스도 갖췄다. 그러나 스티어링 반응이나 핸들링은 오프로더 지향인 디스커버리나 만능인 레인지로버보다 더 민첩하고 직관적이다. 다른 모델보다 낮고 날렵한 모습인 것도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TDV6 3.0리터 디젤 엔진과 ZF 8단 자동변속기는 반응이 상당히 뛰어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몸무게에도 초반부터 시원한 가속력을 느낄 수 있다. 토크감은 고속에서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배기음도 꽤 박력 있게 귓전을 울린다. 승용차보다 지상고는 높지만 커브에서도 서스펜션은 차체를 든든하게 받치고 바퀴가 힘차게 노면을 끌어안는다. 앉는 위치가 SUV치고는 낮은 편인데도 뒷좌석은 무릎 공간에 여유가 있다. 트렁크 공간도 바닥이 약간 높다는 점을 빼면 실용성 관점에서도 크게 흠잡을 곳은 없다.

일단 레인지로버 스포트를 통해 랜드로버에 관심을 갖게 되면 다른 모델로 시야를 넓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차는 소비자에게 디스커버리 혹은 레인지로버의 선택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크기와 쓰임새, 가격 측면에서 소비자에서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랜드로버가 거느린 대형 모델 라인업에 관심을 두게 한다. 7명을 태우고 오프로드 주행에 특화된 성능을 원한다면 디스커버리를 선택하면 되고, 디스커버리와 레인지로버 스포트의 능력을 모두 갖고 싶다면 레인지로버로 가면 된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가격 차이가 비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 모델을 기준으로 디스커버리의 최상위 모델과 레인지로버 스포트는 약 2000만원, 레인지로버 스포트와 레인지로버는 약 2670만원 차이다. 저렴한 모델에 선택사항을 몇 가지 추가하면 차이는 더 줄어든다.

재미있는 사실은 레인지로버 스포트가 그저 호객꾼의 역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손님을 유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의 온로드 지향 SUV를 고려했던 사람이라면 레인지로버 스포트의 특성이 뚜렷하게 와 닿을 것이다. 만약 그런 특성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맞아떨어진다면 레인지로버 스포트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디스커버리의 큰 몸집과 둔한 움직임이, 레인지로버의 위압감이 부담스러운 사람도 자연스럽게 레인지로버 스포트를 선택할 것이다. 이 차의 판매대수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곧 위와 같은 과정으로 결정을 내리는 소비자가 있다는 증거다. 영리한 브랜드일수록 사람들이 혹할 만한 미끼를 촘촘하게 잘 던지기 마련이다. 낚시터에 가보면 낚시꾼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쪽으로든 걸리면 된다. 이미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는 이런 식으로 낚시한다. 하지만 이제는 랜드로버도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모델 사이의 빈틈을 점차 줄여간다. 레인지로버 스포트를 통해 랜드로버의 이런 마케팅 전략을 읽을 수 있다.  글•류청희(자동차 평론가)